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가 필스가드의 수도 별장에 다다르자 오필린과 테일러는 마차에서 내렸다. 예정대로라면 자신의 아버지는 공작의 지위와 함께 제국의 많은 기사단 중 으뜸이라는 제국 기사단의 단장으로 취임한 뒤, 이곳이 레이든 필스가드의 본가가 될 것이었다. 오필린은 천천히 움직이며, 별장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일단은 피른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다.’
중앙 건물에 들어서자, 검은색 정장에 하얀 백발을 말끔하게 뒤로 넘긴 피른을 비롯한 시녀와 하녀들이 시립해 있었다.
“오셨습니까? 공녀님. 저녁은 어떻게 할까요?”
“조금 있다 먹을게요 피른. 아버지는 아직도 연무장에 계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흠, 일단 접대실에서 저 좀 보죠. 해야 할 말도 있고 의논해야 할 일도 있어요. 테일러도.”
“네. 알겠습니다.”
집사장인 피른과 시녀 테일러는 동시에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둘과 함께 접대실로 올라간 오필린은 하녀가 차와 간단한 과자를 내오자, 두 사람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낮에 펀치 백작가의 영애가 저한테 폭행을 당했어요.”
“네, 그 일의 경위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습니다.”
피른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필스가드의 가신들 중에서는, 그들이 모시는 주군의 딸이 백주대낮에 길거리 한 복판에서 다른 영애를 쥐 잡듯 패버렸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공녀라면 자신의 신분을 좀 더 자각해주세요!’ 라는 말은 안하나요?”
“제가 아는 공녀님이라면 모든 상황을 생각하고 행동 하셨을 텐데 아닌가요?”
피른은 잔잔하게 웃으며, 오필린을 바라보았다. 오필린은 피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앉아 있던 의자에 푹 기대었다.
“너무 절 과대평가하시네요. 저 아직 14살이랍니다.”
“특별한 14살이시죠.”
[딸기 쿠키가 먹고 싶은데 공녀님 부탁드립니다.]
오필린은 눈을 감고 살짝 입고리를 올렸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있던 작은 종을 흔들었다.
“딸기 쿠키 좀 가져오렴.”
“네.”
종소리를 듣고 들어온 하녀가 고개를 숙인 뒤 나가자 테일러는 피른을 쏘아 보았고, 피른은 민망한지 고개를 돌렸다.
“적어도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알아서 챙겨 드세요. 피른. 지금 당장 안 먹어도 되지 않나요?”
“흠흠 내가 뭘 했다고 그런 건가.”
“다 아실 분이! 공녀님을 얼마나 귀찮게 하려는 겁니까?”
“그냥 생각만 한거야. 생각만. 사람 참...”
“생각만 했다고 하기에는 날 너무 애타게 부르던데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건... 흠흠”
오필린은 아웅다웅 하며 다투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이 8살이 되기 전까지, 그녀는 눈을 감아도 욕망이 들릴 정도로 제어가 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자신은 방 밖으로 나가는 것과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이런 자신의 능력을 감추기 위해 아버지와 집사장 피른, 유모 테일러는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하며 자신을 숨겼고, 그 결과 오직 3명만이 자신의 능력과 진짜 모습을 알고 있다.
물론, 지금도 자신의 능력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가 없지만, 그나마 자신이 보는 모든 사람만의 욕망이 들릴 정도로 제어가 가능해졌다. 그렇게 글자를 배우기 전부터 미소가 지어질 만큼 아름다운 욕망과 욕이 나올 만큼 추악한 욕망 들을 보고 자란 오필린은 자연스럽게 처세법을 터득했고, 또래보다 성숙하게 자랐다.
“이제 다 싸운 건가요?”
하녀가 딸기 쿠키를 들고 들어오자, 잠시 휴업에 들어간 테일러의 공세를 오필린이 파고들자, 피른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 모습에 테일러는 한 번 더 입을 열려고 하자 오필린은 웃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해 테일러, 피른 얼굴색 좀 봐. 하얗다 못해 퍼렇게 질릴 것 같다.”
