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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이사님~ 제발 그것만은...
작가 : 라미루이
작품등록일 : 2020.8.1

일년전 사별한 남편이 꿈속에 나타나기만 하면 분위기가 요상해져..이를 어쩌지..잠을 안 잘 수도 없고..남보다 생생한 꿈을 꾸는 시아 엄마
"정이수"의 꿈과 현실을 오가는 처절한 생존 육아 분투기. 얼마 전부터.. 귀가 간질간질.. 아이들 속마음까지 들리는데. 과거 계약연애를 했던 이사님은 늘찬 아빠가 되어 나타나고. 이사님과의 좌충우돌 티키타카는 현실이라네~
#꿈환상공포호러판타지 #여주히어로 #여주사이다 #이사님은엉뚱찌질집착파트너 #무궁무진스토리 #로코물 #재회물 #육아물 #이세계모험물
ramilui5058@gmail.com

 
3. 덥썩 물어볼 만한 미끼라니?
작성일 : 20-08-01 17:30     조회 : 49     추천 : 0     분량 : 7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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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화이트 스크린에 띄워진 파워포인트 화면이 달뜬 얼굴을 비춰주는 조명 역할을 한다.

 

 LED 조명이 꺼지고, 커다란 창을 가리는 블라인드가 내려진 회의실은 어둠이 내려앉아 암실을 방불케 하고..

 

 하태오의 입술은 그녀의 살며시 벌린 입술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술 냄새 진동할 텐데... 괜찮나 모르겠네?

 

 그래도 1층 화장실에서 가글하고 올라온 거야."

 

 (그래서 위스키 냄새에 간간이 민트향이 올라온 거였구나.)

 

 이수는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는 신경 쓰이는 장애물 하나가 제거되었다는 안도감에

 

 가슴골 깊이 내려간 오른손으로 봉긋하게 솟은 맨가슴을 공략하려 한다.

 

 그 바람에 그녀의 옅은 아이보리색 블라우스..

 

 두 번째 단추가 떨어질 듯 위태롭게 당겨졌다.

 

 제대로 발정난 수컷의 동한 마음에 술기운까지 더해졌으니

 

 손아귀에 들어온 하늘하늘거리는 블라우스쯤이야 우악스럽게 잡아 양쪽으로 뜯으면 그만이리라...

 

 하지만 강한 거부 의사를 보이지 않고, 순순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발그레한 양볼을 바라보며 그는 이 게임을 좀 더 천천히,

 

 템포를 한 박자 늦춰 끌고 가기로 했다.

 

 태오의 손은 꾸물거리며 굴곡진 몸을 휘감아 내려가는 치명적인 독사처럼..

 

 배꼽 위를 스치듯 지나더니 진회색 스커트 안쪽 매끄러운 허벅지를 탐한다.

 

 날선 사내의 손톱으로 허벅지의 안쪽, 보드라운 피부를 쓸어내리자,

 

 그녀는 깊이 숨겨진 치명적인 약점을 들켜버린 암사슴처럼 간드러진 신음 소리를 내지른다.

 

 (이, 이대로는 여기서.. 일을 치러버릴 거 같아.

 

 오늘따라 왜 이리 달뜨고, 흥분하는지...

 

 출근길부터 온몸에 열이 오르고 그러더니.. 오늘이 그 '위험한 날'이 아닌가 싶어.)

 

 

 귓가에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리는 사이렌 소리.

 

 바깥 어딘가에 불이 났을까?

 

 누군가의 어리석은 불장난으로 인한 불.

 

 그녀의 머릿속에 뒤늦게 경고등이 깜빡거린다.

 

 또 다른 음성이 귓가를 치고 들어오는데..

 

 (.. 500미터 전방에 과속 카메라가 있습니다.)

 

 친숙한 네비의 경고음이 이어지고..

 

 (뭐해?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줄일 타이밍이야.)

 

 

 "이, 이사님, 이러시면...

 

 나중에 제 얼굴 어찌 보시려고..."

