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니는 일찌감치 시내 구경을 한다고 밖으로 나갔고,
난 침대에 혼자 누워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그 계단을 막아놓은 지하실 문이 눈에 아른거렸다.
저녁 시간이 되었을 때 난 아일린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일린? 여기 코리아노 정.(아일린은 나를 코리아노 정이라 부른다) 저녁 먹으러 갈까? “
곧 답장이 왔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길 건너 모퉁이에서 만나요.’
아마도 엄마에게 눈치가 보였을 게다.
그날 저녁, 아일린과 나는 안탈리아 시내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리필 되는 빵과 야채와 함께 치킨 스테이크를 시켰고, 난 에페스 맥주 한 병을 곁들였다.
아일린의 가족은 터키인이 아닌 쿠르드족 이민자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려서 부모를 따라 시리아에서 터키로 이민을 왔고, 후에 터키 여자와 결혼하여 아일린을 나았다.
터키 반정부 단체의 일원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아일린이 4살 되던 해 정부군의 진압작전으로 목숨을 잃었고, 젊어서 과부가 된 아일린의 어머니는 살던 집을 개조해서 지금의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딸을 키웠다.
쿠르드족 아버지의 영향으로 동방정교회 소속의 카톨릭 신자였던 아일린은 대학에 진학해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그녀는 원래 기독교 신학을 전공하고 싶었으나 회교국가인 터키의 대학엔 기독교 신학을 가르치는 대학은 없었다. 그래서 아일린은 역사학과를 택했고, 특히 중동 고대사에 관심이 많았다. 졸업 후 얼마 동안 역사 교사로 근무했지만, 아이들에게 카톨릭 신앙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직장을 잃었고, 지금은 어머니와 함께 게스트하우스 운영을 돕고 있다고 했다.
난 대화를 통해 그녀 안에 내재되어 있는 적극성과
진지함에 다가갈 수 있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나와 잠시 거리를 걸었다.
안탈리아의 밤거리는 흡사 이태리의 시골 거리를 연상시킨다.
도로는 현무암을 깎아 만든 직사각형의 보도블록으로 장식 되어 있었고, 주변은 남유럽풍의 낮은 건물들이 도로를 따라 잘 정비되어 있었다.
붐비지 않는 거리는 한적했고, 늘어선 상점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주광 색 불빛들이, 이 한가한 밤거리에 낭만적인 조명 효과를 보태주고 있었다.
언덕길을 따라 올라, 오렌지 나무 옆 벤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난 아일린에게, 그 교회를 다녀온 후 줄곧 떠나지 않는 나의 호기심에 관해 털어놓았다.
“아일린, 난 제레미아 교회의 지하실이 궁금해. 거기에 뭐가 있는지, 왜 관리인은 폐허가 된 교회의 지하 계단을 막아 놓았는지. 그리고 지하 묘역은 얼마나 큰지,
건축가 마르하르의 무덤은 어떻게 생겼는지…….
그 교회에 다녀온 후로 하루 종일 그 계단 생각만 했어.”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대학 시절에 몇 번 그 교회에 가볼 때마다 저도 같은 호기심을 갖고 있었지요. 하지만 막상 그 닫혀진 문 앞에 섰을 땐 감히 들어가겠다는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그 후로 전 가끔, 제가 그 닫혀진 문을 여는 악몽을 꿔요.”
아일린은 계속 말을 이었다.
“꿈속에서 제가 그 문을 열었을 때, 어둠 속에 마르하르가 서 있었어요. 그의 몸은 죽어 있었지만, 그의 눈은 살아 있었지요. 너무나 무서워 소리를 지를 때, ‘아일린’하고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고, 전 악몽에서 깨어나지요.”
아일린은 그녀가 어렸을 때 죽은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항상 다정했던 아버지의 목소리만은 기억할 수 있다고도 했다.
“이대로 여길 떠나면 나도 같은 악몽을 꿀 거야. 안탈리아를 떠나기 전 그 계단을 내려가 보겠어.”
난 그녀의 깊고 푸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녀의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정말 그곳에 가보고 싶으세요?”
나는 그녀에게 정식으로 제안했다.
