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일곱 살이 되는 딸아이에게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으냐고 물어보니 그 조그만 입술을 열어 야무진 표정으로 궁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다.
여식이 이리 궁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뻔했다. 아직 어린 막내 동생을 놀려주기 좋아하는 형제들이 궁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 것이다.
윤 승상은 참으로 난감했다. 연에서 제일 높은 승상의 자리에 위치해 있으니 데려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혹여 갔다 왔다가 나중에 궁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말을 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윤 승상은 자식들 중 아무도 궁 안의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오랜 세월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윤 승상은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딸아이에게 다른 것은 원하는 것이 없냐고 다시 물어보았으나 고개를 양쪽으로 저으며 오직 궁에 가고 싶다고만 했다.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하자 아이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윤 승상은 한동안 그 울음소리를 외면하였으나 결국 단식까지 하고야 마는 아이의 고집에 두 손을 들었다.
어떠한 명분으로 데려가야 할지 고민하던 중 황제폐하가 공주의 예동을 찾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황제폐하는 공주와 비슷한 나이의 여식을 찾았고 마침 윤 승상의 딸이 공주와 동갑이라는 걸 안 황제폐하께서는 당장 여식을 데려오라고 했다.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딸아이는 어찌하든 궁 안에 발을 들여놓을 운명이었던가.
마음이 편치 않고 다가올 미래가 두려웠지만 폐하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법. 천천히 다가오는 날짜에 맞추어 아이를 데리고 입궐했다.
윤 승상의 마음 따위야 아직 천진난만한 아이가 알 리는 없었다.
‘설마 진정으로 소원을 들어주실지 모르고 반쯤은 포기하였는데 이리 궁 안으로 발을 들여 놓을 줄이야.’
가마에서 내려 궁 밖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신기하게 쳐다봐준 후 황궁 안에 있는 다리인 세연교를 지났다.
세연교 밑에는 연못의 맑은 물이 푸르게 차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여러 마리의 크고 작은 잉어들이 헤엄을 치며 물속을 노 다녔다.
그 작은 것 하나에도 신기하게 여기는 아이를 바라보며 윤 승상은 조금이나마 착잡한 마음을 달랬다.
윤 승상은 먼저 아이를 데리고 황제가 계시는 의화전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의화전에 당도하여 환관에게 눈짓을 보내자 환관은 고개를 숙여 황제에게 고했다.
“폐하, 윤 승상과 그의 여식이 당도했사옵니다.”
“들라하라.”
문이 열리자 안에서 풍겨 나오는 엄숙한 분위기에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윤 승상의 옷자락을 꽈악- 붙잡았다.
“폐하, 신이 부름을 받고 왔사옵니다.”
“앉으시오. 내 편하게 말할 것이니. 이 아이가 승상의 여식이오?”
“예. 소신의 막내여식이옵니다.”
황제는 윤 승상의 뒤에서 빼꼼히 얼굴만 내밀고 있는 아이를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앞으로 나와 폐하께 인사를 올려야지.”
아비의 부름에 아이가 앞으로 나와 몸을 숙이며 냅다 절을 했다.
“폐하를 뵈옵니다.”
그 모습이 공주와 닮은 것 같이 느껴진 황제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름이 무엇이냐.”
진중하지만 두려워보이진 않게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는 궁에 들어서기 일주일 전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터, 외웠던 것을 잊지 않고 말했다.
“소녀는 윤 백아라 하옵니다. 일백 백에 사랑할 아를 쓰옵니다.”
“과연 좋은 이름이구나.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
“세상에 모든 것을 보듬어주고 사랑하라는 의미라고 하셨습니다.”
딸아이의 대답에 윤 승상은 뒤에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제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다음, 백아에게 웃어주었다.
“공주에게 좋은 예동이 되어 주거라.”
여기서부터는 준비한 대답이 없었다. 백아는 생각나는 대로 궁금한 것을 대뜸 물어보았다.
“근데요……. 공주마마랑 친하게 지내면 궁에 계속 올 수 있는 거예요?”
천진난만한 아이의 질문에 황제도 윤 승상도 잠시 당황했다. 곧이어 황제는 개의치 않고 말똥말똥한 백아의 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왜, 궁에 계속 오고 싶으냐?”
황제의 물음에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리하거라. 공주와 친하게 지내만 준다면 언제든지 와도 좋다.”
“감사합니다. 폐하.”
셋째 오라버니에게 들은 이야기가 맞았다. 오라버니가 그랬다. 세상을 살아가기에 우리는 아직 어리니 서로간의 거래가 필요하다고 했다.
