난 일어나 일층 로비에 있는 ATM기계로 가서 현금 4만 페소를 인출했다.
그리고 근처의 쇼핑몰로가 저렴한 핸드폰 한 개와 앙헬리따에게 줄 신발도
한 켤레 사서 병원으로 돌아왔다.
앙헬리타는 엄마 옆에 앉아 내가 사놓은 빵과 쥬스를 먹고 있었다.
“앙헬리따, 이리 와봐. 아저씨가 너 주려고 예쁜 신발을 샀는데 신어볼까?”
난 소녀에게 헬로키티가 그려진 작은 신발을 신겨주었다.
새 신을 신은 소녀의 작은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난 그녀의 엄마에게 다가가 4만 페소가 든 봉투를 손에 쥐여 주었다.
“전 오늘 밤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충분치 않은 돈이지만 입원비 정산하시고, 일단 숙소부터 마련해 보세요.
한국에 가더라도 자주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핸드폰입니다. 제 한국 번호를 입력해 놓았어요.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 아니겠습니까? 서로 끊지 말고 살아야겠지요.
저도 앙헬리따가 보고 싶으면 가끔 전화하겠습니다.”
소녀의 엄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만 흘리며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참, 애 아빠 이름을 말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볼로 파릴리아예요.”
“알겠습니다. 수술은 어디서 받으셨습니까?”
“릴로안에 있는 성요한병원에서요.”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새 신을 신은 채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소녀에게 말했다.
“앙헬리따, 아저씨는 이제 아저씨 집으로 가야 해.
엄마 잘 보살펴 드려야 한다. 아저씨가 자주 전화 할게.”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작은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아카시아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난 호텔로 돌아왔다.
피곤했다.
노트북을 여니 아닐린으로부터 메일이 와 있었다.
“여기 이스탄불이에요.
어제 알렘다르 거리에 있는 한국인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찾아갔었어요.
교회 사무실에서 일하는 터키 여직원을 만났지요.
그녀도 쿠르드족이라 우리는 금세 친해졌고, 어제 저녁 외부에서 만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녀에게서 얻은 정보예요.
이스탄불 강림교회는 2년 전에 세워졌어요.
교회 명의는 L.O.P.재단 이름으로 되어 있고,
담임 목사는 신경석, 56세 한국인 이예요.
터키 장기기증 운동본부 이사직을 맡고 있어요.
이 교회는 앙카라에 ‘강림원’이란 의료법인도 갖고 있다고 해요.
병상이 150개쯤 되는 큰 병원이래요.
신도 70%가 L.O.P.재단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어요.
일단 여기까지예요.
며칠 더 여기 머물며 정보가 모여지는 대로 메일 드릴게요.
참, 그 교회에도 앙크가 있었어요. 위치는 교회 정문 바로 위입니다.
-아일린-“
모자이크가 맞춰지듯, 악마는 하나씩, 천천히, 그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L.O.P.재단의 자금줄은 장기밀매야.
그렇게 만들어진 자금력을 무기로 교회권력을 주무르는 거지.
그리고 끊임없이 세력을 확장해간다.’
난 즉시 아일린에게 답장을 썼다.
“아일린, 내 말 잘 들어.
L.O.P.재단은 장기기증 운동이란 명분을 내걸고 장기밀매를 하는 조직이야.
그렇게 자금을 모으고, 그 자금력으로 교회를 짓는 거지.
움직임에 각별히 조심해야 돼.
누군가 자신들의 비밀을 캐고 있다는 걸 눈치채게 되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사악하고 위험한 집단이야.
너 자신을 그들에게 노출시켜서는 절대 안 돼.
난 내일 새벽, 한국으로 간다.
부디 몸조심하길 바래.
-Kenneth-"
메일을 보내고 지도를 펼쳐 다섯 번째 동그라미를 그렸다.
난 잠시 침대에 누워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들과 그것들의 순서가 하나씩 가닥을 잡아간다.
지금 시간 일곱 시, 02시 30분 출발. 일곱 시간 반 남았다.
