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오후, 난 다시 세네마시 광장으로 갔다.
내게 십자가를 팔던 그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같은 장소에 노점상이 있었고,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 남자 대신 어린 소년이 물건을 팔고 있었다.
난 소년에게 다가가 어젯밤에 산 십자가 목걸이를 보여주고, 그것을 팔던 남자에 대해 물었다.
“우리 아빠예요. 오늘은 몸이 아프셔서 제가 대신 나왔어요.”
“아, 그래, 네 이름이 뭐야?”
“오즈예요. 열 살이고요.”
소년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나이를 말했다.
아마 많은 어른들이 이름 다음엔 나이를 묻는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후득, 후드득,......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이, 오늘 장사는 글렀어요. “
소년은 서둘러 펼쳐놓았던 좌판을 반으로 접어 어깨에 멘 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난 소년이 앉아있던 접이식 의자를 들어주고 비를 맞으며 소년을 따라갔다.
“집으로 가니?”
“가야지요. 비가 오는데. 됐어요, 의자 주세요.”
“아니야 집까지 바래다줄게. 아빠를 만나고 싶어.”
“우리 아빠는 한번 판 물건은 물려주지 않아요. “
“아, 목걸이를 물리려는 게 아니야. 아빠한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
“그럼 따라오세요. 그리 멀지 않으니.”
소년은 자기만 한 좌판을 어깨에 메고 앞장서서 걸었다.
소년의 집은 세네마시 광장에서 멀지 않은 빈민가에 있었다.
철공소 옆의 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좁은 공간에 작업 테이블과 액세서리를 만들 때 쓰는 작업공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안쪽 칸막이 뒤로 반쯤 보이는 침대 위에 남자가 누워있었다. 소년은 메고 있던 좌판을 내려놓고 그 남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빠, 어떤 손님이 아빠를 만나고 싶다고 해요.”
돌아 누워있던 남자는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역시 그의 얼굴은 내가 꿈에서 보았던 마르하르의
얼굴이었다.
난 그 남자 앞으로 다가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몸을 일으킨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아빠는 장님이에요.”
난 예의를 갖춰 그에게 말했다.
“어제 십자가 목걸이를 샀던 사람입니다. 몸이 불편하신 것 같은데 예고 없이 찾아와서 실례를 범했군요.
그리고 목에 걸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들어 그 남자의 손에 쥐어줬다.
그 남자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시리라고 생각했지요.”
“예? 어떻게 제가 올 것을 아셨나요?”
남자는 길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전 어려서 사고로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 목걸이는 작년에 돌아가신 제 아버님이 만든 겁니다. 저는 시력을 잃고부터 장신구 만드는 일을 아버지한테 배웠어요. 아버님은 돌아가시면서 그 목걸이를 제게 주시며 말씀하셨지요.
'넌 앞을 못 보니 장신구 만드는 일을 하며 살아라. 장신구를 만들어 팔되 이 십자가만은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누군가 이 십자가 목걸이를 살 것이니 그에게 이것을 팔 거라. 그가 이 십자가를 알아본다면 반듯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때 그에게 이 말을 전해라.'
이렇게 말씀 하셨어요."
“아버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이 십자가는 사탄의 인장이니 이 목걸이를 가진 자가 궁전 안에서 인장을 볼 것이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그 궁전이 666개이며, 그것을 찾아 소상히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라고 하셨어요.”
“666이라면 계시록에 나오는 숫자군요.”
“맞아요. 아버님은 카톨릭 성경을 자주 읽으셨지요. 아버님이 제게 남긴 이 말씀은 제 할아버지한테 들으신 얘기라고 하셨어요. 우리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아버님 말씀대로 제가 그것을 샀고, 제가 다시 찾아온 것이군요. 그래서 당신께서는 제가 올 것을 알고 계셨고요.”
“그런 셈이지요. 전 이제 당신께 말씀을 전했으니 아버님의 유언을 지킨 셈이에요.”
“혹시 아버님께선 카톨릭 신자셨나요?”
“예, 아버님은 카톨릭 신자셨지만 교회에 나가시지 않으셨어요. 항상 기도만 하셨지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이 십자가 뒷면에 새겨진 ‘M’이 무슨 뜻인가요?”
“제 아버님 이름이지요.
“아버님 성함이......”
“마르하르입니다.”
난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내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서며 남자의 손을 잡았다.
“몸도 불편하신데 제가 너무 오랫동안 실례를 했군요. 말씀 감사했습니다. 똑똑한 아드님을 두셨더군요.”
“예. 감사합니다. 전 좀 쉬어야겠습니다.”
난 그의 집을 나오며 따라 나온 소년에게 물었다.
“오즈라고 했지? 아버님 약은 드셨니?”
“약이 떨어져서 또 사러가야 돼요.”
난 지갑에서 100리라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오즈에게 주었다.
“아빠 약 사드려.”
소년은 양손을 뒤로 돌린 채 고개를 저었다.
남의 돈을 대가 없이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서 받아. 그리고 아빠 잘 보살펴 드려야 한다.”
그제야 소년은 지폐를 받았다.
난 소년의 집을 나와 골목길을 걸었다.
그때까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소년은 아직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나에게 소년은 미소를 보냈다.
골목길을 나온 나는 한동안 비를 맞으며 걸었다.
알지 못하는 운명이, 이미 성큼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제 시네마시 광장을 순식간에 덮쳤던 빗줄기는 세력을 잃고, 가는 비가 되어 내 머리를 적시고 있었다.
비가 그치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았지만, 난 차를 탈 수 없었다. 차를 타면 멀미를 할 것 같았고, 그렇게 걸어서 게스트하우스까지 가야 했다.
