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오후에 난 파블로의 전화를 받고 성 소피아 사원으로 갔다.
정문 앞에서 전화를 걸자 그가 나와, 나를 2층, 자기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의 사무실은 2층 서고를 지나 오른쪽 끝에 있었다.
사무실엔 몇몇 직원들이 각종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었고,
그중 몇 명이 파블로와 함께 들어오는 나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파블로는 나에게 자기 책상 앞에 자리를 내주며 앉기를 권했다.
“오전 회의를 끝내고부터 자료를 찾기 시작했어요.
있을 만한 곳은 다 찾았습니다. 찾은 자료들을 살피면서
저도 슬슬 흥미가 일기 시작하더군요. “
그러면서 그는 사진들이 복사되어있는 파일을 내게 건넸고,
그가 준 파일을 열어 사진들을 살폈다.
“대략 120장 정도입니다. 저도 관심이 생겨 사진들을 살펴보았지요.
그리고 두 개를 찾았습니다. 생각대로 하나는 바울의 모자이크 옆에 있었고,
하나는 베드로의 조각상 안에 있었지요.
사진에 위치를 표시해 놓았으니 내려가셔서 확인하시지요.
제 생각엔 더 많이 있을 거라 사려됩니다.”
“정말 감사하군요. 처음 이곳에 문양을 찾으러 왔을 땐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을, 이렇게 순식간에 해결해 주시는군요.”
"사진에서 문양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제 도움이 더 필요하시면 언제라도 주저 마시고 연락 주십시오. “
난 그의 사무실을 나와 사진에 표시된 위치를 찾아갔다.
사도 바울의 모자이크는 고대 서적 전시실의 오른쪽 위에 있었고,
테마관 옆의 베드로 조각상에서 손목에 걸린 앙크 십자가를 찾을 수 있었다.
난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고 수첩에 그것을 기록했다.
박물관을 나오며 내친김에 파블로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바쁘신데 자꾸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이왕 부탁드린 김에 한번 더 수고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제레미아가 언급한 예수의 사도들 중에 바울과 베드로, 요한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과 관련된 사진들도 복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하...... 그러지요. 제레미아가 언급한 여섯 사탄들의 구체적 이름을
확인하고 싶으시군요. 내일 오후에 준비해서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는 흔쾌히 나의 염치없는 요청을 거부하지 않았다.
난 그날 밤 지도 위에 세 번째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었다.
그 시간, 람세스 교수는 제레미아 교회에서 파피루스를 찾고 있었다.
그는 집요했다.
다시 제레미아의 석관 뚜껑을 열고 단서가 될만한 것을 찾던 중 간신히
앙크를 발견했고,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바위에 새겨진 십자가를 찾았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그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바위를 밀어내고 땅을 팠다.
그러나 그는 멀리서 그를 쳐다보고 있는 검은 남자의 눈길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검은 남자는 그가 교회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를 감시하고 있었고,
며칠 전 새벽, 오르막길에서 마주쳤던 금발의 남자를 기억해 냈다.
금발이 묘지를 파내는 것을 본 검은 남자는 경찰에 신고를 해놓은 상태였고,
경찰이 올 때까지 멀찌감치 숨어 금발을 주시하고 있었다.
람세스 교수는 드디어 석함을 찾아냈고,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석관에 들어있던 메시지를 발견했다.
“이건 또 뭐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집어 메시지를 읽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람세스 교수님. 이제 그만 하시지요.‘
파피루스는 당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만일 더 이상 계속하신다면 제레미아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
“으아악! 개새끼!”
그는 짐승 같은 괴성을 질렀다.
순간,
“탕!”
밤하늘을 찢는 총성에 놀란 그는 주저앉고 말았다.
“양손 뒤로하고 엎드려!”
그는 수갑을 찬 채 경찰서 유치장에서 날밤을 새워야 했다.
그리고 도굴범으로 구속된 람세스 교수는, 그의 변호사가
12만 리라에 달하는 보석금을 지불하고서야 유치장에서 나올 수 있었다.
람세스 교수는 그 뒤 출국금지가 내려진 상태에서 터키에 머물며 1년여의 재판을 받았다.
다음날 오후에 나는 파블로에게서 전화를 받았고,
감사의 의미로 그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터키 이슬람 미술관 근처의 ‘사팍’ 레스토랑에서 아일린의 외삼촌,
파블로와 저녁식사를 같이했다.
대리석으로 장식된 실내는 붐비지 않았고, 식당 벽면은 손으로 직접
그린 대형 풍경화와 인물화로 채워져 있었다.
식사를 하며 파블로가 말했다.
“처음 제레미아 유서의 내용을 읽었을 땐, 기괴한 내용에 전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내용이었으니까요.
성경에서 그토록 미화된 여섯 사도들이 예수를 죽인 사탄이라니요...... “
“맞습니다. 저도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서가 담고 있는 전체적 의미엔 깊이 공감합니다.
그가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는 교회의 권력이지요.
얼마나 많은 교회가,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권력으로 핍박해 왔습니까?
종교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까?”
“그건 맞습니다. 세계사에 등장하는 전쟁의 90프로가 종교의 이름으로 일어났지요.
지금도 그 전쟁은 시리아와 이라크, 그리고 아프리카 각지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슬람이던 기독교던 그 뿌리는 구약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시작하지요.”
나는 말을 이었다.
“이슬람의 모스크건, 카톨리 성당이건, 또 프로테스탄트의 교회건......
모든 교회들이 성전이란 이름으로 그들의 권력을 위해 더 큰 교회들을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하고,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
“그래요, 제레미아는 그것을 경고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천 년이 지난 지금 당신은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가소로운 말로 들리시겠지만, 난 제레미아가 말한 666개의 교회를 찾아
그것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길 것입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언젠가 메기나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누군가가
저의 기록에 표시된 교회들을 하나씩 허물겠지요.
