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검 밖에 모르는 얼간이인 자네가 결국 재상에 오른다고? 이 제국도 인재가 정말 없나보군.”
“할 줄 아는 거라곤 숨어서 입만 터는 겁쟁이 놈이 적격이지만, 이런 지방에서 시간이나 축내고 있으니 내가 오를 수밖에.”
“호, 겁쟁이라?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양아치가 많이 컸군?”
“크크, 어디 가면 네가 날 키운 줄 알겠군. 오랜 만에 연무장이라도 내려가 볼까?”
샹들리에가 햇빛을 받으면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접대실. 그 중앙에는 피 보다 붉은 머리와 검은 눈, 당장이라도 전쟁에 나가 적장을 벨 듯 한 기세를 뿜어내는 중년인과 차디찬 겨울을 연상 시키는 백 은발과 청안, ‘냉철’ 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형상화한 중년인이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마주 앉아 있다.
“됐네, 영주가 미쳐서 다 무너져가는 성을 반파시켰다고 광고라도 할 생각인가?”
“쳇, 그걸 핑계라고 하는건가. 뭐 그래도 접대실을 보니 갖출 건 다 갖췄구만. 일레인, 자네 스스로 이 황페한 땅을 영지로 달라 길래, 미친 줄 알았지만...”
레이든은 주변을 살펴보더니, 창문 멀리 내려다보니 비옥한 영지와 잘 갖춰진 도로를 가르켰다.
“2년 만에 이 정도 성과라니 괜히 천재가 아닌 것 같군. 접대실에 저런 사치품도 있고 저거 크리스탈 아닌가?
레이든은 샹들리에를 올려다 보며 말을 이었다.
“싸구려 크리스탈에 유리를 덕지덕지 발라 놨지. 꽤 그럴 듯 해보이지?”
“흠흠. 그런가 뭐 싸구려라도, 보석은 보석이지.”
레이든은 멋쩍은 듯, 테이블 위에 차를 한 번 들었다 놨다.
“우직.”
“쿵.”
“......”
“......”
레이든의 힘을 못 이긴 테이블은 다리가 부서진 채로 그들의 사이에서 무너져 내렸다.
“뭐, 상관말게. 어차피 목재가 썩어 있었네.”
레이든이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를 하려하자 일레인은 한 손을 들어 제지했다.
“서론은 이 정도면 긴 것 같은데, 본론으로 넘어가지. 이거 진심인가?”
일레인은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에게 테이블을 정리하라고 눈치를 준 뒤 일어섰다. 그리고 품 속에서, 청혼서를 꺼내 레이든의 앞으로 내밀며 말을 이었다.
“레이든 필스가드 공작의 영애 오필린 필스가드가 일레인 스트리왈드 후작의 장자 케이넬스 스트리왈드에게 청혼을 신청하는 바입니다.”
“그...그렇지.”
레이든은 일레인이 내민 청혼서를 받아들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그 자신도 이 청혼이 아니 이 제안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억지인지 자각하고 있었다.
“후, 자네가 내 아들의 나이를 몰랐다면 그건 그것대로 서운하고, 내 아들의 나이를 알고 이런 짓을 벌였다면 한 마디 해주고 싶은데 어느 쪽인가?”
“이 친구, 내가 자네 아들의 나이를 모를 리 없지 않는가? 하하하.”
"그렇단 말이지?"
"그럼그럼. 하하."
일레인은 한 손으로 머리를 한번 넘긴 뒤 레이든을 노려보았다.
“야 이 미친놈아! 내 아들이 올해로 10살이다. 니 딸은 올해로 17살이고 이게 말이 되냐?!”
“저 친구 일단 진정 하고, 어허 그리고 딸이라니?”
“그럼?”
“공주님?”
“이 미친 새끼가...”
일레인의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머리를 헝클이자, 레이든은 두 손을 들고 일레인을 진정시키기 위해 어깨를 토닥였다.
“자네가 너무 혈압이 올라가는 듯해서, 진정하자는 의미로 장난 친 걸세. 솔직히 내 딸이 아쉽지 않나? 우리 공주님이 그냥 공주님인가 경국지색에 문무겸비. 거기다가 집안도 제국에 둘 뿐인 공작가인 필스가드 공작가 아닌가?”
“그래 그 금지옥엽 공주님을 왜 우리 집안에 들여 놓을 거냐고, 니 놈이 싫어하는 놈팽이 3명 중 한 명이자 최상위인 나와 사돈을 맺겠다고?”
“하하. 뭐 그건...”
레이든은 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돌렸다. 일레인은 한 숨을 크게 들이 쉰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소문에는 필스가드 집안에 영식들의 청혼서와 꽃다발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던데, 내가 잘 못 알고 있는 건가? 수도에서 멀어진지 2년이 되었다고 했지만, 내 소식통이 그렇게 병신같진 않을 텐데 말이지.”
“흠흠, 뭐 그건 사실이지. 사실은 우리 공주가...”
“그냥 딸이라고 하게, 어떻게 17년이 지나도 그런 부끄러운 단어는 계속 쓰고 있는지.”
“쳇, 자네도 딸이 있으니 알 거 아냐, 얼마나 귀여운지.”
“우리 딸은 그래도 되네, 올해로 3살이니.”
“하! 10년 뒤에도 그 소리하나 보자고!”
레이든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뒤 일레인을 바라보았다.
“표면적으로는 우리 딸이 워낙 결혼 하는 것을 기피해서, 일단은 자유연애를 지향하고 자신의 일을 너무나도 사랑한다는 게 이유지. 그 아이도 정략따윈 개나 줘버리자 이런 마음 가짐이라.”
