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착하고 가여운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보며 하늘도 무심하시다는 말을 하곤 한다.
수영 역시 그 말에 동조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신이 있다면 태어날 때부터 축복받지 못했던 자신들이 이렇게까지 고통받을 수 있나 싶었으니까. 더욱이 자신의 언니는 말이다.
「네가 간절히 바라던 그 소원, 내가 들어준 것이다.
가엾고 가엾은 아이야, 이곳에서는 부디 너의 언니를 지키며 너 또한 행복할 수 있기를.」
“헉!”
눈을 번쩍 떴다.
‘꿈, 이야?’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선명히 울리던 목소리는 기억에 또렷이 남았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옆에 바짝 붙어서 자신의 안부를 물어오는 할머니. 그녀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엘리자베스 폐하.’
그녀는 분명 자신을 보며 그렇게 불렀다.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이름이라서 귀에 익은 것 같기도 한데, 이상하게도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폐하, 아직 몽롱하십니까? 여전히 제가 누군지 모르시겠습니까?”
“폐하께서 정말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시는 겐가?”
“예. 분명 제게 누구냐고 여쭈셨습니다.”
“폐하, 이 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수영은 의사에게서 시선을 옮겨 할머니를 보았다.
맹세하건대, 생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다. 제 기억력은 자부할 만큼 좋았기도 했지만, 이런 환경에서, 제게 이런 호칭을 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때 문득.
‘이곳에는 부디.’
머릿속에 울리던 목소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곳은, 어딥니까?”
침묵을 유지하던 수영의 입에서 나온 물음에 두 사람의 얼굴엔 똑같은 그늘이 드리웠다.
“이곳은 마티아스. 폐하께서 다스리시는 국가입니다.”
마티아스. 마티아스.
잠깐만, 마티아스라고?
수영은 의사가 말해준 국가 명을 되뇌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을 받았다.
‘마티아스라니. 말이 안 되잖아. 마티아스는 언니가 쓴 소설 속에 나오는 나라 이름이란 말이야.’
마티아스. 이안 대륙의 패권을 다투고 있는 두 나라 중 하나인 곳이다.
그리고 그곳은 황제가 즉위한 지 3년 된.
“엘리자베스 울프.”
“예, 폐하의 존함은 기억하고 계시네요. 다행입니다.”
그렇다. 선황제의 유일무이한 자식으로 황제가 될 자격을 갖춘 유일한 사람이 바로 엘리자베스 울프였다.
“말도 안 돼. 이건 말이…….”
안 된다. 확실히 말이 안 되는데.
수영은 손을 들었고 자기 뜻대로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보았다. 그리고 거울로 보았던 자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탐스럽게 찰랑거리는 흑발은 윤기가 흘렀다. 은색의 묘한 눈은 차갑게 보이기도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다영이 쓴 소설 속에 나왔던 엘리자베스에 대한 설명이다.
딱 들어맞았다.
말도 안 되지만, 자신이 맞닥뜨린 이 광경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진찰 해보았을 때 특별한 건 없었는데…….”
“너무 무리하셔서 그런 걸까요?”
수영이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두 남녀는 그녀와 조금 떨어져서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눴다.
“우선 안정을 취하면서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겠네. 본인 이름까지 기억 못 하시는 건 아니니까,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겠어.”
“알겠습니다.”
“마리아, 자네가 당분간 폐하의 곁에서 상태를 잘 살피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부르고.”
할머니의 이름은 마리아.
귀에 쏙 들어온 이름에 수영은 귀가 쫑긋거렸다.
‘마리아. 마티아스 황실 집사장.’
샌 머리칼을 단정하게 올려 묶어 망에 넣고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엘리자베스의 곁을 지키는 사람 중 가장 오래도록 그녀를 보아온 사람.
“이만 가보겠네.”
“네, 선생님.”
마리아는 의사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고 의사는 수영을 보며 예를 갖추곤 침실에서 물러갔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마리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던 수영의 입에서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이 나왔다.
“마리아…….”
“제 이름이 생각나신 겁니까?”
