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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녀가 자신의 어머니의 어릴 적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서서히 그 소녀 주변으로 풍경이 드리워졌다. 불에 타 무너져가는 저택, 오열하는 사람들, 그리고 불에 검게 타 죽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속에는 그림으로만 접했던 외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도 있었다. 자신의 외가는 오래 전 자작가였지만, 꽤나 명문이었다. 하지만, 권력싸움에서 진 백작가가 당시 자신의 영지 내에 있던 외가를 희생양으로 지목했다고 어머니한테 들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의 기억이 전해지 듯 그녀의 감정도 생생하게 전해져와 케이넬스도 눈물이 흘렀다.
케이넬스는 아직도 눈에 선한 어머니의 모습에 다가서려 했지만, 소녀는 사라지고 풍경이 빠르게 바뀌었다. 바뀐 풍경 속은 어느 도시의 외진 골목이었다. 아름다웠던 소녀는 사라졌고, 더러워진 옷 하나와 때 구정물이 잔뜩 묻은 몸으로 질질 끌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성욕에 눈이 멀어 두 눈이 붉어진 거지들이 있었다.
그녀는 살려 달라, 구해 달라 소리쳤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고, 거지들의 손은 그녀의 연약한 몸을 붙잡아 입을 막는데 큰 힘이 들지 않았다. 소녀의 눈은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그리고 이내 끝이라고 생각할 때, 거지들의 몸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성별조차도 모를 사람이 서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기억이라는 것을 알고도 달려들었던 케이넬스는 갑자기 죽은 거지들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그 뒤에 서있는 인형을 보았다. 처음에는 자신의 아버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신장으로 미루어 봤을 때, 성인인 것 같았다. 그 인형은 서서히 어머니에게 다가갔고 지팡이를 그녀의 앞에 세우며 잡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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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시죠?”
“널 살려준 존재. 그리고 그 눈에 맺힌 원망을 풀어줄 존재.”
그녀의 질문에 대답한 그 목소리조차 성별을 나누기 어려웠다.
“그게 무슨?”
지팡이를 잡고 자리에서 어떻게든 일어나려 했던 그녀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을 느끼며 다시 주저앉았다.
“재밌더구나. 지나가다 본 그 눈.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 아이야, 소원이 무엇이냐?”
“... 당신은 신이신가요?”
“너희 인간들을 날 그렇게도 부르지. 사실, 내가 악마든 천사든 저 위에 군림한다는 신이든 상관없지 않나? 소원이 무엇이냐?”
그의 질문에 머뭇거리던 그녀는 답했다.
“저희 가문을 그렇게 만들고, 저의 인생을 망쳐 버렸는데도 희희낙락 살며 욕하는 년놈들을 모두 다 죽이고 싶어요!”
그녀의 눈은 복수로 가득 찼고, 자신을 신이라 말한 자는 즐거워했다.
“크크크크흐흐흐. 복수인가? 복수만큼 단순하면서도 무가치한 욕망이 없지. 좋다. 네 손으로 그 년놈들을 직접 처리할 수 있게 해주마. 원한다면, 모든 복수가 끝나고 상으로 세상에 둘도 없는 고귀한 인간으로 만들어주지.”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뭐든 다 하겠어요! 발을 핥으라면 발을 핥고, 몸을 팔라면 팔 것이고, 영혼을 달라하면 영혼이라도 드리겠어요.”
그녀는 다시 지팡이를 잡고 일어섰다. 그는 흡족한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필요도 없다. 세 가지만 지키면 된다.”
“그게 뭐죠?”
“첫 째는 이것.”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차가운 기운이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낀 그녀는 흠칫했지만, 그의 기분을 거슬리게 할까 걱정하며 가만히 있었다.
“지금 들어간 것은 ‘계약’이다. 나는 너의 소원을 철저하게 이뤄준다. 그 기한은 네가 죽는 순간 까지. 계약의 징표로 너의 오감을 나와 연결 시켰다. 네가 나의 감각을 느끼진 못 하지만, 나는 네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지.”
“그렇다는건...”
“오감을 종합해 너의 감정조차도 알 수 있다. 실로 아름다운 증표지. 네가 원하는 걸 난 바로 알 것이며, 난 널 완전히 만족 시킬 수 있다. 걱정하지마라 어디까지나 인지한다는 것이지. 지배 하는게 아니니.”
“아, 네.”
“그리고 그 다음은 나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 것. 또 마지막으로는 나의 유희를 방해하지 말 것.”
“유희요?”
“그래. 유희. 나는 인간들을 보는 게 좋다. 그것이 나의 유희.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못 보게 한다면 대가를 치러야지. 내가 말한 세 가지, 아니 첫 번째 것은 이미 되었으니 두 가지만 지킨 다면, 네가 죽을 때까지 이 계약에 대한 대가를 치르진 않을 것이다.”
“그 대가는 무엇인가요?”
