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녹림의 총단.
“네?”
몽이 놀란 얼굴로 묻자 청년과 사내들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왜? 내가 북부녹림의 우두머리 패력대제(覇力大帝)라니까 깜짝 놀랐냐? 막 오금이 저리지?”
몇 십 년 전에서 왔고, 그동안 산속의 공가(空家)에서만 살던 몽은 그런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다.
“저기.... 죄송한데..... 그게....누구신지.....?”
청년은 몽의 반응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몽이 뻔히 알면서도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이 녀석이... 정말 죽으려고!”
- 챙!
청년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들었다. 몽은 청년이 칼을 뽑아들자 깜짝 놀랐다. 그러자 곁에 있던 여인이 청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오빠. 진정해. 괜히 사람 함부로 죽였다가 아버지께 혼나지 말고.”
그때 갑자기 또랑또랑 울리는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바보! 뭘 그렇게 계속 물어봐? 딱 보면 얼굴에 산적이라고 써져 있잖아?”
몽이 뒤를 돌아보니 보옥이 어느새 나타나 차가운 얼굴로 청년과 사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보옥은 불을 피워놓고는 심심해서 몽이 사냥하는 모습이나 구경할 요량으로 왔다가 청년이 몽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듣고는 달려왔던 것이다.
청년과 사내들은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고선 보옥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서....선녀?’
청년과 사내들은 보옥의 아름다운 모습과 고운 자태에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를 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청년은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웃음을 지으며 보옥을 향해 말했다.
“어..허허.. 산적이라니요. 소저. 나는 패력대제라고 하오.”
청년은 갑자기 보옥을 보더니 행동이 깍듯해졌다. 보옥은 몽과는 다르게 객잔을 가끔 오갈뿐만 아니라 천하의 정보를 가장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는 흑영단(黑影團)의 소단주였기에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아~ 그러세요? 패력대제께서는 이렇게 나이가 어린 분이셨군요?”
“하하. 내 무공이 워낙 고강하여 반로환동(返老還童) 하고 있는 중이라오.”
보옥이 무의 극에 달하면 반로환동을 한다는 것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그런 고수는 천하를 통틀어도 보옥이 알고 있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도대체 왜 자꾸 거짓말을 하는 거죠?”
보옥이 미간을 찌푸리며 재촉하자 청년은 잠시 생각하더니 보옥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소저. 저기 있는 저 녀석이 나의 사냥터에서 사냥을 하기에 잡아서 놀려주려고 하다가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되었소. 나는 패력대제의 아들 감응천이라 하오.”
패력대제는 잘 알려져 있었지만, 패력대제의 아들 감응천은 별 볼일 없다는 것 외에는 그리 많이 알려진 것이 없었다. 패력대제가 무공도 못하면서 사고만 저지르는 아들을 가능한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저는 뉘시오?”
보옥이 아무 말도 않고 감응천을 노려보고만 있자 몽이 나서서 말했다.
“아, 저기 이..”
보옥이 몽의 팔을 확 잡아당기며 말을 못하게 눈짓을 하고는 감응천을 향해 쏘아붙이며 말했다.
“이곳이 왜 댁의 사냥터인가요?”
감응천은 다른 누군가가 그랬다면 억지를 부리며 큰소리를 쳤겠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보옥이 미간을 찌푸리며 힐책하자 웃으며 사과했다.
“미안하오. 우리가 있는 곳이 이 근처인데다, 그동안 외부인의 발길이 없던 곳이라 여기 사방을 모두 나의 사냥터라고 그동안 내가 착각을 하고 살았나보오. 용서해주시오.”
“용서해달라는 사람이 칼은 왜 들고 서있죠?”
보옥이 감응천의 손에 들린 칼을 보면서 말했다. 감응천은 머쓱해하며 칼을 다시 칼집에 꽂아 넣었다. 사실 감응천은 주(酒)와 색(色)을 무척 좋아했다. 그것은 다른 녹림(綠林)의 무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유분방한 녹림집단답게 그들은 성향이 거칠었고 술과 여자를 좋아했다. 감응천의 마음 같아서는 당장 보옥을 힘으로 제압하고 재미를 보고 싶었지만, 차마 여동생이 옆에 있어서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여기서 재미를 봤다간 함께 있는 부하들에게도 보옥을 넘겨야했는데, 감응천은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오직 자신만이 보옥을 소유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일었다. 감응천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내가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한 것 같아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괜찮으시다면 우리 녹림의 총단이 근처에 있는데, 그곳에서 하룻밤 묵어가시는 건 어떻소? 내 사과하는 의미로 대접을 하고 싶은데...”