마리아가 눈을 번뜩이며 쏜살같이 달려왔다.
‘당신이 마리아라면, 이곳이 마티아스고 내가 엘리자베스라면 내 언니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머릿속에서 자신을 가엾다 여기던 목소리를 분명 언니를 지켜보라고 했다. 그렇다는 건 이 황성, 어쩌면 이 넓은 마티아스 어딘가에 자신의 언니가 있다는 말인데.
“폐하?”
‘언니는 누구지? 비서인 사라? 설마 재상인 페르난도나 황실 기사단장인 카를?’
제 모습이 이렇게 변한 와중에 언니의 모습이 그대로라는 것은 말이 안 됐다.
만일 그렇다면 단박에 눈에 띌 것이니, 자신이야 찾기 좋겠지만…….
“마리아.”
“예, 폐하.”
“지금 당장 황성에 있는 사람 모두를 불러 모아.”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언니가 이곳에 있다는 것 이외에 알려준 것이 없다는 건 내가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일 수도 있어.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일 가능성이 커.’
수영은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걷어버리고 침대를 벗어났다.
“폐하! 아직 이렇게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다고요!”
“내가 지금 안정을 취할!”
상황이 아닌데.
수영은 자신의 팔뚝을 양손으로 꽉 붙잡고 있는 마리아와 마주하면서 말문이 턱 막혔다.
흔들리는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래, 당신도 혼란스럽겠지. 한순간에 당신이 모시던 주군이 이상해졌으니까.’
그렇게 짧게나마 그녀를 이해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하는 게 우선이었다.
“마리아, 얼른.”
수영은 마리아의 손을 밀어내며 부탁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돌아서는 수영을 붙잡고 다시 침대로 데려갔다.
‘아니, 무슨 힘이 이렇게…!’
나이를 속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힘을 자랑하는 마리아는 기어이 수영을 다시 침대에 앉혔고 조금 전처럼 눕혀버렸다.
이불까지 깔끔하게 덮어주고 허리에 손을 척 얹은 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리며 마리아를 보자, 그녀가 말했다.
“절대 안정이에요, 절대 안! 정! 당분간 정사도 생각하지 마세요. 사라님과 페르난도님께는 제가 설명 드릴 테니까요.”
“아니, 마리아 내가 지금,”
“제 이름 기억해내셨으니까 금방 괜찮아지시겠지만, 아직은 안 돼요. 이번엔 폐하의 고집대로 해드리지 않을 거예요. 저번에도 그랬다가 연설에 못 나가실 뻔했던 건 기억하세요?”
그런 걸 기억할 리가.
애초에 그런 건 책에 적혀 있지도 않은 부분이었단 말이야.
수영은 입을 감쳐물었다.
“아침을. 아니, 벌써 점심이네. 점심을 가져올 테니까, 이렇게 누워 계세요. 움직이시면 안 돼요!”
마리아는 신신당부를 하며 침실에서 나갈 때까지 수영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시금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이 호화로운 침실에는 수영, 혼자만이 남았다.
고요함이 맴도는 침실. 수영은 눈치를 보다가 몸을 일으켜 침대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엘리자베스 울프. 엘리자베스. 마티아스의 황제, 엘리자베스 울프.”
몇 번을 입으로 되뇌어보는 그녀의 이름. 아니, 자신의 이름.
참 이질적이었다.
제 눈으로 보는 얼굴이, 제 뜻대로 움직이는 손이 이토록 이상한 날은 없었는데.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꾸몄어도 결국 나였으니까. 내 얼굴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정말 다른 사람이다.
믿을 수 없지만, 믿어야 하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라는 걸 수영은. 아니, 엘리자베스는 너무도 잘 알았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기회가 주어진 거야. 나한테 기회를 준 게 신이든 악마든 난 기회를 얻은 거야. 절대 놓치지 않겠어.”
엘리자베스는 이불에 주름을 만들며 주먹을 꽉 쥐었다.
***
“아, 미치겠네. 나 이제 괜찮다니까! 밖에라도 나가게 해달라고!”
휑한 침실에서 홀로 외치는 자신의 괜찮은 상태.