“에휴, 아가씨도 참 이런 뒷방 늙은이를 의지 하시다니.”
“뒷방 늙은이라니! 내가 이 가문을 섬긴 지가 40년이 넘었어! 현 공작님을 가주로 만든 것도 나고, 현 공작님의 검도 내가 가르치고 ‘제국의 영웅’도 내 손으로 만들었다고!”
“네네. 그 레퍼토리도 40년이 넘게 바뀌질 않네요.”
테일러는 혀를 한 번 차고는, 오필린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공녀님은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셨으면 하시나요?”
테일러의 질문에 피른도 입을 다물고, 오필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일단 피른의 의견을 듣고 싶은데요?”
“흠. 이미 그 주변에 있던 영애들을 중심으로 코크스크류 영애가 필스가드 공작가를 공개적으로 모욕했다는 증언과 증인들을 확보해 두었습니다. 처음부터 그 쪽에서 잘 못을 한거고 만약 저였더라도 그 자리에서 장갑을 던졌을 겁니다. 그러니 제발 다음부터 호위 기사 좀 더 데려가 주세요. 공녀님. 테일러도 검을 다루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지만 여인의 몸입니다.”
“그건 그렇죠. 그래도 그 순간에 확 열 받더라고요. 솔직히 그 정도까지는 안 할라고 했는데, 그 여자가 하는 꼴이 말이 안 나와서. 오필린 필스가드가 ‘멍청하고 성정이 불과 같다’ 라는 소문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혼절할 때까지 패신 겁니까?”
테일러는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뭐, 그렇긴 하지. 집 안에만 있어서 스트레스도 쌓였는데, 오랜만에 풀기도 했고.”
테일러와 피른은 자신 앞에 있는 공녀의 성정은 소문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단지 정정할게 있다면 ‘멍청하다’라는 말 뿐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뮤즈 후작 부인의 판결뿐인가? 어차피 가문의 문제까지 가봤자,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 보다 뺏길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요?”
“네, 공녀님의 말대로 그 당시에는 사교계라는 울타리 안의 사건이었지만, 공식적으로 펀치 백작가에서 재판을 요청 하면, 가문의 일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일개 백작가가 공작가를 모욕한 죄는 그 자리에서 목을 쳐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이 기회에 제국에 공작가의 힘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겠죠.”
“그렇기에 그쪽도 사교계의 일에서 끝낼 생각이겠죠.”
“네, 어차피 정황상 뮤즈 후작 부인도 공녀님의 손을 들어 주겠지만, 문제는...”
“일의 과정보다 결과에 대한 소문이겠죠.”
피른이 말을 이어나가는데 뜸을 들이자, 오필린이 그의 말을 추측해 이어 말했다.
“맞습니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퍼뜨리고 있다고 생각이 들만큼 공녀님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이 발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뭐, 그거야 누군지는 대충 예상이 되는 군요.”
“리나 백작 영애겠지요.”
“그래 맞아. 오히려 바라고 있던 거였으니. 크게 신경 쓰지 마.”
가만히 듣고 있던 테일러가 대답하자. 오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구렁이 같은 여자가 이 좋은 먹잇감을 꿀꺽 삼키지 않으면 그거야 말로 글레인 제국 전체가 놀랄 일이다. 애초에 황태자비에 대한 이야기가 퍼졌을 때부터 그녀를 고려하고 짠 계획이었으니 그녀가 움직여주지 않으면 이쪽에서 곤란하다.
“피른은 펀치 백작가의 동향을 예의 주시해주시고, 테일러는 뮤즈 후작 부인의 연락이 담긴 편지가 오면 바로 내게 알려줘.”
“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힘차게 대답했다. 오필린은 두 사람의 대답을 듣고 뮤즈 후작의 판결을 예상했다. 오팔 살롱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뮤즈 후작 부인도 두 집안의 영애에게 큰 벌은 내리지 않을 것 같지만, 글레인 제국의 모든 제국민들이 이 사건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저냥 넘어갈 수도 없을 것이다.
