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에 아일린은 사진을 들고 그녀가 다니는 성당으로 갔다.
어느새 그녀는 나의 모험에 동참하고 있었다.
미사가 없는 날에도 교회는 항상 열려있었다.
그녀는 본당에 들어서며 성수를 손끝에 묻혀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뒷줄 좌석에 앉아 잠시 묵상한 그녀는 본당과 연결된 통로를 따라 고해 성소로 갔다.
이미 사람들이 줄지어, 고백성사를 드리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아일린은 컨페션 룸의 문을 열고 들어가 커튼 뒤의 신부님과 마주 앉았다.
"주를 찬미 하나이다. 사소한 죄의 고통이 항상 제 어깨를 무겁게 합니다. 이교도의 땅에서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주를 의심합니다. “
짧은 고백 속에서, 아일린은 지난밤에 있었던 그녀의 경험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목소리만으로 그녀가 아일린이라는 것을 아는 '안드레아' 신부는,
"성령께서 늘 그대와 함께 할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 주님의 말을 들어 보세요.
당신의 고백으로 주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십니다."
아일린은 짧은 고백성사를 끝내고 나오며 신부님께 말했다.
"감사합니다. 컨페션(카톨릭의 고백성사)이 끝나시면 사제 실에서 잠시 뵙고 싶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잠시 후 고백성사를 마친 아일린은 사제 실에서 안드레아 신부와 마주 앉았다.
"아일린, 오랜만이군. 그래, 어머니는 건강하신가?"
"예, 나이에 비해, 항상 기운이 넘치시지요."
안드레아 신부는 그녀가 어릴 적 카톨릭 교리 선생님이었고, 아일린의 게스트하우스가 문을 열던 날, 그곳을 방문해 축복 식을 해 주기도 했었다.
아일린은 가져간 사진을 신부님께 보여드렸다.
"이 묘비에 새겨진 글자들의 뜻을 알고 싶어요."
"요즘도 역사학에 매달려 있나? 네가 이태리나 독일에서 태어났다면, 너는 훌륭한 역사학자가 되었을 거야."
덕담을 하며 안드레아 신부는 돋보기를 꺼내 쓰고 사진의 글자들을 들여다봤다.
"'마르하르'의 라피다(묘비)로군."
한눈에 그것이 제레미아 교회의 지하 묘역에서 찍은 사진임을 알아본 안드레아 신부는,
"정부가 막아놓은 곳에 들어갔었군. 하여간 네 호기심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하하……. 나도 오래전에 그곳에 몰래 들어갔었지. 그곳은 나 같은 신부들이 죽으면 묻히는 장소야."
그는 별게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제레미야 교회는 이단 교회야.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도 그 교회를 사용하지 않지. 나도 호기심에 그곳에 들어가 봤고 거기서 '마르하르'의 묘비에 새겨진 글자를 읽었지. 워낙 고대어라 나도 읽는데 애먹었어. 덕분에 내 콥트어 실력도 늘었지."
그는 일어나서 캐비닛 속에 보관해 놓았던 마르하르 묘비의 해석본을 꺼내 아일린에게 보여 주었다.
"모든 이단 교회들이 그렇듯이 신비감을 주려는 의도에 불과해."
안드레아 신부가 넘겨준 그 해석본을 읽어 내려가면서, 잠시 아일린의 눈 끝이 긴장했다.
"한 장 복사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물론이지"
해석본을 집어 복사기 쪽으로 가면서 안드레아 신부는 말을 이었다.
"그게 언제더라? 네가 꼬마였을 때야. 네가 나에게 바닷가에서 주은 돌멩이 하나를 가져다 보여주었어.
그리고 그게 예수의 얼굴같이 생겼다는 거야. 그래서 그건 중요한 것이니, 내게 성물 축도를 해달라고 했지.
난 너의 상상력을 짓밟고 싶지 않아 신부가 된 후 처음으로 돌멩이에다 대고 성호를 그었어."
"헤, 헤……. 저도 기억나요. 전 신부님께 항상 골치 아픈 소녀였지요."