 

 그녀는 헐떡이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반쯤 감았던 눈을 살포시 뜨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정 팀장은 나랑 끝까지 가야지. 새삼스레 그런 얘기 해서 뭐하려고?"

 

 그는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 '끝까지'라는 말에 힘을 주어 속삭이듯..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곧이어 허벅지에 파고든 손이 그녀의 중심부로 향하자 검정 스타킹을 바짝 올려 신은

 

 가느다란 다리가 바싹 오므려지며 긴장한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는 한,

 

 이대로는...)

 

 그 순간, 노트북의 파워포인트 화면이 깜빡하며 스크린세이버 기능이 동작한다.

 

 그녀의 업무용 노트북에 저장된 사진 중 한 장이 회의실 앞에 걸린 두루마리 스크린에 크게 표시된다.

 

 한없이 밝게 웃는 이수와 그녀를 뒤에서 감싸 안고, 살짝 기울인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희준의 사진.

 

 태오는 사진이 눈에 들어오자 먹잇감을 놓치지 않고 궁지로 몰아넣는 집요한 움직임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때다!)

 

 이수는 재빨리 의자에서 일어나 풀어 헤쳐진 블라우스와 반쯤 말려 올라간 스커트를 정리하고는

 

 회의실 밖으로 뛰쳐나가려 한다.

 

 당황한 태오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한쪽 팔을 잡아채

 

 넓은 가슴팍으로 밀착하며 감싸 안는다.

 

 "이러지 마세요! 이사님..."

 

 "이사님이라고 부르지 마. 여기서는..."

 

 "그럼 뭐라고 부르나요? 회사에서..."

 

 그는 순간 말문이 막힌다.

 

 그들은 일로 맺어진 사이가 아닌가?

 

 엄연히 그는 직속상관으로서 그녀를 리딩해야 하며, 그녀는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고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공동의 업무 목표 달성을 위해 일정 거리를 두고 지켜봐야 하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가슴에 안긴 그녀의 눈동자는 보름달이 휘영청 뜬 깊은 우물과 같이

 

 온몸을 던져 풍덩 빠져들고 싶은 그런 존재로 다가왔다.

 

 이미 맑은 물이 담긴 사기 그릇은 엎어졌고, 쏟아진 물은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다.

 

 (하태오!! 여기서 애매하게 물러나면 안 돼.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으라고.

 

 용기를 내서 저 멀리 날아가려는 그녀를 네 곁에 머무르게 해.)

 

 "오랫동안 지켜봤어. 당신을...

 

 이제서야 내 진심을 말하게 되다니..

 

 정 팀장, 당신을 사랑한다고..."

 

 '사랑'이라는 말에 그녀의 맑고 깊은 동공이 회오리치며 커지는가 싶더니,

 

 여자의 본능적인 경계 의식이 발동하며 순식간에 암흑에 잠긴다.

 

 (이건 순진해 빠진 멜로드라마도 아니고 순정 영화도 아니야.

 

 내가 누구야?

 

 10년을 버텨 온갖 경쟁자 물리치고, 이 자리까지 올라온 정이수 팀장이라고...

 

 누굴 날로 먹으려고 그래..)

 

 

 "사랑이라는 말, 전 믿지 않아요. 10년 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제가 순진한 학생은 아니잖아요.

 

 솔직히 이사님은 지금 술기운 때문에 잔뜩 흥분한 상태인데다...

 

 평소에 바람둥이로 유명한 분인데..."

 

 "바람둥이? 3년 넘게 같이 일한 김 비서랑 무슨 썸이라도 타는 거 봤어?"

 

 '바람둥이'라는 말에 발끈하며 그녀의 둥근 이마에 드리워진 머리칼 몇 가닥을 손으로 넘겨준다.

 

 동그란 귓등에 그의 손길이 스치듯 닿자 잠잠해지나 싶은 그녀의 허벅지 깊은 곳이

 

 바짝 긴장하며 오므라든다.

 

 태오의 가슴을 힘껏 밀어내는 양손의 힘이 살짝 풀어지는 듯 싶지만, 흐려지는 눈동자에 바짝 힘을 주어

 

 한 올 한 올 풀려나간 이성의 끈을 다잡는다.

