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11-02 16:14
[역사] 조선시대 수해와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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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스토리야
조회 : 2,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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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PHS_1055 [397] |
◆ 조선시대 수해와 대책
휼전 (恤典)
정부에서 이재민 등을 구제하기 위하여 내리는 특전(特典).
나라에서 관리들이 죽었을 때에 철조(輟朝)를 하거나, 장례 비용의 일부를 대주는 일. 또는 그 밖의 사제(賜祭)·배향(配享)·추봉(追封)·수비(樹碑)·입방(立坊)·건사(建祠) 따위를 해주는 일. [유사어]휼상(恤償). 휼음(恤蔭). ②나라에서 천재지변으로 인해 생계를 잃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로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 시대 고구려의 진대법(賑貸法)에서 그 유래가 시작되어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의창(義倉)과 대비원(大悲院) 및 제위보(濟危寶)가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호조(戶曹)와 진휼청(賑恤廳) 및 각 도에서 휼전을 주관하였음. 집이 가난하여 결혼할 나이가 지나서도 혼인하지 못한 사람과 장례를 치르지 못한 사람들 및 흉년에 구걸하는 어린아이들과 버려진 어린아이들에 대한 구호도 포함됨. [유사어]구휼(救恤). 휼민(恤民). 휼환(恤患).
기청제 [ 祈晴祭 ]
장마가 연일 계속되어 피해가 예상될 때 나라에서 비가 멎기를 빌던 제사.
‘영제(禜祭)’라고도 한다. 원래 ‘영(禜)’이란 산천신에게 빌어 수재·한재·여역(癘疫)을 물리치는 제사를 말한다.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지속된 농경의례의 하나로 주로 입추(立秋) 뒤까지 장마가 계속되어 흉년이 예상될 때에 날이 개기를 빌던 제사이다. 따라서, 음력 7, 8월에 가장 많이 행해졌고 그 다음이 6월, 그리고 이밖에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도 비가 그치기를 빌었다.
기청제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권제32 잡지 제1에 나오는 천상제(天上祭)와 사성문제(四城門祭)에서 나타난다. 사성문제는 대정문(大井門)·토산량문(吐山良門)·습비문(習比門)·왕후제문(王后梯門)에서 지냈고, 부정제(部庭祭)는 양부 사천상(梁部四川上), 곧 견수(犬首)·문열림(文熱林)·청연(靑淵)·박수(樸首)에서 지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사≫ 세가(世家) 권제4 1022년(현종 13) 10월조에 “장마로 비가 그치지 않아 날이 개기를 군망(郡望)에 빌었다.”라는 내용을 비롯하여, 정종 1년(1035), 문종 27년(1073)·31년, 숙종 3년(1098)·4년, 예종 1년(1106)·5년·8년, 인종 7년(1129), 공민왕 19년(1370)·20년·21년 등에 그 기록이 보인다.
제의는 기우제와 비슷하게, 천상(川上)·북악(北嶽)·송악(松嶽)·박연(朴淵)·상하신기(上下神祇)·태묘(太廟) 및 제신묘(諸神廟)·묘사(廟社)·팔릉(八陵)·사직(社稷)·군망·산천(山川)·불우(佛宇) 등에서 지냈는데, 이로 보아 그 방법이나 양상이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고려사≫ 지(志) 권제17에는 비가 오랫동안 내리면 국문(國門)에 영제를 지내는데 이때 제사를 지내는 풍사단(風師壇)·우사단(雨師壇)과 같은 큰 규모의 제단들에 대한 언급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실록≫ 1404년(태종 4) 7월조에 “산천단(山川壇) 및 불우·신사(神祠)에 기청했다.”는 기록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대문에 영제를 지낸 기록이 고려 때보다 빈번하게 나타난다. 특히, 영조와 고종 때 가장 많이 나타난다. 1421년(세종 3) 6월 조에는 “예조에서 아뢰기를 고려 ≪고금상정례 古今詳定禮≫에 이르되, 장마가 그치지 않으면 서울 성(城)의 여러 문에 영제를 올리는데 각 문마다 3일 동안 매일 한 차례씩 하고, 장마가 그치지 않으면 이에 산천·악진(岳鎭)·해독(海瀆)에 3일 동안 기도한다.