‘그래, 떠나기 전 해야 할 일이 있어.’
난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가벼운 옷차림에 USB와 카메라를 배낭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호텔을 나와 택시를 탔다.
“릴로안으로 갑시다.”
40분 후, 릴로안 성요한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택시를 세우고,
운전사를 기다리게 한 후 걸어서 교회로 갔다.
평일, 늦은 시각이라 교회는 굳게 잠겨 있었다.
교회 정문을 끼고 돌아 건물 뒷담으로 갔다. 주변을 살핀 후 담장을 넘었다.
자세를 낮추고 고양이처럼 기어서 교회 사무실 쪽으로 움직여갔다.
사무실 창문만 불이 켜있었다. 여닫이 창문은 반쯤 열려있었고,
쇠를 긁는 쉰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열린 창문 틈으로 안을 드려다 보았다.
늙은 신부가 검은 점퍼를 입은 한남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신부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어떻게 지난주 입금이 이십만도 안 되는 거야?
일 킬로를 가져갔는데 수금액이 이십만 밖에 안된다는 게 말이 돼?”
신부는 검은 남자에게 화를 내고 있었고, 책상 위엔 돈다발 두 개가 놓여있었다.
“요즈음은 단속이 심해 애들이 집 밖으로 나가기도 힘듭니다.”
풀이 죽어 대답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멀리서도 낯이 익었다.
바로 내 호텔 방으로 들어와 짝퉁 앙크 십자가를 가져간 놈이다.
늙은 신부는 남자가 내미는 종이를 신경질적으로 받아 읽고,
내용을 컴퓨터에 입력했다.
“레이먼드에게 말해.
다음 주까지 오십만 채우지 못하면 신장을 내놓아야 한다고. 가봐!”
남자는 풀이 죽은 채 일어나 사무실을 나갔다.
잠시 후 주차장 쪽에서 오토바이 시동 소리가 들리고,
오토바이는 교회 정문을 빠져나갔다.
난 그때까지 숨을 죽인 채 그들의 모습을 열린 창문 틈으로 엿보고 있었다.
컴퓨터에 입력을 끝낸 늙은 신부는 일어나, 입고 있던 신부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돈다발을 봉투에 넣어 들고, 전등 스위치를 내린 후,
사무실을 나갔다.
난 좁은, 교회 담 옆의 통로를 따라 고양이처럼 자세를 낮춘 채 교회 주차장이
보이는 곳에서 신부가 나오길 기다렸다.
평상복 차림의 신부는 교회 문을 열고 나와,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하얀색의
승용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하얀색 승용차는 교회 정문을 빠져나갔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가드가 거수경례를 붙였다.
난 다시 사무실 창문 밑으로 와 사뿐히 창문을 넘었다.
창문은 열려 있었고 실내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난 핸드폰을 켜 실내를 비추며 신부가 앉았던 책상 앞으로가 컴퓨터를 켰다.
모니터가 켜지고 본체의 냉각 팬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우스를 움직여 내 컴퓨터에 들어가 데이터 파일을 찾았다.
하드디스크는 C와D, 두 개로 분할되어 있었고 모든 데이터는 D 드라이브에
저장되어 있었다. 저장된 데이터의 총용량이 16기가가 넘었다.
난 가져간 USB를 본체에 꽂고, D 드라이브를 통째로 복사했다.
그리고 다시 USB를 열었다. 사용 가능 공간이 24기가였다.
그리고 복사된 파일을 붙여넣었다.
상태 창이 나타나고 다운로드가 시작된다. 남은시간 1분 29초.
파일이 다운로드 되는 동안 난, 내 심장의 박동 소리가 적막한 실내를
울리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일분이 한시간 같았다.
상태 창이 사라지고 난 USB를 뽑아 배낭에 넣었다.
컴퓨터를 끄고 책상 위에 있는 신부의 명함을 한 장 집어넣었다.
일을 마친 나는 서둘러 들어왔던 창문을 넘어 담을 타고 넘었다.