"그렇지 않아. 넌 하찮은 돌멩이 속에서도 예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아이였단다."
안드레아 신부로부터 묘비의 해석본을 넘겨받은 아일린은 성당을 나오자마자 바로 내게 문자를 보냈다.
'해석했어요. 어젯밤 만났던 카페에서 기다릴게요.
난 지체 없이 그 카페로 갔다.
이일린은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테이블 위에 종이 한 장을 올려놓았다.
"안드레아 신부님이 해석하신 거예요. 신부님은 이 묘비를 알고 계셨어요. 이교도의 묘비라 하시더군요."
아일린은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글자를 하나씩 짚으며 해석본을 읽어 내려갔다.
"-마르하르의 묘-"
"말씀을 어기고 교회를 세우니 주께서 분노하시니라.
여섯 사탄이 내게 들어와 나의 눈을 멀게 하였으니,
죽은 나의 영혼이 주께로 가지 못함이로다.
허물이 없는 자가 여인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열고,
메기나(아마겟돈의 고어)에서 사탄의 열두 성을 허물 것이니, 주께서 하늘 문을 열고 내려오시매,
그의 손을 잡아 이끌 것이다."
설명을 마친 그녀의 깊고 푸른 눈동자는 내 눈을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비밀이란 게 뭘까?"
"비밀은 그곳에 있어요."
"그렇다면 그 비밀을 찾아야지."
나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입술 끝을 올리며 벌써부터 긴장하고 있었다.
"오늘 밤 열두 시에 출발할 거야. 같은 장소에서 만나지."
방으로 돌아왔을 때 사니는 이스탄불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일 새벽 4시 비행기를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아일린이 준 종이를 보여주며 또 한 번 그를 설득시켜야 했다.
"아일린이 그 묘비에 새겨져 있던 글자들을 해석해냈는데, 그 교회에 무슨 비밀이 있는 것 같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니는 볼멘소리로,
"너, 또 그 교회에 가자는 거라면, 아서라. 난 이스탄불로 간다. 정 가고 싶으면 아일린하고 같이 가. “
난 오늘 밤 계획에 사니가 필요했다. 그래도 덩치 큰 놈이 함께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사니, 내 말 들어봐, 꼭 가봐야 해. 네가 필요해. 넌 내 친구잖아? 마지막이다. 12시에 출발할 건데 일찍 끝나고 돌아오면 비행기 탈 수 있을지도 몰라."
"하필이면 왜 오밤중에만 가자는 거야? 그것도 공동묘지에."
"정부에서 출입 금지시킨 곳이잖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어. 딱 한번 만이다. 제발……."
그렇게 한참을 설득시켜서야 사니의 협조를 받아낼 수 있었다.
그날 밤 열두 시에, 아일린이 운전하는 빨간색 폭스바겐은 달빛을 받으며 안탈리아의 해변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언덕 밑 후미진 곳에 차를 세우고, 곧바로 세다르 숲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 교회로 갔다.
검은 구름 사이로 달빛이 비치고 있는 교회 앞에 도착했을 때 인기척이 들렸다.
누군가 교회 앞 세미나 건물에서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몸을 낮췄다.
"관리인 같아요."
아일린이 속삭이듯 말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관리인은 세미나실 문을 걸어 잠그고, 옆에 세워진 오토바이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우리는 그가 굉음을 울리며 교회 앞 언덕길을 따라 내려갈 때까지 숨죽인 채로 그대로 있어야 했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서야 우리는 교회로 다가갈 수 있었다.
교회로 들어온 우리는 다시 그 문 앞에 섰다.
세 개의 봉인을 다시 풀고, 어둠 속으로 난 계단을 따라 붉은색 손전등을 비추며 곧장 마르하르의 묘비 앞으로 갔다.
난 먼저, 묘판에 새겨진 앙크 문양의 십자가 화살표에 손전등의 초점을 맞췄다.
아일린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뭐죠?"