그래도 그치지 않으면 사직과 종묘에 기도하며, 주현(州縣)에서는 성문(城門)에 영제를 지내고 경내(境內)의 산천에 기도한다.”고 하며, “장마가 오랫동안 덮쳐서 벼를 손상시켰으니, 국문과 주군(州郡)의 장마비가 많이 온 곳에 영제를 지낼 것을 진언하여 그대로 시행했다.”는 비교적 구체적인 기록도 전한다. 이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의 예(禮)를 그대로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제의 장소 및 형식은 고려시대와 비슷하나 조선시대에는 주로 도성의 4문, 곧 숭례문(崇禮門)·흥인문(興仁門)·돈의문(敦義門)·숙정문(肅靖門)에서 많이 행해졌다. ≪춘관지 春官志≫ 권1 향사총재(享祀總載) 영제조(禜祭條)에 따르면, “4문에 당하3품관(堂下三品官)을 보내어 연사흘 기청제인 영제를 지내고, 그래도 비가 그치지 않으면 3차에 걸쳐서 다시 4문에서 거듭 행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대전회통 大典會通≫ 권3 예전(禮典)에 따르면 “사문영제(四門禜祭)는 문 위에서 설행(設行)하되 개폐(開閉)하지 않을 수 없을 때에는 정원(政院 : 승정원)에서 군명(君命)을 받아 열고 닫는다.”고 하였다.
기우제가 거의 연중행사였고 해에 따라서는 수차 거듭되는 데 비하면, 기청제는 드문 편이기는 하지만 어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표방하던 농본국의 중대한 제정(祭政)의 한 부분이었음을 인식할 수 있다. 기청제는 민간에서도 지냈고, 의식은 기우제와 비슷했다고 하나 민간의 전승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제방(堤防)>
물이 넘쳐 흐르는 것을 막거나 물을 저장하기 위하여 흙이나 돌, 콘크리트 등으로 막아 쌓은 둑.
내용제방의 뜻은 어느 경우이든 물의 자연적(순리적) 유통을 막기 위한 인공적 시설을 의미하며, 그 내용은 저수(貯水)를 위한 제체(堤體)의 뜻과 방수(防水)를 위한 제체의 뜻 등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방의 뜻이 저수를 목적으로 쓰여진 최초의 기록은 531년(법흥왕 18) “유사에게 명하여 제방을 보수하였다(命有司修理堤防).”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810년(헌덕왕 2)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하고 담당관리를 보내어 국내의 제방을 보수하였다(王親祀神宮發使修葺國內堤防).”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재확인할 수 있다. 330년에 축조된 벽골제(碧骨堤)가 수도작을 위한 저수목적으로 시설되었고, 이 벽골제의 제(堤)자가 제방의 제(堤)자와 같은 것은 제방이 저수지를 뜻함을 쉽게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벽골제 이후 시제(矢堤)를 비롯하여 남천제(南川堤)·눌제(訥堤)·공골제(空骨堤)·중방제(重房堤)·축만제(祝萬堤)·혜정제(惠政堤)·청제(菁堤) 등이 모두 저수지이면서 제방을 뜻하는 ‘堤’자를 끝에 붙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방의 뜻은 이 경우 제언(堤堰)의 뜻과 같게 풀이할 수 있다. 1909년 우리 나라의 대소 제언수는 모두 2,781개였고, 몽리면적(蒙利面積)은 7,980㏊로서 1제언당 평균 몽리면적은 불과 2.9㏊ 미만의 소규모 저수지였다.
