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딕의 한마디 이후 웅성거리기 시작한 전사들.
그리고 그들을 경계하며 서있는 짙은 마기의 남자. 비전투원인 자신은 신력 운용은 할 수 없지만 아주 미세하게 감각정도는 느낄 수 있다. 이런 자신에게조차 강하게 느껴질정도로 엄청난 마기다.
본은 생각했다.
'어딘가 낯이 익는 거 같은데....?'
에이, 설마.
마기와 마물의 눈을 가진 남자라니. 자신은 처음 들어보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저 눈매를 묘하게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뒤쪽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마치 파도가 벌어지듯 넓어진 공간 사이 한 여자와 그 옆을 따르는 남자가 걸어나왔다. 짙고 묵직한 신력이 발 아래에서부터 점점 차오르듯 밀려오기 시작한다. 마치 무거운 융단이 깔리듯 공기 중에 내려앉기 시작하는 무거운 신력.
'대신관님!'
긴 검은 생머리. 그리고 강아지같은 순한 눈매 아래 새빨간 입술. 새하얀 목에 걸린 화려하게 번쩍이는 성석 목걸이는 대신관의 증표. 길을 옮길때마다 촤르르 쏟아지는 새하얀 원피스는 빛을 받을때마다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거렸다. 전사들이 뒷걸음치며 길을 만들었다. 망설임없이 큰 보폭으로 걸어가던 그녀가 남자의 앞에 우뚝 섰다.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신관의 눈이 남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 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열리는 모습이 보인다.
'-지- . . 놀랍네---..'
남자도 작게 한마디를 내뱉고 있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멀리서봐도 숨이 막힐것같은 살기어린 시선인데도 대신관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있었다. 그와 대비되게 남자의 새빨간 눈은 적의가 흘러넘쳤다. 마치 금방이라도 피가 뚝뚝 떨어질것만 같았다. 일그러지는 눈매와 입꼬리. 그렇게 그들은 한참을 바라보았다. 대신관은 그리고 그 안의 누군가를 보았다. 안쪽을 확인한 순간 여유롭던 대신관의 눈안에는 감출수없는 동요가 스쳐지나가는 것을 본은 발견한다.
도원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도원은 그의 품에 안긴 여자를 건네받으려는 듯 행동을 취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남자의 붉은 동공이 살기로 수축했다.
헉.
사람들은 숨을 들이켰다. 짙은 마기가 방출되고 있었다.
도원은 뻗었던 팔을 거두고 다른 팔로 붙들었다. 뻗었던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쯧. 그는 혀를 차며 안경을 올렸다. 마기를 방출한 남자는 마치 짐승같은 얼굴로 그들을 고요히 응시했다. 붉은 안광이 형형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대신관이 발을 내딛었다. 남자 바로 앞으로 다가가며 그녀는 옅은 미소를 올렸다. 붉은 입술. 남자의 귓가 바로 옆으로 그녀는 몸을 살짝 기울인다.
읽을 수 없는 그녀의 입술모양이 이어지고 남자의 얼굴은 싸늘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내 고개를 떼고 살짝 어깨를 으쓱하는 그녀를 남자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엄청난 살기로 바라보았지만 어금니를 우득 깨물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도원이 팔을 내밀자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존재를 천천히 내보내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 존재에 꽂히고 있다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남자가 꽁꽁 싸매 품에 숨겼던 존재가 공기중으로 드러나는 순간 그 방 모든 전사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긴 검은 생머리가 늘어뜨려져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가죽들. 그 한가운데 새하얀 얼굴이 보였다. 여자였다. 삐쩍 마른.
도원은 그녀를 건네받자 가죽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리듯 덮었다.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도원의 품에 들어온 존재를 바라보며 묵묵히 서있던 대신관은 휙 몸을 돌렸다. 도원은 걸어나가는 대신관의 뒷모습에 고개를 숙였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던 대신관은 벌써 본, 자신의 근처에 있었다.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그녀의 모습에 잠깐 시선을 뺏겼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수료식이후 처음이다. 그때 그녀의 눈이 이쪽을 향한다. 깊은 검은 눈동자에눈이 마주친다. 본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 곧 그녀가 정확히는 자신이 아니라 주저앉아 있는 베르딕을 보고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저앉아 알 수 없는 말을 흘리며 우는 베르딕을 본 대신관은 눈을 찌푸렸다.
-마치 한심하다는 듯.
그러나 그 짧은 눈빛도 아주 찰나였을 뿐이다. 단 한순간의 경멸어린 표정, 그 뿐이었다. 그녀는 금방 방을 빠져나갔다. 섬세한 수가 놓아진 긴 원피스 자락이 사라진다.
"ㅡ베르딕씨"
"흐악"
잠시 넋을 잃고 있는 사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도원의 그 특유의 감정 하나 안느껴지는 목소리. 기척도 없이 다가온 도원은 베르딕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 품안엔 가죽으로 둘둘 싼 여자가 있었다. 하지만 검은 머리칼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치료실로 가세요"
"나, 나는 못해. 나는 절대 못해 내가, 내가 어떻게 무슨 염치로. 무슨 어떻게 못해 흐윽, 나,난-"
도원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었다. 시려운 그의 특유의 눈동자에 본은 어색한 미소를 올렸다.
"본씨"
"네, 네?"
"강이지 전사 치료실로 호출해주세요"
"네? 하지만 이지는-"
"괜찮습니다. 최대한 빨리 급한 일이라고 하세요. 아 그러고보니 지금 이 방에 없는 거보면 아마 일부러 숨어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요. 그렇다면 협박하세요. 당장 오지 않으면 제가 직접 집까지 찾아가겠다 전하세요. 그리고 현장투입 시키겠다고도"
현장투입이라, 그 겁쟁이를.....
벌써부터 훤하다. 울고불고 찡찡대는 이지의 얼굴이.
"알겠습니다..."
"네"
도원씨는 아무래도 우왕좌왕하고 있는 전사들을 통솔해야하는지 바로 몸을 돌렸다.
"베르딕 선생님. 일단 일어나세요"
"흐으...으.."
베르딕을 겨우겨우 지탱해 섰다. 호출을 위해 방을 빠져나오던 중 본은 여운이 남아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짐승같은 남자. 부시시한 검은 곱슬머리 사이로 보이는 붉은 눈. 피에 젖은, 몸에 걸친 너덜너덜한 가죽들.숨막히는 살의와 적의. 그는 계속해서 도원씨의 품에 안긴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절대 떨어질 것같지 않았다.
자신은 저런 남자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기묘한 기분이 든다.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