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이이잉엥, 깽 깽
"....."
바삭, 흰 발에 밟히는 모래가 부서진다.
뱀은 고개를 들었다.
여기저기 드리워져있는 흰 천들은 자세히 보면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아주 얇은 실로 촘촘하게 짜여있다.
벽들에 끈적하게 붙어있는 한가닥 한가닥의 실들은 모두 한가운데로 모인다. 거대한 수십개의 고치들.
그 중 꽁꽁 묶여 코 부분과 회색 꼬리 부분만 빼꼼히 뚫려있는 한 고치.
깽- 깨앵 깽깽-
그 고치를 뱀은 올려보았다. 아주 짧고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온다.
다각, 다가각.
그리고 무언가 다가오는 소리가 조용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뱀은 소리가 울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흰 실들이 작게 진동하기 시작한다.
그 실들 위 다각, 다각하고 걸어오는 무언가의 실루엣이 점점 커진다.
*
개가 안보인지 며칠이 지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불안에 떠는 모습이 점점 심해졌다.
"피나잖아"
하지문의 미간이 깊게 파인다. 그는 그녀의 피가 나는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따가울텐데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먼 곳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도 돌렸겠다, 이제는 정말 지상으로 가는 일밖에 안남았다 생각했다. 예상치 않던 이런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줄은 전혀 몰랐다.
"괜찮을거라니까"
"잡아먹힐뻔한게 한두번이 아니야"
휘청이는 다리로 무리해서 빨리 걷는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랑 아주 짧게 떨어져있었는데도 바로 다른 마물들한테 위협을 당해"
그 새끼는 왜 그렇게 약해빠져서 민폐 끼치고 지랄이지.
분명 입 밖으로 꺼내면 큰일 날 말을 하지문은 속으로만 삼켰다. 그녀로부터 경멸하는 표정을 받고 싶지는 않다.
생각보다 그 개새끼를 찾는 일은 참 힘들었다. 그녀 말대로 더럽게 약한 탓에 마기를 통한 추적이 불가능했다.
그녀는 마치 부모를 잃은 소녀처럼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바위를 짚고 올라가다 뒤로 넘어간다.
떨어지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붙들었다.
하지문과 마주한 그녀의 긴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담담한 그의 눈동자가 요동치는 그녀의 감정을 한번 눌러주는 기분이었다.
냉소적인 붉은 눈동자.
"천천히 가"
"응"
뒤에서 가볍게 등을 받혀주는 힘.
"그런데-"
계속 궁금했다.
"왜 포기하라고 안해?"
"뭐?"
"아니, 뭐, 마물이잖아. 나, 나한테는 무척 소중한 애지만 너는 분명 심한 말 하면서 반대할거라 생각했는데-"
아,
뒤에서 그가 불유쾌한 감탄사를 뱉었다.
"짜증나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나름 너의 버팀목이었던 것 같아서. 아주 조금이지만 고마운것도 있어. 잊었어? 내가 누구 덕분에 죽으려 했던 너를 살릴 수 있었는지“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다.
수라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간질간질한 기분.
"...그러면 평소에 좀 잘해주지"
"내가 그 개새끼를 때리기를 했어 뭘했어"
정상에 발을 디딘다.
바람이 훅 불어 머리칼이 날렸다. 그녀는 날리는 머리칼을 한데 그러모아 절벽 아래를 내려보았다. 그 때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받더니 어디서 꺼낸 끈으로 묶기 시작했다. 두피에 스치는 손가락의 감촉에 깜짝 놀란 몸이 떨렸다.
"머리끈?"
"그냥 가죽 끈이야. 불편해 보여서"
"... 내가 할 수 있게 주지"
"내가 왜"
내 사욕 채우려고 만든건데.
흘리듯 말한 하지문의 말을 수라는 애써 못들은 척했다.
머리칼을 쓸어내리고 한데 묶는 손동작이 꽤 능숙했다.
"잘하네"
"어렸을 때 여동생들이 아주 많았거든"
그의 대답에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곧 떠오르는 사실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 맞아 그랬지. 그 때 너가 많이 묶어주곤했겠구나"
과거 그들이 처음 만났던 고아원.
"지율이랑 민아가 특히 너를 따랐었는데. 맨날 먼저 묶어달라고 서로 싸우고, 울고-"
"열심히 묶어주면 금방 또 맘에 안든다며 다시 푸르고 돌아오고"
"아하하 맞아. 너한테 관심받고싶으니까"
"...그때는 몰랐어"
"어렸을때 하지문은 그랬지 맞아. 아주 반항심으로 똘똘 뭉친 청소년이었잖아"
"....."
떨떠름한 하지문의 표정.
"내가 뭘 하기만 하면 바로 시비걸고, 뭐라하고. 아주 질풍노도의 남자애였지. 무서워서 다가가지도 못하는 애들 많았잖아"
"...그때 얘기하지마 쪽팔려"
"아하하 왜! 아 그 때 민아가 한번 나한테 와서 지문오빠 이상형이 조용한 여자애라고 말해서 자기는 크면 도서관 사서 할까 생각중이라고-"
민아.
