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11-02 16:12
[역사] 조선시대의 도둑과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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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스토리야
조회 : 2,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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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LKH_1024 [398] |
◆ 조선시대의 도둑과 벌
일기 전체로 볼 때, 도세순이 자신의 물품을 잃은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까닭은 9월 중순에 할머니 집의 마루 밑과 다락 위에 물건을 넣고 단단히 잠근 채 할머니를 모시고 병자들을 피해 두사촌의 이인수 집으로 왔다는 기록에 근거하여서이다. 할머니의 집은 합천군 초계면이고, 이인수의 집 역시 합천군 율곡리 두사면으로 그 거리가 매우 가깝다. 즉 할머니의 물건을 잃었을 가능성이 크고, 도세순은 이것을 찾아 나선 것이다. 대략 사실을 알고 열흘 뒤 도둑을 잡으려 김올미와 노비 연금이를 데리고 나갔는데, 도둑이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를 도장(都將)에게 알려 집을 덮쳤으나 도둑은 잡지 못하고 그 가족들만 잡았다. 그 가족들을 옥에 가두고 ‘고발장’ 혹은 ‘고소장’을 제출하였는데, 관아에서 세부적으로 어떠한 조치 또는 어떠한 벌을 내렸는지 기록이 없어 모르지만 소장을 제출받고 그에 해당하는 물품을 관아에서 징발하여 돌려준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도둑을 절도 ·강도 ·와주(窩主)로 구분해서 처벌하였다.《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강도로서 사형에 이르지 아니한 자는 법대로 논죄(論罪)한 후에 ‘强盜(강도)’라고 자자(刺字:얼굴 등에 흠을 내어 죄명을 먹칠하는 형벌)하고, 재범하면 교수형에 처했으며 그 처자는 관사(官司)의 노비를 삼았다. 강도를 제 집에 붙이는 접주인(接主人, 도둑이나 노름꾼 따위 소굴의 우두머리), 또는 장물아비를 와주라 하였는데, 와주로서 죄가 사형에 이르지 아니하면 강와(强窩)라고 자자하여 전 가족을 극변(極邊, 중심이 되는 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변경)지방으로 옮기고, 3범하면 교수형에 처하였다. 절도는 도형(徒刑) ·유형(流刑) 등에 처하되 극변이나 절해고도로 보내 영구히 고을의 노비로 삼았다.
조선시대의 치도사(治盜史)를 보면 엄한 법률로도 도둑을 막지 못하였다. 세종(世宗) 때만 해도 궁중의 어고(御庫)가 털려 소란이 일어나고, 선조(宣祖) 때에도 종묘(宗廟)의 금은보책(金銀寶冊)을 도둑맞는 등 대담한 도둑도 있었다. 중기 이후 탐관오리의 작폐가 심하고 임진 ·병자의 전란이 지나자 군도(群盜)가 발호하였는데, 선조 때의 이능수(李能水) ·현몽(玄夢), 인조(仁祖) 때 살인계(殺人契)를 만든 양용부(梁龍夫) 등이 당시 기록에 남은 도둑들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도둑은 고려시대와 달리, 특히 신분상의 불만과 포악한 악리(惡吏)에 대항해서 들고 일어난 도둑떼가 있어 민중은 이를 의적(義賊)이라 부르며 동조(同調)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임꺽정[林巨正]과 장길산(張吉山)이다. 이들은 백정과 재인(才人)이라는 천민으로, 한결같이 작당하여 탐관오리를 죽이고, 그 재물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주는 등 민중의 호응을 얻어 한때 세력을 크게 떨쳤다. 임꺽정은 결국 관에 잡혀 죽었으나 재인 출신의 장길산은 힘보다는 뛰어넘는 재주 등이 비범하여 끝내 잡히지 않았다.
출전 : 용사일기(龍蛇日記)
저자 : 도세순(都世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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