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주 평범한 하루였다.
시계를 체크한다. 아침 6시.
저번달 성과금으로 큰 맘 먹고 산 갤리아 워치. 부모님 손 안빌리고 내 돈으로 산 첫 명품 시계.
일을 시작한지 반년 조금 안된 요즘, 이제야 슬슬 이 일에 익숙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의외로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직장이다.
누구나 선망하는 1순위 직장인 1구역 대신전 전사. 예상과 달리 낯선 이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가 깔려 있어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자신과 같은 순수 1구역 출신이 아닌 사람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집 옆 헬스장에 가 가볍게 런닝머신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적당한 근력 운동 후엔 샤워를 하고
자전거는 신전 앞 공원에 세운다. 그리고 걸어가면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사 든다.
거대한 흰 건물이 나타난다. 흰 대리석 기둥들은 매일 봐도 언제나 사람을 압도한다. 그리고 그 기둥 위에 조각된 과거 전사들과 신의 문장, 천사의 문양 같은 것들. 높은 계단을 오른다. 매년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해 달라는 전사들의 민원이 들어오지만 대신전은 굳건했다.
대신전의 위엄과 전통을 위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입장.
솔직히 나는 이깟 계단 몇개 운동겸 오르면 좋지 않나 생각한다. 부관인 그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녀의 13번째 에스컬레이터 설치 신청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찰실을 길길이 날뛰며 난장판으로 만들어놨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어휴. 미친놈 하여튼'
옆에서 북적북적한 소리가 들려온다.
"이학년 동붹반! 지금 짝꿍 손 꽉 잡고 있는거 맞나요?!! 분명 선생님이 여기 오기 전에 뭐라고 했지??!!!"
'오 이런'
벌써 현장학습 시즌이었던가.
식은땀이 흐른다.
선생님의 사자후같은 외침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똘망똘망하게 서있는 쪼꼬미들. 살금살금 발을 옮긴다.
코를 후비고 있는 딱 봐도 반항적인 눈을 하고 있는 남자애 하나랑 눈이 딱 마주했다.
"어! 리본이다!"
"뭐?! 어디!! 어머! 어머! 아이어님!"
아니 선생님.
눈을 반짝이며 다가와 두 손을 잡힌다. 그 뒤로 한 무리의 아이들이 우르르 밀려와 둘러쌌다.
"어머 이렇게 본 아이어님을 볼 수 있을 줄이야! 실제로 보니 더 크시네요! 역시 전사의 우두머리 아이어..! 어머 어머 저는 샛별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인데 애들과 함께 현장학습을 왔어요"
"어, 아, 아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하하..."
"아저씨 아저씨! 마물 본적 있어요?"
"와 아저씨 겁나 크다!"
"아저씨 마물도 똥 싸요?"
"웩 이경찬 더러워! 악! 쌔애애앰! 이경찬이 제 머리 잡아땡겼어요!"
"어머 어머 아이어님. 잠깐 아이들과 함께 시간 좀 내주시면 안될까요? 아이들에게 정말 좋은 교육 경험이 될텐데-!"
그 아이들 지금 바닥 뒹굴면서 싸우고 있는데요.
"저희 반에 전사를 만나는게 꿈인 아이들이 아주 많거든요!"
"아. 네. 그것 참 감사한..."
"으아아아아앙!"
"쌤! 이경찬이 선아 머리 잡아당겨서 울어요!"
"아니거든! 자기 혼자 우는거거든! 나는 아무것도 안했거든!"
"얘들아 어머 왜 우니. 이리와봐 선아야 아이어님 만나는게 꿈이라고 저번에 그랬잖아!"
"....."
"으아아아아아아앙!"
"어머 선아야 뚝 그치자! 아, 아이어님. 아이들이 준비한 질문지가 있는데 한번 작성 좀-"
퍽. 울고있는 선아란 아이의 다리가 선생님의 안면을 강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생님의 환한 얼굴은 유지되고 있었다. 조금 빨개진것 뿐. 아 또한 입꼬리가 조금 부들부들 떨리고 있긴 했지만.
그 떨리는 입꼬리에 온갖 감정이 다 느껴진다.
프로페셔널.
경외가 든다.
그 때 뒷통수에 충격이 가해져 고개가 앞으로 홱 숙여진다.
아찔한 충격.
"꺅! 아이어님!"
"저기여. 출근안해여? 완전 월급루팡이네"
"...그린...."
찐분홍색의 풍선껌이 후욱 눈 앞까지 다가왔다 펑 터진다.
자기의 배정도까지 오는 여자는 터진 풍선껌을 그러모아 입 안에 넣고 쨕쨕 씹는다. 신경질적인 눈매가 오늘따라 더 심통나보인다.
"저기여 이 사람 바빠요. 현장학습은 다른 직원한테 부탁해여"
"잠, 그, 그린"
등이 밀려 어쩔 수 없이 계단을 올라가는데 선생님의 아쉬운 표정이 눈에 밟혔다.