주변에, 한국 남자가 교회의 담을 타고 넘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은 없었다.
담을 돌아 대기하고 있는 택시로 돌아오며 교회를 돌아봤다.
정문 옆에 가드가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졸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팁은 넉넉히 드릴게요. 막탄으로 다시 갑시다.”
택시는 하이웨이를 지나 뉴브릿지를 건너 막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시간이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난 택시에서 내리며 기사에게 2천 페소를 주었다.
돈을 받은 운전사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호텔로 들어서자 로비에서 사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 시간 다 돼가는데 오밤중에 어딜 갔다 오는 거야?”
“릴로안 교회에 다녀오는 길이다. 따라와.”
난 사니를 데리고 방으로 올라왔다.
“시간이 없으니 짧게 이야기할게. 성요한 교회는 바티칸 소속이지만
벤자민 신부는 L.O.P.에 포섭되어 있어.
그리고 그들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지.
주로 마약 밀매를 통해 장기를 공급받는다.
그곳에 몰래 숨어 들어가 관련이 있을 만한 파일들을 복사했어.
일단 여기까지만 알고 있어라.
한국에 들어가면 자세한 내용을 메일로 보내줄 거야.
네 도움이 필요할지도 몰라.”
사니는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너, 참, 끝내준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 짐을 들어주며 로비로 내려왔다.
체크아웃을 하고 우리는 호텔을 나와 막탄 국제공항으로 갔다.
공항은 호텔에서 오 분도 안되는 거리에 있었다.
공항 청사로 들어가기 전 난 사니를 껴안고 말했다.
“고맙다.”
“너는 가는 곳마다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 놈이야. 몸가짐 잘해라.”
난 그렇게 사니와 헤어져 청사 안으로 들어왔다.
항공사 카운터로가 보딩패스를 끊고, 이미그레이션을 거쳐 보세 구역으로 들어왔다.
게이트가 열리려면 30분이 남아 있었다.
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USB를 꽂았다.
복사된 폴더는 모두 20개가 넘었다.
폴더는 모두 지역별로 이름이 붙어 있었고,
각 폴더 안에는 날짜별로 거래량과 금액, 거래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난 그중에서 한 달 전 기록들을 열어 거래자 명부를 살폈다.
그리고 난 명단에서 찾던 이름을 발견했다.
“볼로 파릴리아, 거래량 110그램, 5만 오천 페소 입금.”
그리고 장기거래자 명단엔 앙헬리따 엄마의 이름도 있었다.
“그레이스 파릴리아”
게이트가 열렸다. 안내멘트가 이어지고 있었다.
난 USB를 뽑아 가방에 넣고 게이트로 갔다.
막탄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동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이륙을 끝낸 비행기가 고도를 찾았을 때 안전벨트 싸인이 꺼지고,
스튜어디스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의자를 뒤로 저치며 눈을 감았다.
지난 시간 흩어졌던 기억의 파편들이 모습을 갖춰가며 물결처럼 흘러간다.
‘도착하면 먼저 이모님 댁으로 가야지’
난 한국에 가족이 없다.
일찍 남편과 사별하셨던 어머니는 슬하에 나와 여동생, 두 남매를 두셨고,
식당을 운영하며 자식들을 키우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가 제대 후, 대학을 졸업하던 해,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폐암 선고가 내려지고 의사로부터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일 년이란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셨다.
그리웠던 사람들을 만나 회포를 풀고, 미워했던 사람들을 만나 맺혔던 한을 풀었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무덤 옆에 자신의 자리를 준비하시며 그곳에 사과나무를 심으셨다.
“어머니, 왜, 사과나무를 심으세요?”
“그래야 내가 죽으면 너희들이 이곳에 사과라도 따 먹으러 오지 않겠니?”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여동생은 삼일을 울었다.
난 동생이 그토록 서럽게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 후 그녀는 학교를 졸업한 후 결혼해서 미국에 이민을 갔고,
그리고 얼마후, 난 두바이로 떠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