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통증을 느끼며 눈이 떠졌다.
호텔방, 침대, 테이블, 노트북......
하나씩 사물들이 윤곽을 잡아나간다.
그리고 바닥에 엎어져 있는 자신을 느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목에 대본다.
목줄은 있었으나 십자가 펜던트가 없다.
노트북, 카메라, 가방······. 다행히 다른 건 그대로 있다.
놈은 내 목에 걸려있던 앙크 십자가만 떼어갔다.
그리고 내 눈길은 열어 놓았던 노트 북위의 메모지에 꽂힌다.
“십자가를 가져간다.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아.
더 이상 사건을 키운다면 후회하게 될 거야. -L.O.P.-”
무의식적으로 청바지 안주머니에 손이 간다.
원래의 앙크 십자가는 그대로 있었다.
“휴우······.”
난 짐을 정리하고 프런트 데스크에 전화를 걸었다.
“체크아웃 부탁합니다. 택시 불러주시고요.”
호텔을 나와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짐을 싣고 공항 근처의 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사니였다.
“너 호텔 옮겼니? 방금 호텔에 들렀었는데, 한 시간 전에 체크아웃했다고 하더라.”
“응, 내일 모레 새벽에 비행기 예약해 놨어. 출발 시간 놓칠까 봐 공항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그러잖아도 전화하려고 했어.”
“막탄이냐?”
“그래 막탄 공항 근처, 데이스인 호텔이야.”
기다려, 갈게. 오늘 한잔해야지. “
전화를 끊고 30분쯤 후에 사니는 로비에서 전화했다.
얻어맞은 뒤통수가 아팠다. 가벼운 차림으로 로비에 내려오니 사니가 앉아 있었다.
“앉아봐. 너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말해봐. 우리 친구 아니냐?
그리고 여긴 세부야. 나는 이곳 사람이고. 혼자 앓지 말고 얘기해봐.”
그랬다. 그는 믿을만한 친구였다.
난 그동안 세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흠, 그랬었구나. 아무튼, 그 파피루스가 애물단지야. 그래, 얻어맞은 대가리는 괜찮으냐?”
“괜찮아. 별거 아니야. “
“일단 목걸이를 가져갔으니 별일이야 더 있겠느냐마는 조심해야 할 것 같다.
내 말 들어. 파피루스를 찾을 때부터 난 너와 함께 있었어.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나도 돕겠어. “
사니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호텔을 나와 저녁을 먹고 시내로 향했다.
세부 다운타운, 푸엔테 오스메니아.
6시가 넘어 해가 지면서 한적했던 이 거리는, 사람들이 모여들며 환락가로 변신한다.
각종 노점상과, 카페, 노래방, 마사지 샾, 디스코텍, 비키니바......
수많은 업소들이 불을 밝히기 시작하면서 거리는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태국의 카오산 로드를 연상시킨다.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밤이 되면서 환락을 위해 이곳에 모여들고 있었다.
사니를 따라 들어간 곳은 ‘알코올로지’란 간판을 단 디스코텍이었다.
입장료 100페소를 내니 손목에 도장을 찍어준다. 웨이터가 안내하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산미구엘 맥주 다섯 병이 얼음통과 함께 나온다.
맥주 두 병을 비우며 우리는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넓은 실내는 조명을 최대한 죽이고, 레이저와 벽에 걸려있는 비디오 모니터들만이
동영상을 만들어내며 싸이키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음악이 하우스 뮤직에서 슬로우로 바뀌고, 니콜의 ‘허쉬 허쉬’가 플로어의 열기를 덮는다.
앞의 테이블의 앉아있는 여자들이 우리에게 눈길을 던진다.
사니가 일어서 그녀들의 테이블로 갔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눈 사니는 그중 두 명을 데리고 우리 테이블로 온다.
그중 한 여자가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들어온 지 10분도 안 되어 자연스럽게 짝이 맞춰졌다.
맥주가 추가됐고, 찬을 채우고 잔을 비웠다.
여자들은 사니와 나의 손목을 잡아 플로어로 이끌었다.
몸속으로 들어온 알코올이 나의 정체성을 휘감으며 그 마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알코올은 혈관을 타고 돌며 심장박동을 리듬 삼아 내 몸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을 때리는 강한 비트에 내 몸을 맡긴다. 형식도 필요 없고 스텝도 없다.
그저 베이스 드럼의 규칙적인 비트에 따라 몸이 움직인다.
여자는 차가운 두 손을 뻗어 더운 내 얼굴을 감은 채 가냘픈 몸을 흔들고 있었다.
자정을 넘기고 그곳을 나왔다.
사니는 호텔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지만, 난 극구 사양하며 사니를 보냈다.
머리가 아팠고 차를 타면 토할 것 같았다.
정신이 맑아질 때까지 걷고 싶었다.
푸엔테의 밤거리를 혼자 걷고 있을 때 뒤에서 한 아이가 나를 부른다.
여섯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어린 소녀는 긴 머리에 큰 눈을 갖고 있었고 맨발이었다.
소녀는 한 손에 들고 있는, 하얗고 작은 꽃으로 만든 팔찌를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산파기타예요. 5페소요.”
소녀가 들고 있는 하얀 꽃에서 아카시아 향기가 났다.