“됐어요. 우리는 그냥 우리 편하게 먹고 자면 돼요.”
“아니, 그래도 용서를 구하는 사람의 정성을 받아주는 것이 용서를 하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소? 이렇게 그냥 돌아간다면 내 미안한 마음에 어찌 잠을 이룰 수가 있겠소?”
보옥은 무공이 고강하고, 다양한 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정작 강호에 대한 경험은 많이 없었기에 적의 소굴로 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모르고, 거듭된 감응천의 요청에 마침내 응했다.
‘뭐, 갔다가 허튼 수를 부리면 혼내주고 나오면 되지 뭐.’
보옥은 좋은 음식과 술 생각도 은근히 났지만 무엇보다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좀 하고 싶었다. 보옥과 몽은 피워두었던 불을 끄고 짐을 챙겨서 감응천을 따라나섰다.
감응천은 몽이 짊어진 짐을 보고는 보옥과 몽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곁에 있는 사내들에게 하인의 짐을 좀 들어주라고 일렀다. 감응천과 사내들은 몽을 하인쯤으로 생각했다. 덩치 좋은 사내 하나가 몽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짐을 이리 줘.”
몽은 그들이 자신을 하인으로 생각하든지, 아니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다 짐을 들어준다는 것에 기뻤다. 몽은 짐을 지고 가는 것이 이제는 익숙해진데다가 몸에서 변화가 계속 일어나서 더 이상 짐이 무겁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깨에 뭔가를 메고 있다는 것이 조금 귀찮기는 했다. 사내의 말에 몽은 아무렇지도 않게 짐을 건넸다. 그런데 짐을 건네받은 사내는 몸을 휘청거리며 놀랐다.
“어..엇!”
곁에 있던 사내가 넘어지려는 사내의 몸을 받쳐주고서야 겨우 중심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사내는 속으로 생각했다.
‘뭐야? 이 녀석. 거뜬하게 들고 있기에 가벼운 줄 알았더니, 엄청 무겁잖아?’
“뭐야? 왜 그래?”
곁에 있던 동료가 물었지만 사내는 몽의 여린 모습을 보고는 부끄러워 무거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 아냐. 아무것도. 다리를 헛디뎌서 그래.”
그들은 그렇게 다 같이 중원 북부지역 녹림의 총단으로 향했다. 녹림(綠林)은 크게 초(楚)나라와 제(齊)나라에 걸친 남쪽의 녹림과 진(秦)나라, 조(趙)나라, 연(燕)나라에 걸친 북쪽의 녹림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가운데 있는 한(韓)나라와 위(魏)나라는 남쪽의 녹림과 북쪽의 녹림 누구도 자신의 영역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었는데, 그래서 그곳 두 나라에서는 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패력대제 감항은 얼마 전 위나라에서 제법 크게 일어난 남부 녹림과의 다툼을 중재하기 위해서 총단의 인물들을 이끌고 떠나서 총단에는 사람들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보옥과 몽 그리고 감응천의 일행은 녹림의 총단에 곧 도착했다. 보옥과 몽은 녹림의 총단에 도착하자 깜짝 놀랐다. 걸어서 총단으로 향하는 동안 나무 위에다가 곳곳에 마치 동물의 집처럼 작은 초소들이 볼품없이 지어져 있기에 총단 역시 건물이 그리 볼품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거대한 저택에 삼층 누각(樓閣)까지 지어져 있었고, 커다란 연못과 작은 동산도 있었다.
감응천은 보옥과 몽이 서로 떨어진 방을 사용하게 하려고 했지만 보옥이 너무도 완강히 요구를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나란히 붙은 방 하나씩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흥. 방해가 된다면 죽여 버리면 그만이지. 크흐흐.’
감응천은 혹시라도 몽이 자신이 꾸미는 음흉한 계획에 방해가 된다면 가차 없이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목욕을 좀 하고 싶은데, 따뜻한 물을 준비해 줄 수 있나요?”
감응천의 여동생이 나서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런데 너는 안 씻니?”
감응천의 여동생이 땟물이 잔뜩 묻은 몽을 보며 말했다.
“뭐. 어차피 씻어봤자 갈아입을 옷도 없고.... 이렇게 꾀죄죄한 모습일 텐데요 뭘. 헤헤. 괜찮아요.”
감응천의 여동생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내가 입을만한 옷을 가져다 줄 테니까 너도 목욕해. 네가 목욕할 따뜻한 물도 준비해놓으라고 일러둘 테니까.”
“네? 아, 네..... 고맙습니다.”