다음으로 방수를 위한 제방의 뜻은 바다의 소금기 있는 물을 막는 간척지방조제(干拓地防潮堤)의 뜻과 내륙지의 홍수나 침수로 인한 피해를 막고자 제방을 시설한 두 가지 뜻이 포함되고 있다. 1255년(고종 42)에 “3품 이하의 문무관과 권무(權務) 이상의 관리에게 명하여 장정(丁夫)들을 차출하여 제포(梯浦)와 와포(瓦浦)에 방축을 쌓아 좌둔전(左屯田)을 만들고, 이포(狸浦)와 초포(草浦)에는 우둔전(右屯田)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과 “위도(葦島)에 평탄하고 경작할 수 있는 십여리의 땅이 있으나 조수(潮水)의 환(患)이 있어 갈지 못하더니, 김방경(金方慶)이 방조제(防潮堤)를 쌓아 곡식을 파종할 수 있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으로 보아 간척이 가능한 갯땅에 방조제를 쌓았다는 것은 제방의 뜻이 방조제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다음 침수방제를 위한 제방은 <하천관리법 河川管理法>에 의한 일반적인 하천의 제방을 뜻한다. 우리 나라는 우기(雨期)인 6∼8월에 폭우가 쏟아질 때 대소 하천이 범람하여 농경지를 유실 또는 매몰하는 수재를 막기 위하여 축조하는 시설을 제방이라고 한다. 따라서 제방은 저수지의 제체, 방조제의 제체, 대소 하천의 제체 등을 총칭하는 것으로 그 시공법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공통되는 것은 흙·석재·콘크리트 등을 주재료로 하여 축조하되 그 원리는 저수량, 범람시의 수압, 파도의 높이와 바닷물의 압력 등을 감안하여 크기와 저변의 넓이, 제정(堤頂)의 높이 등을 적절히 조절하여 축조한다.
태종 15년 을미(1415,영락 13) 8월1일 (을축)
세성의 수축을 정지하고 먼저 김제군의 벽골제를 쌓게 하다.
명하여 김제군(金堤郡) 벽골제(碧骨堤)를 쌓았다.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박습(朴習)이 아뢰었다.
“성곽은 봉수(封守)를 견고히 하고 외모(外侮)를 막는 것이고, 제방(堤坊)은 수택(水澤)을 저축하고 관개(灌漑)를 통하게 하는 것이니, 실로 환난에 대비하고 가뭄을 구제하는 좋은 계책이므로 모두 폐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토공(土功)을 일으키고 민력(民力)을 쓰는 것은, 먼저 사세(事勢)의 완급을 살피어 때맞게 조처한 뒤에야 일이 쉽게 이루어지고, 백성의 원망이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 병조·호조의 청으로 인하여 김제군 벽골제와 연해(沿海) 3읍(邑)의 성을 수축할 일로 이미 교지를 내리었으니, 가을걷이를 한 뒤를 기다려서 마땅히 아울러 영축해야 합니다.
기록
평안도 용강 등지에서 수해를 입다.
평안도 용강(龍岡) 등 18개 읍이 모두 수해를 입었고, 안주(安州)·가산(嘉山)·태천(泰川)은 더욱 심하여 인가가 떠내려가고 물에 빠져죽거나 압사당한 사람과 가축들이 매우 많았으며, 황해도 장연(長淵) 등 8개 읍에도 수해가 있었다.
황해도·평안도·함길도의 수해 상황.
황해도는 수해를 당한 전토가 1천 1백 70여 결(結)이고, 평안도는 6천 8백여 결이며,함길도는 1천 5백여 결이고, 강원도는 7백여 결이었다.
함길도 관찰사가 영흥·문천·고원에 수해가 있었음을 아뢰다.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가 아뢰기를,
“영흥(永興)·문천(文川)·고원(高原) 등지에서 6월 20일부터 23일까지 큰 비가 내려 물이 불어서 표류(漂流)·익사(溺死)한 남녀(男女)가 모두 29명이고 소[牛]가 55두(頭)이고 말[馬]이 15필(匹)입니다.”
고대로부터 우리나라에는 한해와 수해의 연속적인 내습으로 농업생산에 심한 타격을 주어왔다.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저자 : 김령(金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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