“우리 아무도 모르게 그곳에 가서 마르하르를 만나볼까?”
아일린은 대답 대신 비장한 미소로 내 제안에 동의해 주었다.
-마르하르와의 만남-
다음날 나는 철물점에 들려 간단한 도구를 샀다. 닫힌 문을 열 수 있는 공구, 어둠 속을 비출 수 있는 손전등…….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이스탄불로 돌아가겠다는 사니를 설득시키는데 애를 먹어야 했다.
그는 그 교회에 더 이상의 관심도 없었고, 오직 이스탄불의 흥청거리는 밤거리에만 관심이 있었다.
어렵게 사니를 설득했고 그는 나의 모험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게스트하우스가 문을 닫을 즈음, 난 이일린에게 문자를 보냈다.
‘새벽 2시에 출발할 거야. 사니도 함께 갈 거야. 길 건너편 모퉁이에서 만나.’
사니와 난 낮에 사놓았던 도구들과 카메라를 챙겨 아일린과의 약속 장소로 갔다. 그녀는 먼저 나와, 차에 시동을 걸어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폭스바겐 비틀은 해안도로를 따라 목적지를 향해 달렸고, 우리는 교회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세나르 숲을 따라 난 작은 오르막길을 걸어 교회로 갔다.
어둠 속의 교회는 언덕 위에서 달빛을 받으며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체 없이 교회 안으로 스며들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붉은색 필터가 장착된 손전등을
켰다.
흐릿한 붉은빛에 초점이 잡힌 대리석 열주 사이로 마리아와 예수의 벽면 부조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조심스레 오른쪽 아일(Aisle)을 따라 단상 뒤의 그, 지하계단 문 앞에 섰다.
그 육중한 계단 문이,
“들어오지 마.”라는 경고를 보내는 것 같았다.
“꿀꺽”
사니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난 손전등을 비춰 문짝의 주변을 살폈고,
문짝은 커다란 3개의 못으로 프레임에 고정되어 있었다. 눈치가 빠른 사니가 배낭에서 크로우바( Crowbar-못 뽑는 공구)를 꺼내 내게 건넸고, 난 그 세 개의 봉인을 풀었다.
그리고 문짝을 잡아당겨 밖으로 열자, 어둠 속에 바닥이 보이지 않는, 아래로 길게 뻗은 석조 계단이 눈앞에 펼쳐진다.
심호흡을 한 후, 난 앞장서 계단을 한발, 한발 걸어 내려갔다. 겁에 질린 아일린이 내 뒤를 따랐고, 그 뒤를 사니가 따랐다. 나는 본능적으로 계단의 숫자를 속으로 세었다.
‘하나, 둘, 셋......’
열두 번째 계단에서 계단참이 있었고, 같은 방향으로 다시 9개의 계단이 이어져 내려갔다.
대충 지하 묘역의 층고는 4미터가 넘는 듯했다.
마침내 지하실 바닥을 밟는 순간,
“끼이익, 쿵!” 하는 굉음이 적막을 갈랐다.
우리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손전등을 껐다.
더 이상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계단 문짝이 닫히는 소리였어.’
깜박 잊고 열어놓은 문짝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닫히는 소리였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난 아일린을 안심시켰다.
“알아요, 문짝이 바람에 닫히는 소리예요.”
아일린은 나보다 사태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 같았다.
나는 덜덜 떠는 사니에게 말했다.
“겁나면 올라가서 기다려. 곧 나갈게.”
“아, 괜찮아......”
여자 앞이라서 그런지 사니는 억지로 용기를 내어 보였다.
손전등을 다시 켰다.
붉은 불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건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묘지들이었다. 돌로 된 묘판마다 라피다(Lapida: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카메라 줘봐.”
난 사니가 건네주는 카메라를 받아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어둠 속의 무덤들이 흰색으로 발광했다. 앞줄부터 각각의 묘지들을 찍어나갔다. 라피다 위에 새겨진 글자들은 고대 문자 같아 보였다.
“콥트 문자예요”
라피다를 들여다보고 있는 나에게 눈치 빠른 아일린이 말했다.
“어떻게 알지?”
“제가 다녔던 성당에 콥트 성경이 있어요.”