무언가가 들어와 갑자기 헤집어 놓았던 머릿속이 차가운 빗줄기로 인해 차츰 제자리를 잡아가고, 하나씩 흩어졌던 생각의 조각들이 다시 모여 모자이크처럼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저질 공포영화에서나 쓰였을 계시록의 구절들이 내 앞에 현실이 되어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은 요한이 아닌 마르하르의 이름으로 예언이 되어, 내게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래, 가보자. 비밀의 끝이 어딘지 보고야 말겠어.’
프런트 데스크에 앉아있던 아일린은 비를 흠뻑 맞은 채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곤, 얼른 수건을 꺼내 달려와 젖은 머리를 닦아 주었다.
“애들도 아니고, 우산도 없이 어딜 그렇게 쏘다녀요?”
“응, 좀……. 그럴 일이 있었어.”
“그래도 그렇지, 날씨도 찬데.”
“올라가 씻고 있을게, 일 끝나면 내방으로 좀 올라와. 할 얘기가 있어.”
“일단 샤워부터 하시고, 좀 쉬고 계세요. 올라갈게요. “
방으로 올라온 나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따갑게 내리꽂히던 물줄기는 차츰, 얼어붙었던 내 몸을 기분 좋게 감싸며 흘러내렸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잠시 눈을 붙였다.
‘똑, 똑.’
노크 소리에 눈을 떠 방문을 열었다.
일을 맞힌 아일린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남자를 만났어.”
“그 남자라면......”
“응, 어제 앙크 십자가를 팔았던 남자.”
그리고 난 그녀에게 오늘 일어났던 일을 소상히 얘기했다.
“정말 이상하군요.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에요.”
난 입을 담은 채 그녀의 깁고 푸른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군요.”
그리고 말했다.
“안타키야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안타키야요?”
“그래, 그곳은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세운 최초의 교회가 있는 안디옥이야. 제레미아는 유서에서, 사탄이 세운 교회에 악마의 표식이 있다고 했어. 제레미야가 죽고 최초로 세워진 교회를 확인해 보고 싶어.”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예수를 죽인 사탄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건 모르지만, 그들은 예수의 경고를 무시하고 최초의 교회를 그곳, 안디옥에 세웠어. 그걸 확인하고 싶은 거야.”
“저와 함께 가고 싶으신 거죠?”
“그래, 네가 있으면 용기가 생길 것 같아.”
그날 밤 아일린은 그녀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눴다.
“엄마는 그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2층 남자 말이구나.”
그녀의 어머니 ‘니다’는 나이가 60을 넘겼지만 사려 깊고 진지한 여자였다.
‘니다’는 딸이 말하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언젠가는 그녀의 딸이 그 남자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물어올 것 이란 걸 짐작하고 있었다.
“알고 계셨군요. 전 그 남자의 진지함이 좋아요. 그는 자기 앞에 일어나는 사소한 일도 진지하게 생각해요. 그리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줄 알지요. 그가 판단을 내릴 땐 언제나 제게 동의를 구해요. 처음 그 사람과 제레미아 교회에 갔을 때, 그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려진 교회에서 감추어졌던 사실들을 찾아냈어요. 그리고 그는 내일 안타키야에 가려고 해요. 그와 함께 가고 싶어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딸의 말을 들은 니다는 말했다.
“네 아버지가 반정부 활동에 참가하겠다고 했을 때 난 막지 않았다. 그는 죽었지만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을 했어. 그로 인해 난, 평생을 과부로 살았지만 한 번도 네 아버지를 원망해 본 적이 없다.”
니다는 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건 네가 판단할 너의 일이야. 난 너를 믿는단다.”
아일린은 두 팔을 벌려 그녀의 어머니를 안았다.
안타키야는 안탈리아 남동쪽으로 700킬로쯤 떨어진 지중해 연안의 작은 도시다.
옛날엔 수리아 안디옥으로도 불렸다.
하타이 공항을 빠져나온 우리는 돌무쉬(터키식 합승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실라이 5번가에 위치한 리완(Liwan) 호텔에 여정을 풀었다.
우리는 시내로 나와 안타키야 고고학 박물관을 관람했다.
라임스톤으로 지어진, 이 박물관은 작고 초라해 보였지만 역사적 가치가 충분한 콘텐츠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주로 비쟌틴 로마시대의 모자이크 벽화들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는 제레미아 교회의 정면 부조와 너무 닮았다.
역시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의 모습을 새기고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우리는 시내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통닭 한 마리에, 가지 케밥과 에페스 맥주 두병. 에크멕(터키 빵)과 샐러드는 언제나 따라 나온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안타키야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날 밤 우리는 처음으로 한 침대에 누웠다.
아일린은 똑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지루한 침묵 뒤에 내가 말문을 열었다.
“무슨 생각해?”
“오래전 대학 다닐 때 남자 친구가 있었어요.
그는 터키 남자였고 부잣집 아들이었지요.
밝고 유쾌한 남자였어요. 그의 주변엔 언제나 많은 친구들이 따라다녔지요. 사귄 지 6개월쯤 됐을 때 우린 한자리에 누웠어요.
그는 거친 남자였어요.”
“왜 헤어졌어?”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내게 청혼했고, 회교도였던 그는 내게 개종을 요구했어요. 잠시의 공백기 후에 그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나는 당신이 나에게 부와 사랑을 줄 거란 걸 알아요. 하지만 전, 당신의 내면세계엔 함께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어요.”
"그리고 결별했어요. 그 후 시간이 많이 흘렀지요. 그리고 당신을 만났어요.
전 당신을 저의 내면세계에 초대하고 싶어요.”
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녀는 나의 지난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난 말없이 그녀를 당겨 가슴으로 안았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