어른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들어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면 된다고 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윤 승상은 앞날이 걱정이 되어 골치가 아팠다.
궁을 저리도 좋아하니 나중에는 아예 궁에서 살고 싶다고 하지 않을까 하여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때였다.
“폐하, 공주마마 드셨사옵니다.”
“마침 왔구나. 어서 들라하라.”
그 소리에 미닫이 식으로 되어있는 장지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공주인 린이 유난스럽게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웃으며 물었다.
“아바마마, 부르셨어요?”
“그래. 아비가 너를 위해 동무를 불렀느니라.”
그제야 린은 옆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앞으로는 이 아이가 일주일에 한 번씩 궁으로 와서 공주와 놀아줄 것이야. 공주는 아비가 약조한 대로 말을 들어주었으니 더는 투정을 부리지 말거라. 알겠느냐?”
“예. 알겠사옵니다.”
동무가 생긴 것이 그렇게 기뻤는지 린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백아는 나가서 놀자는 린의 말에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괜찮다는 아버지의 말에 폐하께 인사를 올리고 린을 따라 의화전을 나왔다.
백아는 공주의 처소인 수인궁으로 갔다.
의화전만큼은 아니지만 공주의 처소답게 나름대로 꾸며진 수인궁은 어린 백아의 눈을 황홀하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벌써부터 눈이 신기한 것을 보는 듯 초롱초롱 거리고 있었다.
***
백아는 린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형제들 중에서 막내였던 백아와 공주로 자라났던 린은 동갑내기 동무는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수인궁 내를 돌아다니면서 서로를 잡으려고 애쓰다 이내 지쳤는지 다양한 꽃들이 피어난 화원에서 잠시 앉아 쉬고 있었다.
“나 이렇게 재밌었던 적은 처음이야.”
한참을 숨을 고르다 린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자 린이 방긋- 미소 지었다.
“나도 그래. 오늘처럼 신났던 적이 없었어.”
“공주마마, 송구하오나 오황자마마와 팔황자마마가 오셨나이다.”
공주인 린의 처소를 지키고 있던 최 상궁이 조심스럽게 고했다. 그 소리에 백아와 린이 뒤를 돌아보았다. 린은 두 아이가 익숙한 듯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어? 여긴 웬일이야?”
“새삼스레 웬일은. 공부 다 끝났으니까 놀자고.”
황자들이었다. 백아는 궁에서 처음 보는 남자아이들을 보곤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
초록색의 저고리를 입고 마고자를 걸친 오 황자와 파랑색의 저고리만 입은 팔황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으이구~ 강이 네가 그럼 그렇지. 아, 오라버니 강아. 인사해. 아바마마가 붙여주신 내 동무야.”
린의 소개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어색한 듯 백아는 뒤로 주춤거리며 긴장했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팔황자가 백아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난 예 강이야. 넌 이름이 뭐야?”
옆에 있던 린이 손뼉을 치며 물었다.
“맞아. 나도 모르는데.”
이곳에 있는 아이들 중 가장 연장자인 오황자가 린의 머리를 툭- 쳤다.
“동무라면서 이름도 모르는데 그게 동무냐.”
“아씨, 그만 좀 때려. 미안하다고. 오라버니는 맨날 그래.”
린이 툴툴거리며 오황자에게 말했다. 그 모습에 백아는 풋-하고 웃어버렸다. 재밌었다. 이렇게 즐겁게 논적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늘이 유난히도 파란 빛깔이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정다운 이야기가 오고 갔고 그 속에서 백아는 미소를 지었다.
바람이 저 한쪽에서 살랑살랑 거리며 불어오자 백아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기고는 웃으며 말했다.
“난 백아야, 윤 백아.”
***
일주일에 한 번씩 궁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즐거웠다. 궁에서만큼은 시끄럽게 쫑알거리는 시녀의 잔소리도 없었고 같은 또래아이들이 많았다.
세연교에는 공주의 직속상궁인 최 상궁이 가마를 끌고 마중 나와 있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최 상궁의 도움을 받아 가마 안으로 들어갔다.
옥구슬이 줄줄이 맺어있는 주렴을 매만지며 백아는 가마에서 내리길 기다렸다.
수인궁 정문에 이미 나와 있는 린을 보고 백아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둘은 저번에 가보기로 한 황실정원인 화경원으로 향했다.