 

 (이 년아. 정신 못 차리지?

 

 발정난 암캐처럼 질질 끌려 다니지 말고...)

 

 "그건 김 비서가 인물이 좀 딸려서 그런 게 아닌가요?

 

 회사에 이쁜 신입이 들어오면 이사님 품에 안겨야 살아남는다는 소문이 쫘악..."

 

 "..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건 나처럼 젊은 사람이 이사 자리에 오르니..

 

 깎아내리고 음해하려는 악의적인 루머라고..."

 

 "아무튼 전 이사님 믿음이 안 가요.

 

 업무적으로는 신뢰가 가지만 그 이상의 남녀 관계를 원한다면 전 모르겠어요."

 

 더 이상 대화를 길게 끌어봤자 해피한 결론이 나지 않을 듯한 예감에..

 

 그는 시선을 돌려 스크린을 바라본다.

 

 한강이 보이는 연초록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앉은 두 남녀의 웃음.

 

 "저 남자는 애인?"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사귄 지는 오래되었나?"

 

 마주 보는 눈이 한번 깜박인다.

 

 역시나 예스의 표현...

 

 "평소에 남친과 만나는 걸 못 본거 같은데 계속 야근만 하고. 연락도 안 하는 듯하고..."

 

 "그, 그게..."

 

 스크린의 사진이 서서히 페이드 아웃되고 새로운 사진이 나타난다.

 

 홀로 서 있는 희준이 브이자를 그리며 활짝 웃는 사진.

 

 뒷배경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구글 플렉스...

 

 비스듬히 기울어진 "Google" 사명이 눈에 들어온다.

 

 "오! 마운틴뷰... 저기 직원인가?

 

 단순 견학 간 건 아닌 거 같은데?"

 

 "맞아요. 입사한 지 1년 정도..."

 

 "당신 닮아 능력 있는 남친이네. 저 좋은 회사를 다니는 걸 보니..."

 

 그를 올려다보며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럼 뭐하나? 멀리 떨어져 있는데 연락도 뜸한 듯하고,

 

 이런 미인을 매일 야근만 하게 하고, 무심하게 방치하다니...

 

 남친으로서 직무유기 아닌가?"

 

 "직무유기",

 

 맡은 일이나 책임을 다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

 

 마지막 말이 송곳처럼 날아와 그녀의 가슴에 사정없이 박힌다.

 

 사실 그랬으니까.

 

 1년 전, 희준은 구글 본사 최종 면접에 합격했다고 좋아하더니 얼마 안 되어 캘리포니아로 멀리 떠났다.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하루가 멀다 하고 카톡을 울리던 메시지는 갈수록 뜸해졌고,

 

 최근에는 이수가 "뭐하고 지내?", "별 일 없어?" 하고 물어도 한참 지나서

 

 "바뻐.. 잠깐만...", "그냥 있지"와 같은 무뚝뚝한 답장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하루하루 일에 저당 잡혀 사는 월급쟁이 인생의 일상 연애사가 별거 있나?

 

 숫기러기는 저 멀리 날아가버렸고, 홀로 남은 암기러기는 별다른 낙도 없이 매일 야근만 하는 무료한 나날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이사님과 단 둘이 남은 회의실에서 그만, '돌발 상황'이 터져버린 것이다!

 

 "그럼 우리.. 이렇게 할까?"

 

 태오는 긴 손가락을 뻗어 노트북의 스페이스바를 톡 두드리더니 파워포인트 화면을 띄웠다.

 

 한순간 사라지는 직무유기 남친의 독사진.

 

 PPT 페이지 제목에 선명히 표시되는 "아웃소싱 계약 협의에 관한 재고 요청" 문구.

 

 궁금증이 차오르는 이수의 눈동자는 댐으로 둑을 막은 듯 넘쳐버릴 듯했다.

 

 "그럼 우리.. '계약 연애'하는 건 어때?

 

 지금 남친보다는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래, 나한테 연애 사업을 아웃소싱하는 거야..