"크룩스 안사타, 앙크라고도 하지. 기원전 고대 이집트 벽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양이야. 교회의 십자가와는 달리 여성을 상징하지. 그런데 지난번 처음 이 문양을 봤을 때부터, 자꾸 이 십자가 밑의 화살표가 눈에 걸렸어"
처음부터 내 궁금증의 출발이 이 문양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난 아일린에게도 이 문양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확실치 않은 나의 생각이 그녀에게 혼동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지금 보니, 저도 이상하군요. 제가 봤던 앙크는 밑에 화살표가 없었던 것 같아요."
"비밀의 방향을 따라가 볼까?
우리는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화살표의 방향은 지하 묘역으로 내려온 계단 밑에서 부딪쳤고, 그 계단 위의 환기구를 향하고 있었다.
지하 환기구 밖으로,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고 있는 스산한 교회 공동묘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올라가 볼까?"
다시 계단을 올라와 지하실 문에 봉인을 채우고 교회 밖, 묘역으로 갔다. 수많은 성직자들의 무덤들 속에서, 나는 지하 환기구를 통해, 화살표의 방향으로 짐작된 지점에서 멈추고, 그곳에 세워져 있는 묘비들을 살펴나갔다.
아일린이 내 곁에 바짝 붙어서 묘비에 적힌 이름들을 읽어 주었고, 사니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화살표의 방향엔 모두 16개의 묘지가 있었는데, 특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묘역에서 조금 떨어진 화살표 방향에, 우리가 찾던 것이 있었다.
"갈릴리의 아들 '제레미아"
아일린이 묘판에 새겨진 이름을 읽어주었다.
"여기가 이스라엘 사람 '제레미아'의 무덤이군."
묘지는 퇴화되고 훼손되어 관을 덮은 석판이 반쯤 드러나 있었다.
사니와 나는 석판 위의 흙을 거둬내고 가지고 온 크로우 바를 이용해 석관의 뚜껑을 열었다.
관은 비어 있었다.
"젠장. 아무것도 없군."
"도굴된 것 같아요."
허무했다. 무언가 나올 것 같았는데. 여기까지는 맞았는데…….
그렇게 실망하고 관 뚜껑을 다시 덮으려 할 때, 구름에 가렸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비어있는 석관의 바닥에서 나는, 희미해진 앙크 문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잠깐! 이거 봐. 그 십자가야."
아일린이 꺼놓고 있던 손전등을 다시 비추자, 붉은빛을 받은 십자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도 있었군요. 마르하르가 죽기 전에 새겨 놓았을 거예요."
아일린이 들고 있는 손전등이 떨리고 있었다.
거기에 새겨진 앙크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고,
내가 다시 그 석관의 뚜껑을 덮으려 할 때,
"잠깐"
난 사니의 외침에 뚜껑을 닫으려던 손길을 멈췄다. 그는 가져온 노트를 한 장 떼어, "Thank you!"라고 써서 석관 속에 집어넣었다.
아일린과 나, 그리고 사니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십자가의 방향을 따라 몇 발자국 건너에 바윗돌이 하나 있었고, 그 뒤로 세다르 숲이 이어지고 있었다.
먼저 간 건 아일린이었고, 그 바위에 손전등을 비추며 그녀가 외쳤다.
"여기에도 십자가가 있어요."
사니와 나는 그곳으로 뛰어가 바위에 새겨진 십자가를 살폈다. 십자가는 똑바로 서 있었고, 십자가 밑에 달린 화살표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바윗돌을 밀어 올려 보려고 했지만 바위는 꿈쩍도 안 했다. 아일린과 사니가 힘을 합쳐서야 간신히 바위를 밀어낼 수 있었다.
"파보자."
난 사니와 함께 죽어라고 그곳을 팠다. 이 천년을 덮고 있던 바닥은 단단했다. 난 크로우바를 들고 곡괭이질을 했고, 사니는 파헤쳐진 흙을 거궈냈다.
이마에서 땀이 흘렀고 땀에 옷이 젖었다.