화경원 사이사이를 둘러보다 폭포인 화용지의 찬란한 물소리를 듣기 위해 안쪽으로 나아갔다. 화용지의 아름답고 폭포가 굽이치며 흘러내리는 모습을 지켜본 백아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처음이었다. 이리 아름다운 폭포를 본 것은. 굽이굽이 치며 쏴아아-하고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마음 속 어두웠던 소리마저 씻겨주는듯 했다.
“어때? 여기 너무 아름답지?”
옆에서 린이 의기양양하게 자랑을 해댔다.
“우와…… 너무 예쁘다.”
초록빛의 많은 소나무들이 장관을 이루고 물살이 절벽에서 빠르게 바위 사이로 흘러내리는 그 경관은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역시…… 부러워.”
“뭐가?”
“넌 여기서 사니까 이런 것을 매일 볼 수 있고……. 나도 여기서 살고 싶다.”
결국 윤 승상이 염려하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제일 두려워하던 그 말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저 궁 안의 모습과 또래 친구가 있어 좋았던 백아는 그 안에 숨겨진 어두운면 까지는 알지 못했다.
“음…… 그럼 말이야. 너도 재녀선발에 참가해봐. 거기서 비빈으로 뽑히면 궁 안에서 살 수 있어.”
“그게 뭐야?”
“나도 자세하게는 몰라. 그냥 거기서 뽑히면 궁에 살 수 있대. 나인들 말로는 거기서 뽑히는 게 집안에 경사가 난거래. 그만큼 다들 되고 싶어 하는 거겠지?”
나인들에게서 엿들은 말로 대충 설명해준 재녀선발은 엄연히 달랐지만 백아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때 물이 흘러내리는 반대쪽 수풀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누가 그렇다고 하냐?”
말소리에 깜짝 놀란 백아와 린이 뒤돌아보았다. 소리를 낸 것은 오황자였고 그 옆으로 이황자와 칠황자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아, 진짜. 윤이 오라버니! 놀랬잖아.”
“뭘 그렇게 놀래. 근데 아까 그 말 무슨 말이야?”
“뭐가?”
“재녀선발에 뽑히는 게 경사가 난 거라며? 이게 어디서 잘못된 말을 듣고 와서 퍼뜨리고 있어.”
“그래. 린아, 공주가 그리 이상한 말을 해서 되겠니. 이 아이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이황자가 백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잘못된 거야? 그럼 원래는 어떤 건데?”
백아가 당당하게 물어보자 예의를 중요시 여기는 칠황자가 저지를 했다.
“너는 왜 계속 하대를 하는 것이냐? 우리는 황자들이고 넌 한참 아래 신하거늘. 형님, 이것 보세요. 린의 동무라고 계속 예뻐해 주니까 이리 기고만장 하지 않습니까.”
칠황자의 말에 무서워진 백아가 오황자 뒤로 숨어버렸다. 그 모습에 칠황자는 더욱 예의가 없다며 난리를 쳤지만 오황자가 말렸다.
“아직 어린 아이지 않느냐. 게다가 린의 유일한 동무인데 우리가 이해해 주어야지. 나중에 크면 어련히 하지 않겠니.”
오황자의 동생 사랑은 참으로 컸다. 이 정도면 동생 바보라 해도 다들 수긍할 듯싶었다.
“하여간에 어찌 이리들 무르신지.”
“아, 왜들 그래. 다시 좀 말해봐. 재녀선발이 그래서 뭔데?”
한참 재녀선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던 주제가 칠황자 때문에 끊기자 답답해진 린이 소리쳤다.
지금부터 알려주기엔 별로 좋지 못한 내용이라 이황자와 오황자는 망설였다. 게다가 궁의 후궁들 처지를 잘 알고 있는 그들이어서 더욱 알려주지 못했다.
“아, 그게 말이야…….”
오황자가 무언가 말하려 하자 이황자가 재빠르게 선수를 쳤다.
“그건 너희들이 조금만 더 크면 알게 될 테니 지금은 그저 궁의 후궁들이라 생각해 두어라.”
“궁의 후궁들?”
백아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지만 알려주는 건 거기까지였다.
궁금해서 더 자세하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호환마마 같이 무서운 칠황자 때문에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냥 저 사람이 없을 때 물어봐야지 하고 생각한 백아였지만, 사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곱 살 때부터 궁을 다녀갔던 백아는 많은 황자들 중 이황자, 오황자, 칠황자, 팔황자, 십일황자와 가깝게 지내며 어울렸고 그 안에서 린과 함께 귀여움을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