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는 조금 풀린 눈으로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을 손끝으로 찍어 확인했다.
하지문은 멀리서 보이는 그녀의 입 아래 뚝뚝 흐르는 붉은 피에 힘을 주었다. 삐쭉 눈 옆 핏줄이 솟는다. 뱀은 까딱 턱을 움직였다.
그 순간 마치 실에 걸린 듯 뒤로 훅 끌려가는 그녀의 몸. 엄청난 속도. 다음 장면은 벽에 붙어 축 늘어진 그녀의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밀어붙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뱀은 그녀를 너무 쉽게 제압했다. 벽에 고정된 채 사지가 포박되었다. 가느다란 실같은 힘. 뱀은 벽쪽에 고정된 그녀 쪽으로 걸음을 딛었다. 헉헉 대는 그녀의 거친 숨소리만 울린다. 그녀는 살기어린 눈으로 뱀을 응시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적대적인 눈.
뱀이 한발자국 내딛었다.
파챵!
훅 날리는 뱀의 귀 옆 머리칼.
한발자국
파챵!
또 한발자국
파챵!파챵!파챵!파챵!파챵!
형태도 없이 부서지는 힘의 파편. 진동하는 공기. 그녀의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피가 바닥으로 뚝 뚝 떨어졌다. 거의 늘어지듯 힘이 풀린 듯한 그녀의 몸과 달리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영원할 것 같던 소음이 드디어 끝이 난다. 조용해진 요새. 계속되었던 소음이 남긴 이명만이 귀에서 울린다. 뱀은 그녀의 앞에 멀지 않은 곳에 서 올려다 보았다. 서로를 고요히 응시하는 두사람.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그녀였다.
"..... 진작에, 죽였어야, 했는데"
낯선, 등꼴이 오싹할 만큼 날선 그녀의 목소리가 공간에 울렸다. 얇은 목소리에 가득 담긴 한기가 무척이나 서늘했다. 꽉 깨문 아랫입술에 뚝 뚝 떨어지는 붉은 피.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 사이로 태양같이 따뜻하던 금안이 거센 살기로 번쩍였다. 하지문은 평생 보지 못했던 그녀의 분노어린 표정이었다.
"너,지-"
그녀의 목소리가 울린다.
"너가, 나를... 너가, 이 지옥까지 끌어 내렸어"
뱀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고요하게.
마치 높은 벽 위에 걸린 십자가를 바라보는 신자의 모습같이 경건했다. 달빛보다 투명하디 투명한 눈이 살기 가득한 그녀의 모습을 담는다. 아무 감정도 비쳐지지 않는 듯한 새하얀 얼굴은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녀의 눈과 대비되는 뱀의 눈은 그 무엇보다도 맑고 투명했다. 반짝이는 하얀 속눈썹이 흰 나비가 내려앉듯 가볍게 팔랑였다.
조각같은 흰 얼굴의 입술이 작게 열렸다.
"응"
*
하지문은 생각했다.
'뭐?'
대체 방금 그녀가 뭐라고 말했단 말인가? 그리고 그에 대해 뱀은 뭐라고 대답했었지?
이성적인 사고가 멈춘다. 자신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힘. 그들이 부딪히는 공간 속 울리는 진동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방금 울린 그 말들보다 세게 이성을 때리지는 못했다.
"죽어"
음습한 살기가 깔린 그녀의 목소리가 울린다. 거친 숨소리가 섞인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
"그 날부터.. 매일, 매일 나를 불러대는 그 목소리 때문에, 흐,"
"......"
"난 너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 어떤 존재인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어. 전혀 알고싶지 않았다고!! 근데 왜! 왜 자꾸 불러대는 거야!!!"
그녀의 숨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나는, 나는 할 일이 있었어. 너와 달리 그 세계 안에서 사람들과 잘, 잘 살고있었다고 그런데 계속, 나는 충분히 잘 섞여 들어가 있었는데, 근데 그런데-"
횡설수설 말을 잇는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왜- 왜 자꾸- 불러. 왜. 왜 자꾸. 나는 너와 같지 않아-!!!"
마지막에 그녀는 거의 포효하듯 울부짖었다.
혼란스러운 머리. 미친듯이 뛰는 심장. 도저히 입력되지 않는 말들. 현실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걸어가려 하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문은 그녀의 울부짖는 표정과 말에 숨이 멎었다. 그녀가 하는 말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묵묵히 지켜보던 뱀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꾸욱.
뒤쪽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거미들의 사체가 기형적으로 구부러진다. 산더미같이 쌓여있던 사체들이 한데 모여 섞이고 구겨지기 시작했고 하나의 점으로 농축되듯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 챙- 하는 돌이 깨지는 소리가 울린 것 같았던 순간,
검은 점이 광활하게 확장한다.폭발하듯 넓어진 검은 점. 일그러지는 공간.
웅- 웅-
진동이 울린다. 휘돌며 진동하는 검은 구멍. 균열.
하지문은 반사적으로 수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긴장감이 감돈다. 그 가운데 균열의 웅웅거리는 진동만이 전부.
뱀의 말간 안구가 놀란 두 사람을 담는다. 고요하게 빛을 발했다.
그 때 벽에서 떨어지는 고정되어 있던 그녀의 몸이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수라는 대놓고 기분나쁜 기색을 하고 있었다.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그녀의 발이 땅 위로 가볍게 내려앉은 순간 뱀은 손을 내민다. 그녀는 배를 잡고 허리를 숙인 채 비틀거리는 다리를 애써 세웠다.
가깝지는 않은 거리였다. 열발자국정도 떨어진 거리. 어두운 공간에 천장에서부터 둘의 사이로 미약한 빛이 쏟아진다. 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같이ㅡ"
미성의 목소리.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찌푸렸다.
"[구현]"
움찔. 뱀의 내민 손이 떨린다. 뱀은 빠르게 왼쪽으로 고개를 기울였지만 곧 붉은 실선이 뱀의 흰 왼쪽 뺨 위 짧게 그어지고 상처 아래로 붉은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뱀이 꾹 쥐고있던 오른손을 푼다. 훅. 마치 먼지가 되어 사라지듯, 검은 연기가 되어 풀리듯 균열은 사라진다. 뱀은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여전히 손은 내민 채.
마치 선택하라는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