 

 단, 한시적으로.. 비밀리에 말이야."

 

 순간, 그녀는 자신이 최근 즐겨보는 TV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계약 연애라니..

 

 아웃소싱이라니..

 

 이게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인가?

 

 하지만 눈 앞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이사님의 심각한 얼굴은 중요한 회의 때 자주 보는 진지한 표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그럼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는 건가요?"

 

 무심코 나온 자신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그녀는 동공이 지진을 일으킨 듯

 

 크게 흔들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냉정을 되찾았다.

 

 "그럼 써야지. 계약서 문구는 당신이 정해.

 

 연애 기간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신이 <갑>이고, 난 <을>이야.

 

 을은 갑이 원하는 대로 할 의무가 있지.

 

 난 당신의 남친이자 애인으로써 연애 업무를 할 수만 있으면 돼.

 

 당신은 그런 날 거부하지 않을 의무가 있고... 오케이?"

 

 거대한 댐이 붕괴된 듯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그의 말을 듣다가 갑과 을이라는 말에 '피식' 옅은 웃음이 새어 나오는데..

 

 (계약서 문구도 내가 정한다 이건가?)

 

 얼마 전 일본을 휩쓴 대지진으로 인해 일본 지사 매출이 급감한 나머지 회사의 사정이 어려워져

 

 과차장급의 정리해고가 시간문제라는 흉흉한 소문이 사내에 쫙 퍼진 뒤였다.

 

 아무리 날고 기는 회사의 핵심 인재이자 엘리트인 정 팀장이지만 더 이상 평생 직장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만약에 대비한 '에어백' 하나 정도는 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

 

 (어쨌든 이 상황에서는 가늘고 길게 버티고,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거야!

 

 안 그래? 안 그렇냐구?)

 

 하지만 속마음을 숨긴 채..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수는 이내 그의 품에서 벗어난다.

 

 회의실 안을 서성거리며 스크린을 바라보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는데...

 

 벌써 밤 11시가 훌쩍 지났다.

 

 자정이 되면 보안요원이 나타나 소등을 하고, 야근자 명단을 확인할 테지..

 

 (그때까지 어떻게든.. 결판을 내야 해!)

 

 "저와 끝까지 간다는 아까 그 말... 진심인가요?"

 

 "그, 그럼, 그렇고 말고... 내 말 믿지 못하는 거야?"

 

 "연애 계약을 맺는다면.. 계약서를 써야 한다면...

 

 제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그런 제안을 해 주세요.. 이사님!"

 

 이수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말에 태오는 남보다 먼저 회사의 정상까지 올라온 승부사의 직감으로

 

 저 굶주린 암사자에게 던져 줄 먹잇감이 번뜩 떠올랐다.

 

 "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

 

 정 팀장, 그렇다면 당신의 직속상관으로서..

 

 이번 상반기 인사 고과를 S 등급으로 보장해 주지..."

 

 그는 정이수 팀장의 직속 실장이자 이사를 겸직하고 있었다.

 

 그녀의 1차 평가자이자 2차 평가자인 셈...

 

 (고 아니면 여기서 스톱? 난 더 이상을 원해!! 아직 배가 고프다고...

 

 일생 일대의 찬스를 앞두고 망설일 수는 없지.

 

 못 먹어도 Go!)

 

 "이사님, 만약 제가 지금 공석인.."

 

 "고, 공석?"

 

 "기술전략실 '실장' 자리를 원한다면.. 이사님 마음이 바뀔까요?"

 

 "그, 그건 좀 과한 요구인데.."

 

 짙은 눈썹을 한껏 모으고, 난처한 표정을 짓는 태오.

 

 (절대 물러서지 마. 정이수.

 

 상대가 망설이고 뒷걸음 칠 때.. 목덜미를 확 물어 뜯으라고..)

 

 "전 지금 곁에 멀쩡히 살아 있는 애인도 있고, 만약에 이사님과 연애 중이라는 게 탄로 나면..

 

 혹시나 계약 연애 중에 이사님이 한 눈을 팔고, 바람을 피우기라도 한다면..