‘가장 좋은 벌은 기간제 사교계 금지령인데...“
오필린은 이번 일로 황태자비 후보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며, 사교계에도 발을 들이지 않는 최고의 변명 거리를 만들고 싶었다. 사교계는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장소다. 그 안에는 아름다운 욕망보다는 여러 가지 의미로 듣기 힘든 욕망들만이 넘쳐 나기 때문이다.
‘승전식 때, 그 잠깐 자리를 지킨 것도 다음날 탈날 정도였으니...’
오필린은 승전식 때 겪은 생지옥을 회상하면서 쓴 웃음을 지었고, 이내 피른의 말에 본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쓰기 좋은 말이 군요. 리나 영애는”
“뭐, 예전부터 그랬죠. 소꿉친구라는 편한 말로 치장하고 가만히 있어도 사교계의 최신 정보부터 비밀스러운 이야기들 까지 물어와 주는데. ‘친구’ 정도면 싸게 먹히는 셈이죠. 그러고 보니 나름 심혈을 기울인 향수는 지금쯤 쓰레기통에 쳐 박혀 있겠네요. 향수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면 알아 볼 텐데.”
“으, 정말 아까워요... 그런데 정말 그녀가 황태자비가 될까요?”
테일러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오필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절대 없지. 황태자비는 시스티가 되겠지. 그녀가 되어야 하고.”
“당신도 별 걱정을 다하는군. 지금의 황제도 그냥 황제인가 이목을 돌리기 위한 공작인데. 어차피 황태자비는 정해진 수순대로 될 것일세. 오히려 황제는 공녀님을 점찍고 있었겠지. 항상 황제의 옆에 서서 싸운 전우가 공작님이시니.”
“그건 사양할게요. 황태자의 아내라니. 어휴. 그렇게 보면, 리나가 황태자비가 되면 그건 그것대로 볼만하겠네요. 여색을 밝히는 우둔한 황태자와 욕심 많은 구렁이라 꽤나 좋은 조합이네요.”
“그건 모르죠. 황태자비가 정해지기 전에 황태자가 먼저 바뀔지도. 황궁에선 지금 우둔하고 여색을 밝히지만 나이가 적당하고 고귀한 혈통을 갖고 있는 현 황태자와 나이는 8살로 어리고 하녀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그 총명함이 ‘정복제’라 일컬어지는 13대 황제를 넘어선다는 평을 받고 있는 2황자가 첨예하게 대립한다고 합니다. 결국 신구 귀족들은 현 황태자를 밀고, 관리 출신 귀족들은 2황자를 미는 중이랍니다.”
“그건 힘들겠죠. 귀족들과 관리들만의 싸움이었다면 해 볼만 했겠지만, 신귀족들 대부분은 거상들이니 그들의 힘은 곧 돈이며, 돈의 힘은 곧 권력이니까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걱정되네요.”
오필린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차를 들어 한 모금 삼켰다. 글레인 제국은 다시 일어서기 위해 힘을 내고 있지만, 황궁에는 전쟁 당시에도 보이지 않았던 검은 구름들이 잔뜩 끼고 있었다. 이런 여러 사정을 읽어 내던 오필린은 황태자비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음 먹었다. 아버지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면, 황태자비에 오르려고 하겠지만 자신이 아는 아버지라면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 2황자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다.
본디 일레인 후작이 재상에 올라 하려 했던 일이었지만, 아내를 잃고 가족 모두를 잃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재상 직을 거절했다. 이제 그 자리를 올라 제국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황제를 도와줄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도 물론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이 변을 당할까 걱정이 되어 쉽게 결정을 못 내리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녀님. 공녀님의 생각보다 레이든 공작님은 강하답니다.”
“알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 저도 움직여야죠.”
오필린이 일어서면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피른과 테일러도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연무장에 땅 파고 들어갈 기세인 우리 아버지 좀 말리러 가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