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절했다가 하루가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데일의 눈에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류크의 모습이 들어왔다.
데일은 순간 지금의 상황이 어떤지 판단을 못했다.
"류크 할아범? 어째서 여기에...난또 왜 여기에?"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이 누워있는곳이 자신의 방인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중얼거리는 데일이었다.
데일은 차근차근 기억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분명히 그 가짜 녀석 하고 싸우고 있었는데 그 가짜의 공격이 나한테 오기 전에 뭔가 내 방어를 뚫고 나를...?'
데일은 기억을 되짚으며 마지막 기억에 류크의 모습이 떠오르자 지금의 상황이 짐작이 가는 듯 했다.
그리고 그 짐작을 확인하듯 류크를 노려보았다.
"그때 날 기절시킨 건 류크 할아범이지? 내말이 맞지? 그리고 어떻게 침입자가 바로 내성으로 들어올 수가 있는 거야?"
반짝이는 빛을 머금은 데일의 순수한 눈동자에 마주하기 어려웠던 건지 류크는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대답을 회피했다.
"허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류크는 데일을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약하시지만 각성하시면서 진실을 끌어내는 눈이 되었어…….조만간 그날이 오겠군.'
로드의 후계자가 각성을 하게 되면 어떠한 형식으로든 로드가 되기 위한 시련이 찾아오는 것이 운명이었다.
류크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귀여운 손자처럼 돌봐온 데일에게 닥칠 시련을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데일은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지 류크가 명확하게 대답을 해주지 앉자 대답을 듣는 것에 대해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류크 할아범은 대답을 해줄 생각이 없는것 같고... 아버지는 분명 보고 받으셧겠지?그렇다면 어떻게 수많은 귀족들을 두고 내성에 침입자가 온 건지 아버지에게 물어보겠어!'
데일은 자신의 결정을 미룰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대답해주지 않겠다면 아버지에게 물어보러 가겠어."
말 과동시에 문을 박차고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라이제르의 집무실로 향했다.
류크는 그런 데일을 천천히 뒤따라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당장이라도 집무실에서 라이제르에게 따지고 있어야할 데일이 코너에서 석상처럼 굳은 듯 멍하니 서있었다.
류크는 의하해하며 데일의 시선을 따라 앞을 보았다.
그곳에는 다름 아닌 미호가 서있었다.
류크는 미호와 데일을 한 번씩 번갈아 보고 데일이 미호에게 어떤 감정이 생겼는지 알아차렸다.
'흠흠, 우리 도련님도 빠져도 저런 분에게 빠지시다니 성내에도 어여쁜 아이들이 많은데...데일 도련님 성격상 어제 사건을 알리면 손님들 방으로 쳐들어갈 것이 뻔해서 안 알려 드린 것인데 그래도 저 소녀 때문에 자신이 죽을뻔한걸 알면 마음이 변하겠지? 손님들을 귀찮게 하더라도 그냥 사실을 알려드리는 게 나을지도..'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아직도 미호를 보며 정신을 못파리는 데일에게 말을 건네는 류크였다.
"도련님"
"......."
"도련님!"
"..어? 왜 류크할아범?"
몇 번을 부른 후에야 정신을 차린 데일이 대답했다.
그마저도 말을 더듬는 것을 보니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것도 아닌 것이 분명했다.
류크는 그런 데일을 보며 가볍게 한마디를 건넸다.
"얼굴에 사랑에 빠졌어요, 라고 쓰여 있습니다."
"뭐?! 어디에?"
어찌나 자연스럽게 말하는지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버린 데일은 금세 얼굴이 빨갛게 변해버렸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말을 했다.
"아..아냐,그런거"
하지만 데일의 표정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푹빠져잇는듯 했다.
류크는 좀 전까지 비밀로 하려 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막힘없이 술술 말했다.
"저번일의 범인이 궁금하시다고 로드님의 방으로 향하시는 것 아니었습니까,도련님?"
데일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다시 생각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맞다... 가아니라 알고 있었어!"
애써 당황한 기색을 숨기는 데일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류크의 말을 듣고는 숨길 수 없을 만큼 당황하는 데일이었다.
"사실 말씀드리려 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된 김에 알려 드리겠습니다.어제 그일의 범인은 저분이십니다."