몽은 지금까지 냇가에서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고 씻은 적은 있어도, 단 한 번도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귀족들이나 누리는 사치였던 것이다.
‘우와. 내가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몽은 생전 처음으로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게 될 생각에 무척 들떴다.
몽과 보옥이 짐을 풀고 목욕을 준비하는 동안 감응천은 누각에 좋은 술과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차리라고 일렀다.
보옥은 오랜만에 따끈한 물에 몸을 씻고 가져온 짐에서 새 옷을 꺼내어 갈아입고 나니 아주 상쾌했다. 몽이 오면 함께 나가려고 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자, 보옥은 먼저 나가서 정원을 둘러보았다. 예쁜 꽃들과 나무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고, 연못에는 아름다운 빛깔의 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제법 잘 꾸며놓았네?’
보옥이 둘러보고 있는데, 저쪽에서 감응천과 감응천의 여동생이 다가왔다. 감응천이 보옥을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소저께서는 다 씻으셨소?”
보옥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네. 덕분에요.”
보옥이 깨끗이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그 자태와 용모가 더욱 곱게 보였다. 보옥의 몸에서는 은은하고 좋은 향기도 흘렀다. 감응천은 그런 보옥의 모습에 눈이 황홀해지며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겉으론 태연한척 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출출하실 텐데, 누각으로 올라가 음식을 드십시다.”
“아직 제 일행이 오지 않아서...”
“아. 그 친구는 원래 목욕을 그렇게 좋아했소? 하인들의 말로는 물통 속에서 도대체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몽이? 목욕을 좋아한다구?’
몽이 목욕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보옥이 알리가 없었다. 보옥은 뭐라 말하기 그래서 대충 얼버무렸다.
“뭐. 할 만큼 하다가 오겠죠. 그럼, 천천히 오게 놔두고 우리먼저 올라가죠.”
“그럽시다.”
보옥과 감응천 그리고 감응천의 여동생은 함께 삼층 누각에 올랐다. 누각에 오르니 녹림 총단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고, 멀리 숲이 펼쳐져 있는 것도 훤히 보여서 전망이 무척 좋았다.
그곳에는 각자 먹을 음식과 술이 올려져있는 상이 네 개 놓여 있었는데 한 사람이 먹을 상 치고는 상이 제법 컸다.
“약소하지만, 맛있게 드시면 좋겠소.”
감응천은 상을 푸짐하게 차려놓고서도 인사치례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보옥은 짧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감응천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감응천과 감응천의 여동생은 맞은편에 놓인 상에 나란히 앉았다. 감응천이 먼저 말했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드리오. 참, 인사가 늦어 죄송하오. 이쪽은 나의 여동생 여희라고 하오.”
여희가 웃으며 보옥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녹림여자 감여희랍니다. 호호호.”
감여희는 녹림의 여자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전혀 산에서 거칠게 사는 녹림의 여인답지 않게 얼굴이 뽀얗고 귀여웠다. 보옥은 여희의 옷차림이나, 하는 행동을 보고는 아주 자유분방한 성격일 거라 짐작했다. 감응천은 마치 자신은 성인군자라도 되는 양 의젓하게 행세하며 보옥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제 동생이 아버지도 감당하지 못하는 말괄량이라서 가끔 언행이나 품행이 단정치 못하더라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괜찮아요. 오히려 발랄해서 좋아 보이는데요?”
“호호. 그렇게 봐줘서 고마워요.”
감여희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소저께서는 어디에 사는 뉘신지요?”
감응천히 공손히 물었지만, 보옥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냥 진(秦)나라에 살고 있는 황 아무개라고만 알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자 감응천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아직 화가 덜 풀린 거요? 아니면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는 거요?”
보옥이 아무런 말없이 생긋이 웃고만 있자 감응천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좋소. 소저께서 말을 꺼내기 싫으면 나도 더 재촉하지는 않겠소. 하긴, 그런 게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좋은 자리에 함께 어울리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요. 자, 한잔 하십시다.”
보옥과 감응천 그리고 감여희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셋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누각 아래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발소리가 났다. 저벅저벅 올라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마침내 누군가 삼층 누각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웬 준수한 용모의 사내가 나타났는데, 보옥은 그 사내의 곱고 환한 얼굴에 잠시 넋을 잃었다.
‘누...누구지? 이런 사람이 녹림에....’
그런데 갑자기 그 사내가 보옥의 곁에 마련된 비어있던 한 자리에 얼른 앉으며 보옥을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죄송해요. 조금 늦었네요.”
보옥은 그의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모....몽?’
갑자기 보옥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