“사람마다 다르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꿀수록 그것의 대가는 점점 커지지. 너의 경우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는 그의 섬뜩한 말에 마른 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에 대해 말하지 않고 유희를 방해 하지 않는다면 복수를 하고 다시 귀족이 될 수 있었다.
“알겠어요.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말해라. 난 호기심 많은 인간을 좋아한다.”
“왜 절 도와주시는 거죠? 저처럼 길바닥에 버려진 이들도 많을 텐데요.”
“말하지 않았느냐. 재미있어 보인다고. 음, 더 자세한 이유가 말하자면 하루아침에 몰락한 영애가 대공비가 되어, 멋있게 복수를 하는 소설을 읽었는데, 마음에 들었고 거기에 꼭 맞는 주인공이 없나 해서 돌아다니다가 너를 발견한 것뿐이다. 난 힘이 있고 재미를 원한다. 그리고 넌 재미있는 아이고 힘을 원하지, 서로가 원하는 걸 교환한 거래일뿐이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팡이를 한 번 돌리더니 뒤로 돌았다.
“나를 찾을 때, 머릿속으로 ‘악룡’을 불러라. 그것이 내 이름이다. 그리 하면 내 수하들이나 내가 찾아가지.”
악룡과 시체는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골목에는 그녀만이 남아서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악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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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악룡의 대화를 지켜보던, 케이넬스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것이 악룡이며, 항상 자상하고 사랑스럽던 어머니의 본모습을 본 케이넬스는 혼란스러웠다. 화가 나다가도, 안타깝고,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부정했다. 악룡은 어머니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수많은 일들을 지시했다. 단지, 어디로 몇 시까지 가서 무슨 행동을 하라 라는 것만으로도 어머니의 인생이 빠르게 변했다. 악룡의 말을 전하는 사람들은 매번 달라질 정도로 많았고, 그들도 어머니와 같은 계약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악룡이 시킨 대로 움직이는 인형이었다. 거지에서 평민으로 평민에서 귀족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결국, 원로회의와 재판장을 거쳐 황제의 앞에 자신의 가문의 무죄를 증명했으며, 자신의 가문에게 누명을 씌워 몰락시킨 백작가에게 철퇴를 내리게 했다. 모든 복수가 끝이 난후, 악룡으로부터의 연락은 사라졌고, 이 과정 속에서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것은 케이넬스가 지켜본 어머니의 인생 중 가장 행복 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그녀에게 가장 큰 불행이었으며, 악룡의 유희가 끝나 간다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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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장면이 바뀌어, 결혼식장이 눈에 보였다. 수많은 하객 속에서 축하를 받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였다. 종종 봐왔던 친척들과 유명한 귀족들도 있었다. 행복한 시간이 그렇게 흘러 첫날밤을 기다리는 어머니가 보였다.
“행복해 보이는군. 베이린 테닝. 아니 이제 베이린 스트리왈드 후작비인가?”
뒤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소리에 그녀는 화장을 고치던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악룡의 모습을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무슨 일이죠?”
“이런, 너의 소원을 이뤄주고 후작비까지 되게 해줬건만. 너무 경계하는 거 아닌가?”
그녀는 악룡의 말에 경계를 풀고 미소를 지었다.
“이런 야밤에 갑자기 찾아오니 놀랐을 뿐이에요.”
“하하하, 연기도 많이 늘었군. 그 독기에 가득 찬 아이가 이렇게 크다니. 역시 인간은 재밌어. 지금까지 나의 말이 들리지 않아 어땠나? 재미있었나? 아니면 걱정했나?”
“글쎄요. 그 날 당신이 말한 왼쪽 문을 열지 않아서 전 행복을 찾았는데, 당신은 어떤가요?”
그녀는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면서 물었다. 그 모습에 악룡은 크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방문 밖으로 들릴까봐. 긴장한 베이린은 문을 보았다.
“사일런스 마법이 걸려 있으니, 그리 긴장 안 해도 된다. 행복이라 너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구나. 인간들은 대체 왜 그런 줄 모르겠어. 원하는 걸 얻기 전까지는 날 신으로 취급하더니 원하는 걸 얻은 후에는 악마 보듯이 하더군.”
악룡은 그녀에게 다가가 얼굴을 매만졌다.
“참으로 아쉬워, 네가 유희를 망쳐 나를 실망시킨 것이. 그리고 그 대가를 네가 치러야 한다는게.”
“이제 절 죽일 건가요?”
베이린은 소름이 돋는 것을 참으며 그의 눈이 있을 법한 자리를 보았다.
“죽이다니? 난 절대 죽이지 않아. 그저 너와 내가 맺은 계약이 끝나지 않았고, 넌 내 유희를 망쳐 대가를 치루는 것이지. 그것도 그 날 네가 열지 않은 왼쪽 문 때문에 죽어간 4명의 사람의 몫까지 말이지.”
“그게 무슨, 계약은 이미...”
“네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나. 모든 년놈들이라고, 너희 가문을 몰락시킨 곳이 백작가하나 인 줄 알았나? 아니지, 백작가도 그저 이용당한 것뿐이야. 불쌍한 베이린. 복수도 하지 못하고.”