"뭐..뭐라고?"
데일은 공격받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다시 말했다.
"그럼 왜 알고도 침입자를 가만히 두는 거야?"
"그건 로드님의 손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 말에 다시 한 번 멍해진 데일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류크는 이제는 데일이 마음을 접었다고 판단하려던 찰나 데일의 입에서 류크의 생각과는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다.
"훨씬 더 마음에 드는데?"
데일도 소문을 들어 아버지와 같은 초월자급의 실력자들이 손님으로 온 것을 알고는 있었다.
류크의 말을 듣고 그냥 호감이 갔던 여자에서 자신이 찾던 반려자라고 생각할 만큼 마음이 바뀐 거라고 굳게 믿는 데일이었다.
데일의 마음을 접게 하려던 류크의 의도가 산산이 부서진 것도 모른 채 미호에게 다가가는 데일이었다.
데일이 가까이 다가오자 미호는 고개를 돌려 데일을 바라보았다.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에 순간 멍때릴수밖에 없는 데일이었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 예절을 차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모든 뱀파이어의 지배자 로드 라이제르 의 후계자이며 유일한 혈족인 '데일 드 피아체'라고 합니다."
데일은 자신의 소개 후에 이어져야할 소녀의 대답이 없이 정적이 흐르자 이어서 말을 했다.
"물론 이렇게 소개하지 않아도 저에 대해선 모를 리 없겠지만 말이지요, 하하하"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계속 말을 걸며 노력하는 데일이었다.
하지만 미호는 그 절실한 몸부림이 보이지 않는지 데일을 완전히 무시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데일은 포기하지 않고 미호에게 붙어서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문득 미호가 데일을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데일은 드디어 자신의 노력이 빛을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미호의 표정은 누가봐도 짜증이 섞여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나 때문에 놓쳤잖아!"
찔릴 듯한 고음과 함께 미호는 손을 데일을 향해 휘둘렀다.
데일은 미호의 가벼운 손짓에 복도 뒤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유는 모르지만 미호는 아직 분이 안 풀렸는지 씩씩거리며 돌아가 버렸다.
그래도 손속에 사정을 두었는지 잠시 후 데일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역시 내가 반할만한 여자야! 이 정도는 돼야 도전할 만하지!!!"
무시당했음에도 의지를 활활 태우는 데일이었다.
물론 류크의 마음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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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데일을 목숨이 왔다 갔다 한 사건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새하얗게 잊은 채 미호는 아침에 일어나서도 침대에서 뒹굴 거리고 있었다.
물론 그 옆에서는 연우가 옆에서 업어가도 모를 만큼 쿨쿨 잠자고 있었고 말이다.
미호는 뒹굴 거리면서 시간이 가는지도 모른 채 편안하게 잠이든 연우를 감상(?)하고 있었다.
양쪽의 입가가 살짝 올라간 미호의 미소는 마치 지상에 강림한 미의 여신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미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더니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잠자고 있던 연우를 두고 조용히 방을 빠져 나왔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파장은? 미약하긴 하지만 이 느낌은 그분의 것인데 어째서 이 근처에서 느껴지는 거지?그럴리가 없는데.. 게다가 왜 이렇게 약한 거지?'
의문을 가지면서 미호는 직감에 따라 너무나 미약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파장을 간신히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아니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옆 복도 모퉁이에서 나온 어떤 꼬맹이가 미호의 앞길을 막았다.
얼굴을 보니 어제 자신이 장난쳤던 그 꼬맹이 였다.
미호는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파장을 쫓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 꼬맹이는 끈질기게 미호의 앞을 막으며 말을 걸었다.
미호는 미약한 파장을 놓칠까 느껴지는 기운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미약한 기운이 끊어지고 말았다.
미호는 기운을 놓쳐버리자 눈앞의 꼬맹이 탓이라 생각하며 감정이 실린 손을 휘둘렀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법,당연한 결과로 미호의 손에 맞아 눈앞에서 꼬맹이가 날아갔다.
미호는 그래도 분이 다 안 풀렸는지 씩씩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
미호가 방에 도착해 문을 열었을 땐 이미 연우는 잠에서 깨어난 상태였다.
미호가 짜증난 얼굴로 들어오자 연우는 미호를 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화나 있어?"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