발에 차인 붉은 자국도 어쩐지 더 붉어보인다.
잠깐뿐이라면 괜찮을 것 같기도..!
누군가가 팔 소매를 잡아당긴다. 내려다보니 양갈래를 한 또래 중에서도 매우 작은 여자애가 뚫어져라 보고있었다.
"아저씨. 우리 엄마는 마물때문에 죽었어요"
"....."
몸이 굳는다. 싸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 자리 어른들만.
아이들은 여전히 시끄럽게 울고 웃고 하고 있었다.
마치 전원이 꺼진 것처럼 딱딱해진 어른들은 모두 침묵했다.
아이들의 서로 장난치고 우는 소리만이 배경음으로 울렸다.
아이의 눈은 너무 맑았다.
뭐라고 말해야하지.
위로를 해야하나. 미안함을 전해야하나. 격려를 해야하나. 어떻게, 어떤식으로?
혼란에 빠진 상사의 앞으로 부관의 팔이 뻗어진다.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의 눈을 맞추었다.
평소 볼 수 없는 진지한 표정.
"미안해. 우리가 더 빨리 그 마물을 죽이지 못해서. 앞으로는 절대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할게. 그리고 아"
그린은 아이의 목에 걸린 작은 수첩과 그 옆에 달린 엄지만한 펜을 가져갔다. 수첩과 연결된 노란 줄이 달랑인다.
"이거 언니 번호니까 힘들때마다 연락해. 언니 엄마아빠도 다 너만할때 돌아가셨어. 그러니까 언니가 잘알거든, 어떻게 혼자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연락해, 너 운 좋은줄 알아. 대신전 인맥 얻으려고 얼마나 많은 어른들이 혈안이 되어 있는지아닝?"
그린은 바닥에 꿇었던 무릎을 툭툭 친다. 그리고 내 팔을 잡아 끌었다.
"가여. 선생님 수고하세여"
"아, 아 네! 감사, 감사했습니다 전사님들!"
선생님의 눈에 조금 물이 고인 거 같은데.
걸음을 재촉하는 부관에 이끌려 올라간다.
"....뭐야, 너 왜 그렇게까지 해? 낯설다 너"
"엥? 나 겁나 천사인거 님만 모름"
"어떤 천사가 상사 뒷통수를 때려"
"아 오늘 점심 돈가스 나왔음 좋겠다"
"말돌리지마"
계단을 다 오르니 맞이하느 거대한 유리문.
고대 신전같은 모습은 외관만일뿐, 안은 그 어떤 곳보다 최첨단 기술과 현대적 구조물들로 집약된 곳이다. 특히 베타 균열로 인해 붕괴되었던 것이 고작 4년 전이기에 재보수한 대신전은 지금 거의 새 건물이나 다름이 없다.
[CODE 413. 1구역 본 리. 출입 허가]
[CODE 415. 1구역 가그린. 출입 허가]
"안녕하세요 본님, 그린님"
"좋은 아침이에요 세리님"
"세리 안녕. 머리 염색했어? 예쁘네"
"네, 기분 전환으로 아주 조금 갈색 정도? 고마워요"
"어디서 했어?"
스몰토크를 시작하는 부관을 기다릴까 말까 고민하다 먼저 발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본님. 오늘도 엄청난 근육들이네요"
"잘 주무셨어요 아이어님?"
"아, 안녕하세요 네 다들 좋은 아침입니다"
하지만 곧 얼마 가지 않아 뒷통수를 또 가격당했다.
"! 그린! 정말 그만해!"
"나버리고 먼저 가는게 어딨어"
"난 바빠!"
"나도 바쁘거든? 근데 오늘 점심 돈가스 아니래. 생선가스래. 으윽 그 돈가스 따라하는 적폐녀석. 그래서 말인데 우리 짜장면 시켜먹자"
"...미안한데 나는 도시락 먹잖아 그린"
"으엑 오늘도 그 프로틴쉐이크랑 닭찌찌살? 징하다 징해 오늘은 짜장면먹자. 하루정도는 괜찮아"
"매일같이 이렇게 꼬시는 너가 더 징해"
부관의 끝나지 않는 찡찡거림을 들으며, 듣기 힘들어 죽겠으니 일단 짜장면 두개 시키고 하나는 다른 사람 아무나 줘야지 하고 결심했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결국 아무 소용없어졌다. 점심이 되기 바로 전 관측된 균열.
최초로 발견된 신전 내 균열 출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하고 무서운 현상에 가능한 전투원들을 모두 소집했다.
ㅡ그리고 지금 본 리, 7대 아이어, 그는 근무한 이래 가장 엄청난 광경을 목격하고 있었다. 신전에서 열린 균열 밖으로 나온 것은 마물이 아닌, 사람 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