죽은 아이.
결국 영원히 아이로 남게 된 민아.
기억 속 민아의 헤사한 미소가 사라진다. 바닥에 낭자한 붉은 핏자국들이 가득 채운다.
등 뒤에서 어깨를 감싸며 안는 그의 체온에 정신이 퍼득 돌아왔다.
"...괜찮아 이수라"
그제서야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지문의 체온과 무게가 떨리는 몸을 눌렀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 울렸다.
"다 지나간 일이야"
"...아, 나 진짜 좀 많이 이상해진거같아"
감정의 변화가 극적이다. 한번 찾아온 떨림과 충격은 오래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심화된다. 감정 조절이 힘들었다. 두통이 시작된다.
숨이 가빠왔다.
벌벌 떨리는 그녀의 손아귀가 그의 앞섬을 잡아 뜯을 것 같이 매달리고 있었다.
"나, 나는 더이상 그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아"
하지문은 깊게 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ㅡ알아"
그는 말했다.
너의 그 강박을, 너의 두려움을.
나는 이미 충분히 알고있어 이수라.
"...난 영원히 너의 곁에 있을게. 꼭 살아남아서. 반드시 "
지문의 한쪽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꾹 안으로 누른다. 머리를 쓰다듬는 감촉이 부드러웠다. 그녀를 쓰다듬던 그의 팔이 어느 순간 우뚝 멈춘다.
“수라”
의아한 얼굴로 그녀는 얼굴을 들었다. 그의 얼굴은 어딘가 긴장돼 보였다.
“...너에게 말해야 할게 하나 있는데”
“말해야 할거?”
그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너에게 말해야하는데,”
“지상...응, 일단 뭔데?”
“...그 흰 뱀에 대한 이야기야. 그래 그 마물. 사실 알고있었어. 나는 꽤 오래전 만났어”
“뭐?”
이수라의 얼굴이 굳는다. 그녀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무슨 소리야”
“...한 일년전, 그 뱀과 만났어. 그리고- 말하자면 너무 긴데”
그녀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하지문. 그녀는 혼란스러운지 두 동공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 뱀은 균열을 열 수 있어”
“.....”
“그 뱀이 거래를 제안했어 먼저. 너와 나를 지상으로 보내주는 대신-”
그는 침음을 삼키듯 다음 말을 내뱉었다.
“자신이 지상으로 올라갔을 때 다시 내쫓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
그녀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다문 입술과 달리 표정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무, 무슨 소리야. 마물..이랑 거래를 했다고? 아니, 그리고 그걸 떠나서 뭐? 그 뱀을 지상에 놔둔다고? 하지문 미쳤어? 마물, 마물이야...!”
“...지금 우리가 찾으러 가고 있는 것도 마물이야 이수라. 난 너의 생각이 많이 바뀐 줄 알았는데”
“둘은 완전히 달라!”
“둘 다 마물이야”
“아무도 못막아. 모두가 죽을 수도 있다고”
“그게 너를 지상으로 올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아니, 나는, 안가”
“이수라”
“나는 안가. 나는 가고싶지도 않고, 그 뱀이 모두를 죽이는 광경도 보고싶지 않아...!”
“...제발 이수라”
“나, 나는 차라리 이곳에서 죽을거야”
그의 붉은 다이아몬드 동공이 쌜쭉 수축한다. 그 안에 분노로 점철된 감정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놔둘거같아?”
그가 그녀의 한 팔을 잡았다. 그의 억센 힘에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윽- 놔”
“넌 왜 항상 그런식이야, 널 사랑한다는 내 기분은 전혀 고려안해? 내가 얼마나 우스우면 그렇게 쉽게 죽는다는 말을,”
“...놔줘”
그는 그제서야 그녀의 고통에 떨리는 팔을 발견하듯 손을 놓았다.
“...미안”
그녀는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는 어금니를 우득 깨물었다. 그리고 조용히 그녀를 따랐다. 자신이 순간 흥분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그녀에게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
다음 날 둘은 흔적을 발견한다.
회색의 몽글몽글한, 분명 그 개의 것일게 분명한 털이 뽑혀 있었다. 주변엔 몸부림의 흔적이 남아있다. 여기저기 파이고 발자국이 남아있는 모래 위 흔적. 그 위 흩뿌려져 있는 소량의 붉은 피.
아주 옅게 남은 그 피 냄새를 따라 걸어가다보니 짙은 마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습한 기운이 날아온다.
삐쩍 마른 나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친 돌바닥 위 높은 절벽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점점 길이 좁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겨우 성인남녀 한쌍이 통과할 수 있을만한 구멍을 나오니 광활한 공간이 나타났다. 방대한 거미줄들이어지럽게 늘어뜨려져 있는 공간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