아일린은 터키 동방 정교회 소속이었다.
모두 14개의 묘지가 지하 묘역에 있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넓지 않은 지하 묘역이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이후로는 교회 밖의 공동묘지에, 이곳에서 죽은 성직자들을 안장해 왔을 것이다.
마지막 맨 뒤쪽 중앙부에 위치한 묘지는 유독 다른 것들보다 컸고, 묘지를 덮고 있는 석판 위에는 각종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마르하르예요!”
아일린이 낮은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그녀의 눈은 라피다를 응시하고 있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꿈속에서 보았던 마르하르의 묘지 앞에 자신이 서 있다는 현실에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콥트어 성경에 익숙했던 그녀는 라피다에 새겨진 마르하르의 이름을 읽어낼 수 있었다.
“마르하르를 만난 거야.”
난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석판 위의 문양들을 살피던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음각으로 새겨진 수많은 고대 문양들 속에,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기원전 고대 이집트 벽화에서나 볼 수 있는 ‘앙크’ 그러니까, 크룩스 안사타 라는 십자가 모양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왜 카톨릭과 아무 관계가 없는, 고대 이집트, 그것도 기원전 이집트인들의 문양이 카톨릭 사제의 묘판에 새겨져 있을까?
더욱 이상한 건 십자가 아랫부분이 화살표로 되어 있었고, 그 앙크 모양의 화살표는 우리가 들어왔던 계단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난 순간적으로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눈길이 멈춘 곳엔 지하실 벽의 환기구가 있었고, 환기구를 통해 교회 옆 공동묘지의 음산한 모습이 어렴풋이 달빛을 타고 들어오고 있었다.
끝없는 궁금증이 밀려왔지만 그것들을 기억 속에 담아둔 채, 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서둘러 촬영을 마치고 우리는 지하 묘역을 빠져나왔다. 계단을 오르는 우리에게 마르하르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가지 마, 제발. 이천 년을 기다렸는데…….”
나는 계단 문에 다시 못질을 했고, 우리는 교회를 빠져나와 언덕길을 내려왔다. 빨간색 폭스바겐 비틀 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일린이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 무덤 위의 라피다에서 마르하르의 이름을 읽었을 땐 심장이 멎는 듯 했어요.”
“나도 그 이름을 들었을 땐 겁이 나더군.”
“야, 다시는 그런데 가자고 하지 마라.”
사니의 한마디에 우리는 큰소리로 웃었다.
어느덧 동이 트고 있었다.
사니는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나가떨어졌다.
몰려오는 피로감에 눈을 감았지만,
내 눈엔 앙크 문양의 화살표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아침 10시에 눈을 떴다.
언제나 그렇듯, 발코니창 너머의 바다는 지중해 주변국들의 오랜 역사를 품은 채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여니, 아일린의 문자가, 내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어나시면 내려오세요. 주무시는 것 같아 이침 식사는 안 갖다 드렸어요. 빵과 커피가 남아있으니 내려오셔서 드세요.'
곤히 자고 있는 사니를 남겨둔 채 카메라를 들고 아래층 주방으로 내려갔다.
아일린이 커피를 데워 에크멕(터키 식빵)과 함께 내놓는다. 난 식사를 하며 아일린에게 말했다.
"잠도 못 잦겠군."
"잠시 눈을 붙였어요. 피곤하긴 하지만 어젯밤 경험은 정말 근사했어요."
난, 가지고 내려온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열어, 지난밤 교회 지하 묘역에서 찍은 사진들을 아일린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 묘비에 새겨진 글자, 읽을 수 있겠어?"
그것은 어젯밤 지하실에서 찍은 마르하르의 묘비 사진이었다.
"아니요, 마르하르의 이름은 읽을 수 있겠는데, 나머지 글자들은 워낙 오래된 고어들이라 무슨 뜻인지 저도 모르겠어요."
한참을 들여다보던 아일린이 말을 이었다.
"사진을 줘 보세요. 제가 다니는 성당 신부님께 보여드려 볼게요. 신부님은 콥트어 성경에 익숙하시니까 아마 알아보실 지도 몰라요."
난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을 다운받아 인쇄하여 그녀에게 주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