'퉁'
반시간쯤 파내려 갔을까, 내려 찍히던 크로우바가 둔탁한 소리를 냈다. 밑에 비어있는 공간이 있다는 걸 알리는 신호였다.
"그래, 뭔가가 있는 거야"
갑자기 힘이 솟았고, 땅바닥을 내려찍는 나의 손길이 빨라졌다.
그리고 그 밑엔 작은 석함이, 이 천년의 세월 동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셋의 눈길이 마주쳤다. 지체 없이 뚜껑을 들어 올렸고, 드디어 그 안에 퇴색된 종이 뭉치가, 아일린이 비추는 손전등의 불빛에 모습을 드러냈다.
"찾았어, 이거였어!"
내 호기심이 빚어낸 상상력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버젓이 나타난 순간 이었다.
한동안 내 눈은 이제 일그러져 가기 시작하는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달빛 속에서 마르하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재빨리 그 종이 뭉치를 배낭 속에 집어넣고 석함의 뚜껑을 다시 닫았다.
그리고 석함의 뚜껑을 덮고, 파낸 흙을 다시 덮어 주변을 정리했다.
손목에 찬 시계가 4시를 지나고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가 뒷좌석에 앉은 사니를 보고 말했다.
"Thank you?"
우리 셋은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웃었고, 그 웃음은, 우리의 작은 상상력이 결실을 맺은 행복감에서 터져 나온 승리의 외침 이었다.
게스트 하우스에 돌아왔을 때 아일린은 나와 사니의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피곤하실 테니 올라가 주무세요. 아침에 봐요."
스쳐가는 그녀의 머릿결에서 샤프론(사막에서 피는 꽃) 향기가 났다.
방으로 들어오자 난 무의식적으로 방문을 걸어 잠갔다. 비행기 시간을 놓쳤지만 사니는 불평하지 않았다.
"자. 소원을 풀었는데, 도둑질한 기분이 어때?"
사니는 결과에 만족했지만 뭔가 석연찮은 느낌을 갖고 있었다.
"회교국가에서 도둑질하다 걸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잖아. 사우디에선 손목을 자른다고. 난 그 물건에 관심이 없어. 난 아침에 공항으로 갈 거야. 이스탄불엔 하루만 있다가 고향으로 갈 거야. 알아서 하겠지만 혹여 라도 그 물건 갖고 비행기 탈 생각은 않는 게 좋아. 공항에서 걸릴 수 있어. 혹시 걸리더라도 내 이름은 대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웠고, 난 그 종이 뭉치를 꺼내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종이를 묶은 끈을 풀었고, 종이는 9장이었다. 오랜 세월에 누렇게 변색되고 훼손되었지만 생각보다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파피루스야. 여기에 무슨 비밀이 쓰여 있는 걸까?"
몸은 피곤했지만 좀처럼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나는 세다르 숲 속을 걷고 있었다. 길모퉁이에 한 터키 남자가 울고 있었다. 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나요?"
내가 묻자, 터키 남자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울고 있었고, 감고 있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가 얼굴을 들었을 때 터키 남자의 얼굴이 사니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너 왜 여기서 울고 있니? 왜 그래?"
그의 얼굴이 다시 터키 남자로 변했다. 그는 대답 없이 그의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를 풀어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내 손바닥 위엔 앙크 문양의 십자가가 놓여 있었다.
"야. 일어나 아침 먹자."
사니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테이블 위엔 아일린이 가져다 놓은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사니는 떠날 준비를 끝내 놓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난 일어나서 어제 낮에 준비해 놓은 작은 봉투를 가방에서 꺼내 그에게 주었다.
" 전자 담배야. 담배 끊기 어려우면 이걸로 대신해봐.
담배보다 낫다고들 하더라. 그동안 고마웠다."
사니는 씩 웃으며 봉투를 받아 넣었다.
"고맙다. 세부에 오면 연락해라. 그리고 노파심에 하는 얘긴데, 그 물건 조심해라."
공항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제의를 뿌리치고 아일린과 작별인사를 나눈 사니는 그렇게 떠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