“그 아인 예전부터 보통 영애 같진 않았지. 이면적으로는 아마 내 힘이 필요한 건가?”
“반은 맞았네. 정확하게는 자네의 비호가 필요하네. 후작이지만 그 힘만큼은 우리 가문 저리 가라 아닌가.”
“비호라, 자네가 극도로 싫어하는 내 힘까지 빌릴 정도라니. 제국의 수도가 양분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힘들어 졌나 보군.”
“차라리 3년 전, ‘글레인 전쟁’ 때가 편하다고 느껴지더군. 그 생지옥에서 제국이라는 보상을 갖고 살아 돌아오니 아귀들만 들끓고 있더군, 지옥에선 누굴 벨지가 명확했는데, 지금은 정말 허공에 칼질을 해대는 느낌이야.”
일레인은 차가운 눈으로 창문 밖을 주시했다. 제국민들은 그를 ‘제국의 방패’ 라 불렀지만, 그는 ‘곡도(曲刀)’ 였다. 전략보다 모략을 구사하여 전장에서 칼과 방패가 아닌 사람을 보며, 사람 그 자체를 베어내던 그런 인간이었다. 전쟁 당시 제국의 마지막 영토를 지키며, 쳐들어오는 적군을 말그대로 유린하였다. 그렇기에 지금 수도에서 일어나는 아귀다툼을 정리하는 데에는 돌진 밖에 모르는 눈앞의 오래된 친우가 아닌 자신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일레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레이든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날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쯧, 사람하고는. 어디 이래서 내가 푸념이라도 놓겠는가?”
레이든은 씁쓸히 웃는 일레인에게서 눈은 뗀 체,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3년 전 화창한 어느 봄 날, 그날은 일레인의 딸 페일린이 태어나는 날인 것과 동시에 일레인과 레이든이 이례적으로 개국공신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공작이 되어 최고 권력의 중심에 서는 날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진통과 예정일보다 한 달이 빠른 출산 후, 수도로 올라간 일레인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던 아내 베이린은 영지에 숨어든 암살자들의 손에 죽었다. 그 당시 케이넬스의 재능이 개화되지 않았다면, 일레인의 가문은 멸족 당했을 것이라는게 호사가들의 말이다. 소드 마스터의 벽을 느끼고 있던 기사들도 알지 못했던 암살자들의 존재를 그 당시 7살인 케이넬스가 알아차린 것이다.
“아직도 누군지는 밝혀내진 못했지?”
“비밀리에 알아보곤 있지만 누가 왜 보냈는지는 아직 모르지. 두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지옥 끝까지 따라가 알아냈을 텐데. 후, 이래서 사람은 지킬게 많아지면, 몸이 무거워 진다는 거더군.”
“그래. 나라도 돕고 싶지만, 워낙 머리는 돌인데, 할 일은 많으니 이해해주게.”
“말이라고, 자네 도움 받을 바에야 내 아들놈한테 부탁하고 말지.”
“하하하, 그래 그놈이 꼬맹이 때부터 아이 같지는 않았지. 뭐 지금도 다 큰 건 아니었지만.”
“어디서 그런게 나왔는지. 귀여운 맛도 없고, 벌써부터 경제니 무역이니 배우려고 하더군. 배우는 속도가 가정교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야.”
“하하. 이 친구 자연스럽게 자식자랑 하는구만.”
레이든과 일레인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날려 버리려는 것인지, 농을 주고 받으면 주제를 바꾸었다. 그들 스스로에게도 베이린의 암살 사건은 잊을 수 없는 역린이었다. 재상이 될 일레인은 후작이 되어 동부의 전면 도시화를 계획하고 내려갔다. 앞으로는 평화의 시대이며 화살보단 돈이 가장 큰 무기임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던 그는 조용히 무기를 모아, 복수의 칼날을 가다듬고 있었다. 레이든 또한 그런 친구의 마음을 알기에 소드 마스터로써 제국 기사단을 이끌 계획을 철회하고, 직접 재상으로 올라가려고 마음을 바꾸었다. 재상으로 가는 길은 험난한 가시밭길 이었지만, ‘개국공신’, ‘영웅’ 이라는 칭호는 그에게 가장 큰 무기었다. 그렇게 현재, 3년 만에 비로소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하여튼, 자네의 생각은 잘 알았네, 못난 친구 덕분에 재상까지 올라가는데 바로 결혼은 할 순 없어도 약혼까지는 허락하겠네.”
“고맙군.”
“하지만 우리가 허락 한다고 해서, 그 녀석들이 순순히 ‘알겠습니다.’ 할지는 모르겠군.”
“그거야 뭐......”
‘특히 케이넬스가’
‘특히 오필린이’
두 사람 다 자기 자식의 성정을 충분히 알았다. 10살의 나이지만 재능 때문인지 전혀 아이 같지 않은 케이넬스와 공작 영애라는 직위에 맞지 않게 자유분방하고 성정 또한 길바닥에서 머리 채 잡고 싸움질 할 정도의 성정을 지닌 오필린을 생각하던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두 사람 다 불러보지. 뮤랑, 케이넬스와 오필린 영애를 불러오게.”
일레인은 뒤편에 시립해 있던, 집사 뮤랑을 보면 말했다. 뮤랑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일레인을 바라보았다.
“영주님, 방금 전에 하녀가 가져온 소식에 의하면 소영주님과 공작 영애께서 연무장으로 가셨답니다.”
“.....!”
“뭐?!”
레이든과 일레인은 뮤랑의 말에 놀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