“왜...”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원래 신이라 자칭하는 놈들은 변덕이 심한 법이 거든. 그래서 한 번 시험해 봤지. 과연 복수가 끝난 줄 안 넌 나를 따를까. 그리고 주저 없이 나를 실망시키더군. 심지어, 내가 가진 4개의 유희마저 부서져버렸어.”
베이린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몸을 떨기 시작했다. 베이린의 오감을 통해 감정을 읽은 악룡은 베이린의 몸에서 떨어진 뒤 보이지 않는 얼굴과 몸으로 연극을 하듯 움직였다.
“그래, 그 표정, 그 감정, 그 분노야 베이린. 이제야 볼 만하군! 그 모습을 위해 나같이 성급한 신이 이렇게 오래 동안 기다렸지. 복수가 사라지고 나니 공허함과 함께 찾아온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거머쥐면서 느껴져 오는 만족감!! 아아!! 그리고 인생 가장 행복한 순간에 찾아오는 비극!”
베이린은 다리에 힘이 풀려 앉았다.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백작가가 아니었다니, 그럼 누구란 말인가. 아니 애초에 악룡의 말이 진실인가. 아니면 이것도 그의 변덕인가. 처참해진 자신의 앞에서 큰 목소리로 웃는 악룡을 보며, 베이린은 과거의 모든 것을 잃은 자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화장대 서랍에 위치한 단도를 꺼내 들어 악룡에게 달려들었다.
[멈추어라]
단 한마디, 그 한마디가 베이린을 세웠다. 숨도 쉴 수 없는 베이린에게 악룡이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 쥔 단도를 빼앗아 들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너도 억울할 테니 찾아보도록 해봐라. 10년 정도가 좋겠지. 10년 간 더 살면서 발버둥 쳐 봐라. 복수를 위해서도 좋고, 남은 인생을 위해서도 좋고, 날 죽이기 위해서도 좋다. 그 또한 새로운 유희겠구나. 네가 진 대가는 10년 뒤, 가장 행복한 날에 찾아올 것이다. 그게 너의 벌이다.”
악룡이 그 말을 남기고 사라지자, 베이린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몸을 감싸며, 덜덜 떨었고 곧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베이린!”
일레인이 땅에 주저앉아 있는 베이린을 보고 달려와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어디가 아픈거야? 왜 그래?”
일레인은 손으로 전해져 오는 한기를 느끼며, 주치의를 찾기 위해 나가려하자. 베이린은 일레인의 손을 잡았다.
“오늘 좀 피곤해서 그래요. 나 좀 안아 줄래요?”
베이린의 말에 일레인은 그녀의 안색을 살펴보곤 껴안았다.
“오늘 결혼식 하느라 정신없었을 텐데. 첫날 밤은 미루지. 어디 도망 가는 것도 아니고. 일단 푹 쉬어”
일레인의 배려 깊은 말을 듣자. 베이린은 눈물이 차올랐다.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10년이 너무나도 힘겨울 것이라는 것과 일레인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감정이 차올랐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스리고 입을 열었다.
“크크, 정말 괜찮아요. 일레인. 잠시 어지러운 것뿐이에요. 그리고 나 지금 이 옷 아래에 아무것도 안 입었는데.”
베이린은 일레인의 코를 검지로 살짝 쳤다. 자신에게 남은 10년 이 고맙고 미안한 자신의 남편을 위해 쓰리라 다짐을 하며.
“저, 이대로 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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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10년의 일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어머니는 악룡에 대한 수소문도 자신의 가문을 몰락 시킨 흑막도 찾지 않았다. 오로지 아버지를 위해 살았으며, 후작가의 안주인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임신을 알게 된 뒤 울던 모습, 자신이 태어나고 기뻐하던 어머니의 모습, 자신이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자 환하게 웃던 모습. 수많은 장면들이 지나갔다.
케이넬스는 악룡에게 도움을 받을 당시 저지른 행동들이 결과적으로 범죄행위가 되는 걸 보면서 외면했던 어머니의 모습과 자신과 아버지를 향해 헌신하는 모습, 사용인들을 대하는 안주인으로서의 면모들이 부딪히며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생이 태어나는 순간을 보고는 어머니의 모든 기억이 끝났다. 마지막에 악룡이 모습을 드러낼까 싶었지만, 완전히 관심이 없어진 건지, 새로운 유희 거리를 찾은 건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잠든 채로 어머니는 돌아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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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케이넬스가 쓰러진 상태로 헛숨을 들이키자, 노인은 그를 잡아 앉혔다. 그리고 안고 있던 페일린을 그에게 다시 넘겨 주었다.
“그래, 어땠느냐.”
“...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알던 어머니의 과거가 이런 것이고 무엇이 진짜 어머니인지 모르겠군요.”
“......”
“하지만, 하나는 확실해 졌습니다.”
“음?”
케이넬스가 자세를 고치고 페일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악룡과 그 잔재들을 제가 모두 베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