 

 누가 더 리스크가 클 지는.. 뻔히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비틀거리는 하태오를 넉다운시킬 결정타를 준비하는 이수.

 

 "그리고 저는 1년 안에 일본을 시작으로 미국, 중국까지 글로벌 핵심 서비스를 성공적으로 런칭할 테고..

 

 사실 상 차기 실장 자리는 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사실..

 

 이사님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나요?"

 

 "그, 그렇긴 하지. 정 팀장 외엔..

 

 마땅히 '그 자리'에 앉을 인물이 보이지 않긴 해."

 

 "그럼 이사님, 재차 말씀 드리지만 제가 덥썩 물어볼 만한 먹음직스런 미끼를 던진다면

 

 이번 계약 건.. 긍정적으로 고려하겠습니다!"

 

 그녀의 앞을 서성거리며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잠시 고민하던 하태오 이사.

 

 잠깐의 심사숙고 끝에 결심했다는 듯 발걸음을 멈추고는..

 

 "다, 당신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이겠네.

 

 다음 평가 최고 등급에 내가 겸직 중인 '실장' 자리까지 조건으로 내걸도록 하지.

 

 이번 계약 밀어붙이자고!"

 

 태오는 순간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그녀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을 만한 조건 아니 미끼를 내걸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회의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A4 용지 한 장을 들이밀었다.

 

 "좋아요, 받아들이겠어요. 그럼 이사님이 계약서를 작성해서 제게 전해 주세요

 

 계약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즉시 반려하겠어요. 알겠나요?"

 

 상황이 묘하게 역전된 듯 하지만 다 차려진 밥상을 확 엎어버릴 수는 없기에

 

 그는 심호흡을 하고는 백지를 받아 들었다.

 

 "좋아, 내일까지 전해주지...

 

 계약 성립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우리 키스나 할까?"

 

 썩어가는 술냄새와 걸걸한 사내 냄새가 섞인 채 들이대는 그의 얼굴을 살짝 피한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오른손을 펼쳐 내밀었다.

 

 "이사님, 우리 회사에서 잘 나가는 엘리트답게 잘해봅시다.

 

 초스피드로 임원 자리에 오르신 분이니 연애 사업도 잘하시겠지요?"

 

 당찬 그녀의 반응에 살짝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자세를 고쳐 잡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상대의 오른손을 맞잡아 악수를 했다.

 

 마치 존중받아야 마땅할 핵심 사업 파트너를 만난 것처럼...

 

 회사에서 정한 직급을 넘어 연애 사업의 갑과 을로서 힘겨루기를 시작한 두 남녀가 계약 기간을 무사히 채울 수 있을까?

 

 그날 회의실의 모든 대소사를 묵묵히 지켜본 스크린이 막을 내리듯 "위잉" 소리를 내며 차곡차곡 말려 올라간다.

 

 야심한 밤은 그리도 속절없이 흐르고 또 흐르더라.

 

 

 *****

 

 <현재. 정이수의 딸 시아의 입학식>

 

 

 (그래, 그때가 진정한 화양연화였지. 제일 잘 나가던 시절..

 

 그런데 지금은...)

 

 이수는 걷잡을 수 없는 회한에 빠져 연단에 서서 지루한 개회사를 이어가는 머리가 반쯤 벗어진 교장을 바라봤다.

 

 딱딱한 철제 의자에 앉아 몸을 비비 꼬며 갑갑해하는 아이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는 친구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하고, 장난을 치는 아이들도 있다.

 

 엄마들 무리에서 벗어나 자신에게로 천천히 다가오는 태오를 응시한다.

 

 (저 인간도 그때를 돌이켜 아름답다고 기억할까?

 

 아니면 괜한 일을 저질렀다고 후회막심일까?

 

 혹시, 밤 중에 이불킥하면서 엄청 후회하는 거 아니야?)

 

 살짝 어이없는 생각에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 때,

 

 뚜벅뚜벅 다가온 태오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녀 곁에 나란히 서는데..

 

 

 

 

 

 - 3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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