난 20페소 지폐 한 장을 건네주고 꽃 팔찌 4개를 받았다.
무릎을 굽혀 앉으며 소녀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뭐야?”
“앙헬리따.”
“몇 살이니?”
“여섯 살.”
“엄마는 어디 계시니?”
“저기요.”
소녀가 작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셔터가 내려진 건물 앞에 박스를 깔고 잠들어있는 여자가 있었다.
“엄마”
소녀는 달려가 엄마를 깨운다.
그리고 내게 받은 20페소짜리 지폐를 엄마에게 내민다
. 소녀의 엄마는 힘겹게 일어나며 앞에 서 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소녀가 말했다.
“엄마는 배가 아파요.”
여자는 한 손으로 왼쪽 옆구리를 잡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소녀는 작은 손으로 엄마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준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힘들겠지만 일어날 수 있으세요?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난 서둘러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택시를 불러 소녀와 엄마를 태웠다.
“가까운 병원으로 갑시다.”
택시는 오스메니아 써클을 돌아 시립병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비상등을 켜고 들어오는 택시를 본 가드는 직원들을 불러 이동 침대를 밀고 나와
소녀의 엄마를 응급실로 옮겼다.
혈압과 체온을 재고, 링거액을 꽂았다.
잠시 후 담당의사가 내게 물었다.
“보호자 되십니까?”
“보호자는 아닌데, 길거리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을 보고 데려온 겁니다.”
“상태가 안 좋습니다. 서둘러 수술해야 할 것 같아요. 보호자 싸인이 필요합니다.”
난 그때까지도 꽃 팔찌를 꼭 쥐고 있는 소녀에게 물었다.
“아빠는 어디 계시니?”
“아빠, 없어요.”
난감했다.
“제가 싸인하겠습니다.”
내가 뭔데 싸인을 하나 싶었지만 그런 건 나중에 따질 일이었다.
수술 동의서에 싸인을 하고, 경리과로 가, 수술보증금 만 페소를 지불했다.
수술에 필요한 기본 검사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소녀의 엄마를 실은 이동침대가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녀와 난 수술실 앞 의자에 앉아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어느새 소녀는 하얀 꽃 팔찌를 손에 쥔 채, 내 무릎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작은 얼굴에, 긴 속눈썹이 덮은 눈을 감은 채 잠들어있는 소녀는 그대로 작은 천사였다.
수술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술을 마친 소녀의 엄마는 회복실로 옮겨졌고, 난 수술을 마친 의사와 마주 앉았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고요······.
근데 이상하더군요. “
“이상하다니요?”
“콩팥이 하나밖에 없었어요. 환자가 신장 절제 수술을 얼마 전 받은 것 같은데,
떼어낸 자리의 조치가 적절치 않아, 복수가 차고 염증이 심했습니다.
신장 절제 수술의 상태로 보아 정상적인 수술이 아닌것 같아요.”
“정상적이지 않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
“의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필리핀은 장기밀매가 횡행하는 나라입니다. 빈민들을 대상으로 한 장기밀매 조직들이 판을 치고 있지요.
그저 제 소견입니다만, 환자도 거기에 연관되었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튼, 수술은 잘됐으니 2, 3일 후면 퇴원할 수 있을 겁니다.”
의사와 상담을 마친 나는 잠들어있는 소녀를 안고 회복실로 갔다.
소녀의 엄마는 입에 산소 호흡기를 단체 잠들어 있었고, 난 잠든 소녀를 옆의 보조침대에 눕혔다.
난 의자에 앉아 거기서 밤을 새웠다.
잠시 잠이 들었었나 보다.
간호사가 환자의 혈압을 재는 기척에 눈을 떠보니 소녀의 엄마는 마취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입에 걸려있던 산소 호흡기는 제거되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똑바로 누운 채 천정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의 큰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난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깨어나셨군요. 좀 어떠세요?”
그녀는 수액이 꼽혀있는 팔을 들어 눈물을 훔치며 내 팔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난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아무 걱정 말고 푹 쉬세요.”
난 병원을 나와 편의점에 들려 환자와 앙헬리따가 먹을만한 것들을 사 가지고 회복실로 돌아왔다.
앙헬리따는 그때까지 엄마 곁에서 잠들어 있었다.
난 그녀 옆에 앉아 조심스럽게 소녀의 엄마에게 물었다.
“의사가 그러던데 얼마 전 신장 절제 수술을 받으셨다고요.”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생각하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 달 전, 애 아빠가 저에게 말했어요. 재단에 가서 신장기증을 하면 십만 페소를 준다고요.
신장은 하나만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어요.
전 그 돈으로 고향에 가, 장사를 하며 딸아이를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장기 기증 재단에서 기증받을 사람이 여자라, 여자의 신장이 필요하다고 했데요.
그래서 수술을 받고 10만 페소를 받았지요.
애 아빠는 그 돈을 받은 후 사라졌어요. 애 아빠는 마약 중독자였어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무지에서 오는 결과였다.
멀쩡한 사람을, 기증자가 기증받을 사람도 모른 채, 어떻게 산사람의 장기를 떼어낼 수 있단 말인가?
홀로코스트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었다.
난 언뜻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 물었다.
“그 재단이 무슨 재단인가요?”
“잘 모르겠어요. 애 아빠가 L.O.P 재단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헉! L.O.P.!”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