그때까지 제레미아의 비밀과 기록들이 지켜져 보관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와의 대화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고 대화를 마친 나는, 그가 건네준
두 번째 파일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당을 나오며 파블로가 말했다.
“예수는 좋은 사람 이예요. 그의 말대로 신은 교회가 아니라
우리들 가슴속에 계실 겁니다.
하아! 아일린을 못 본 지도 오래되었군요.
당신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 아이가 생각납니다.”
난 이스탄불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파블로가 건네준 삼백 여장의 사진들을 꼼꼼히 살피고, 또 살폈다.
그리고 제레미아가 말한 여섯 명의 사도들의 이름을 알아낼 수 있었다.
"베드로, 바울, 마테, 요한, 그리고 바돌로메와 안드레"
이스탄불을 떠나기 전날 밤 아일린에게 메일을 썼다.
“보고 싶은 아일린에게-
내일 이스탄불을 떠나려 해.
그동안 터키에서 너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가슴에 파피루스처럼 묻고, 내 땅 한국으로 갈 거야.
가는 길에 세부에 들려 사니를 보고 가겠지.
어쩌면 그곳에서도 앙크를 보게 될지 몰라.
넌 내가 황량한 사막을 목말라 걸을 때,
거기서 발견한 샤프론(Saffron) 같았어.
네 삼촌이 말씀하시더라.
신은 교회가 아니라 우리들 가슴속에 있다고.
우리 가슴속의 신이 항상 함께할 거야.
사랑한다.
-Kenneth-
다음날 난 터키에서의 긴 여행을 마치고 세부행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비행기를 타기 전 사니에게 도착 시간을 말해뒀으니 공항에 나와 있을 것이다.
예정 시간보다 30분이나 넘어서야 비행기는 세부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건물을 빠져나오니 반가운 얼굴,
사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와! 짜식, 까칠해졌네.”
그는 나를 껴안으며 반가워했다.
“그래, 잘 지냈니? 오랜만에 가족들하고 지내니 좋지?”
그는 내 트렁크를 들고 주차장으로 걸으며 말을 이었다.
“까칠해 진거 보니 오랫동안 여자 맛을 못 본 거 같은데? 좋은데 있으니 가쟈!”
“가긴 어딜가, 밤 열 시가 넘었는데.”
“세부는 달라. 시내만 나가면 밤새 여자애들이 득시글거린다고.
무슬림들하곤 다르지.”
“알겠는데, 늦었으니 일단 호텔부터 잡고. 내일도 있잖아.”
“호텔은 무슨! 한잔하고 우리 집으로 가면 돼.
너 온다고 와이프가 다 준비해 놨다. 와이프한테는 네가 새벽 한 시 반에
도착한다고 썰풀어 놨어. 잔말 말고 따라와.”
“짜식, 나보단 잿밥에 관심이 있었군.”
올드 브릿지를 건너 시내 쪽으로 방향을 잡으며 사니가 물었다.
“그래, 파피루스는 어떻게 됐냐?”
“그거 그냥 거기에 다시 묻어뒀어. 그건 거기에 있어야 할 물건이야.”
“잘 했다. 내 말 들으면 적어도 손해는 안 본다니까.
그나저나 내가 써 놓았던 종이쪽지는 어떻게 했냐?”
“그것도 거기 그냥 있지.”
“뭐야? 임마, 그건 꺼냈어야지.
만일 경찰이 그걸 발견하면, 필적이나 지문, 뭐, 이런 거......
어휴, 넌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냐? “
“걱정마라, 걔들이 너 잡으러 세부까지 올 거 같니?”
사니는 덩치에 비해서 겁이 많은 남자였다.
사니는 휘황찬란하게 조명을 밝힌 건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당당하게 앞장서 건물로 들어갔다.
아마도 단골집인 모양이었다.
클럽 매니저로 보이는 중년 여자는 사니가 들어오자 달려와
그의 팔짱부터 끼고 물었다.
“몇 명?”
사니는 손가락 두 개를 세우며,
“중동에서 한 삼 년 굶다가 온, 내 친구야. 잘 모셔야 해.”
여자가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자마자
웨이터가 맥주 6병과 과일안주를 놓고 나갔다.
잠시 후 중년 여자가 허리춤에 번호표를 단 열댓 명의 여자들을 데리고
들어와 우리가 앉아있는 소파 앞에 일렬횡대로 세웠다.
사니가 손을 들어 여자들을 가리키며,
“자, 마음에 드는 대로 골라봐.”
난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았다.
“아, 난 됐다. 피곤하기도 하구.”
“짜식, 부끄러워하기는, 내가 골라주마. 야, 8번, 2번, 이리와. “
8번 여자가 내 옆에 앉자마자 내 잔에 맥주를 따르며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아, 케넷. 너는?”
“칼라예요.”
짝이 맞춰지자 사니가 건배를 외쳤다.
“사막에서 맺은 우정을 위하여! 건배!”
“건배!”
맥주잔을 비운 사니는 함박웃음을 지은채 연달아 세곡의 노래를 불렀다.
8번 여자가 노래책을 건네주며 노래를 권했다.
“그래, 까짓것. 놀아보자.”
노래하고, 술 마시고, 또 노래하고, 술 마시고, 또, 노래, 또, 술, 또......
그렇게 두 시간을 채우고 클럽을 나와 사니의 집으로 갔다.
늦은 시각이라 다른 식구들은 자고 있었고,
사니의 와이프가 기다리고 있었던 듯 문을 열어주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늦은 시각 피곤하실 테니 씻고 주무세요.”
사니의 와이프는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방문을 열어주곤,
술냄새를 풀풀 풍기는 사니의 귀를 잡아끌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