동굴인 듯 울리던 목소리마저 잦아들면 엘리자베스 입에서는 한숨이 튀어나왔다.
“젠장.”
더불어 욕지거리도.
“이건 황제가 아니라 완전 죄인 취급이잖아. 이게 투옥시킨 거랑 뭐가 달라?”
침실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한 것도 오늘로 벌써 사흘째다.
그동안 이 침실로 오가는 사람은 의사와 마리아뿐이었고 다른 이들은 마리아와 침실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문틈으로 얼핏 보았을 때 사라와 페르난도 그리고 카를도 있던 것 같았는데, 그때 누구든 한 명을 붙잡고 나가게 해달라고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이것들 이때다 싶어서 날 이렇게 가둬두려는 거 아냐? 날 걱정한다는 건 다 입바른 소리 아냐?”
결국, 이런 추측까지 하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엘리자베스는 혼자 씩씩대다가 별안간 눈을 번뜩이며 손뼉을 쳤다.
“카를은 늘 있을 거 아냐, 문 앞에.”
황실 기사단장이니까, 황실과 관련된 잡다한 일이 많은 집사장보다는 근처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씩 웃었다.
두리번대다가 옷걸이에 걸린 덧옷을 집어 들었고 금세 팔을 끼웠다.
덧옷이 매끄럽게 착 감겼다.
“비싼 게 제값을 하긴 해.”
엘리자베스는 새삼스럽게 감탄하며 덧옷을 만지작거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차린 엘리자베스는 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꽤 비장한 걸음걸이가 문 앞에서 멈췄고 엘리자베스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문을 두드렸다.
“예, 폐하.”
곧장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카를의 것이었다.
“카를, 나 바람 좀 쐬게 해줘.”
“하지만 마리아님께서…….”
“오늘로 사흘이야, 사흘. 내가 죄인이야?”
“그런 말씀 마십시오. 어떻게 폐하께서!”
“그러니까! 내 말이! 내가 죄인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가둬 놓는 거냐고!”
“그건 폐하께서 안정을…….”
“사흘이면 충분하거든? 다른 건 모르겠지만, 바람 좀 쐬자. 나 여기 계속 갇혀 있다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
엘리자베스는 문아 찰싹 달라붙어 말했다.
문 앞에서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던 카를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민했다.
‘절대 안 됩니다. 안정이 최우선이에요. 폐하께서는 좀 쉬셔야 합니다.’
마리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말처럼 이렇게 가둬 놓듯 침실에 있다고 해서 쉰다고 할 수 있는가.
그 시간도 사흘이라면 꽤 오래다.
“카를.”
“예?”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잠깐만 이 문 좀 열어봐. 긴히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문을요?”
“튀어나가려는 거 아냐. 그래 봤자 잡을 거잖아. 난 그렇게 힘 빼는 짓은 안 해.”
카를은 잠시 고민하다가 열쇠를 문고리에 꽂아 넣었고 돌려서 문을 열었다.
살짝 열린 문 틈. 그 사이로 보이는 엘리자베스는 이전 얼핏 보았을 때와 달리 혈색이 좋아 보였다.
“카를.”
“예, 폐하.”
“명령이야.”
“예?”
카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금 엘리자베스와 마주했고 엘리자베스는 처음 그를 부를 때와는 달리 아주 차갑고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보며 입을 뗐다.
“황제의 명을 거역할 셈은 아니지? 황실 기사단장이면 황제 직속인데, 누구보다 황제의 명을 잘 따라야 하는 사람인데, 그치?”
확인 차 덧붙이는 묻는 말엔 정해진 답이 있었다.
카를은 복도를 슬쩍 보았다. 업무 때문에 자리를 비운 마리아는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복도는 한산했다.
“카를 헌팅턴. 명령이야, 이 문 열어.”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번 그에게 명령했고 그는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당겨 아주 조금만 보였던 틈을 넓혔다.
시원스럽게 열린 문 너머에 서 있는 엘리자베스. 그 순간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과 옷을 휘날렸고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폐하……?’
그리고 그때 카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