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강했다. 지상의 그 모든 존재보다도 강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
*
그녀는 온 몸에 신의 문장이 새겨진 채 태어났다고 했다.
전사라면 가지고 있는 검은 문장 -신의 문장이- 그녀는 징그러울 만큼 발가락부터 볼까지 온 몸을 둘러싸고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도 성장하면서 그 문양들은 차차 사라져 일반인의 모습을 하게되었고 그녀를 키워주신 고아원의 수녀님들은 그 사실을 어린 아이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후에 그분들은 그녀가 평범한 아이로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에 그리하셨다고 말하셨다. 그분들의 소망대로 그녀는 자신의 신력을 눈치채지 못하고 평범하게 자랐다. 물질적으로 풍족하다고는 절대 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그녀에게는 다정하고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고아원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연쇄적인 균열. 붉은 색 마물. 건물이 무너지고 그녀가 알고지낸 많은 사람들이 그 잔해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친구였던 자와 언니였던 자의 핏웅덩이를 보고 아연질색해진 어린 그녀의 팔을 수녀님은 잡고 끌어당겼다. 그러나 곧 마물의 공격을 받았고 마물의 손톱에 묻어있던 독이 온 몸에 서서히 퍼져 길바닥에서 죽고 말았다.
죽은 수녀님의 몸을 끌어안은 그녀의 몸 위로, 수녀님들은 사라졌다 생각했던, 검은 문장들이 선명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녀가 신력을 방출할때마다 돌아오는 그 검은 문장들이었다.
마치 소용돌이치듯 검은 문장이 그녀의 흰 피부 위를 감싸며 올라갔다.
밝은 금빛이 퍼져나갔다. 마물은 녹아내렸고 그날 그렇게 그녀는 각성했다.
각성한 그녀는 강했다.
다른 마법전사들과 달랐다. 그녀는 가르침이 필요없었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 힘들을 어떻게 다루어야하는지.
또한 느껴졌다.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 지상의 모든 전사들이 덤벼들어도, 모든 마물들이 덤벼들어도 지지 않는다.
어느 날 그녀는 스스로에게 고삐를 묶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녀는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전사들이 몇년을 수련하고, 단련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녀를 범접할 수 없었다. 스스로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몇년이 걸렸다.
그 누군가가 어느날 그녀에게 악에 받쳐 소리쳤던 것처럼, 그것은 '정당한 힘'이 아니었다. 그녀는 동의했다. 가만히 앉아, 마물과 싸우고 있는 전사들을 보다 문득 밀려오는 권태로움. 덧없음.
개미들의 싸움을 보는 듯하다. 수십명의, 수백명의 전사들의 팔이 잘리고, 발목이 잘려 피가 흐르는 그 싸움은 그녀에겐 그저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들. 멍해지는 그 정신에 빠지면 자신을 둘러 싼 그들이 모두 덧없게 느껴지고는 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공감하기는 불가능하다. 자신에게 경외의 눈빛을 보내는 이들이 우스웠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한 공포감이 밀려왔다.
그래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말하기 보다는 듣는 편을 택했다. 스스로를 억제하고 채찍질하기로 했다. 그 덧없음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닌 순수한 운으로 얻은 그 힘을 악용하지 않도록. 오만에 빠지지 않도록.
ㅡ자신이 사랑하는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
*
높은 낭떠러지.
그 아래를 바라보며 하지문은 앉아 있었다. 머리 위 찬란히 빛나는 흰 달. 세찬 바람이 불어 그의 몸을 민다. 그의 손 옆 작은 돌멩이가 굴러 낭떠러지 아래로 날아간다. 까마득히 보이는 아래에는 회색 돌바닥과 모래평야가 보였다.
아무 힘도 없던 일반인 시절 떨어졌다면 분명 온 몸의 뼈가 으스러져 무력하게 죽었을 것이 분명한 높이.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어떨까. 그 자신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마물의 살점을 물어뜯고, 마력의 원천인 마석을 삼키며 힘을 길렀다. 4년동안 마물들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구르고 굴렀다. 그 과정에서 왼쪽 눈도 실명했다. 언젠가부터 웬만한 마물들은 모두 우스운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 뿐. 그는 그 스스로 자신의 힘이 어느정도까지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존재가 스스로 꽤 자부하던 자신의 강함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한순간에 자신이 비능력자였던 그 때와 다를바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어버렸다.
톡. 등쪽에서 굴러온 작은 돌이 그의 손에 와 부딪힌다. 공기 중 섞여 불어온 물 냄새.
하지문의 얼굴에 묘하게 금이 간다.
“너 때문에 부은 내 왼 볼 어떡할거야. 씨발 이수라를 드디어 만났는데 깔끔한 모습은 무리더라도 씨발 이 퉁퉁 부은 꼴을...”
“보고싶어”
우득. 그는 이를 갈았다. 천천히 일어나 몸을 돌렸다. 마치 달빛을 뭉쳐 만든 것만 같은 흰 남자가 눈을 깜빡였다. 눈을 깜빡일때마다 긴 하얀 속눈썹이 은빛 눈동자를 더욱 반짝이게 했다.
“수라. 나도 보고싶어”
“이름 부르지마”
하지문의 일그러진 입 사이 뾰족한 송곳니가 모습을 드러낸다. 미간이 파이고 살기를 눈에 담았다. 그러나 흰 남자는 무감각하게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하지문은 어금니를 갈며 입을 열었다.
“...너 수라랑 같이 다니던 작은 개새끼 알아?”
“개새끼?”
“그 왜 회색의, 북실북실한-”
하지문이 손으로 북실북실을 표현하자 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왕! 하고 소리를 냈는데 그 따라하는 소리가 놀랍게도 너무 똑같았다.
“어 응 그래 그거. 그거 지금 어디있는지 알아?”
생각을 골똘히 하는 듯 고개를 갸웃갸웃거리던 뱀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그 개 좀 무사히 구해서 갖다줘”
“왜?”
“...이수라가 아끼는 애야”
“아-”
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좋겠다- 하고 여상하게 내뱉었다. 하지문은 더욱 더 불쾌감을 느끼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하- 하고 하지문은 머리를 짚고 다시 몸을 돌려 앉던 곳에 털썩 앉았다.
“...혹시 죽었어 걔?”
“몰라”
뒤에서 미성의 목소리가 감정없이 대답한다.
“...만약에, 만약에 죽었으면. 그럼 그 비슷하게 생긴 거라도 가져와”
“비슷한거?”
“그래 뭐 걔의 형제든 자매든 엄마든- 사촌새끼든 뭐 있을거아냐”
하지문은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굵은 두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누른다.
“...나도 알아, 나도 아는데, 진짜 말도 안되는 대안이라는 거 아는데... 씨발, 그럼 걔가 우는데 어떡해...”
암벽 지대를 스치는 바람소리는 살벌했다. 마치 암석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은 소리.
조용히 서있던 뱀은 하지문의 뒤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한손을 어깨 위에 올렸다.
“울어?”
“...지금 당장 이 손 안내려놓으면 손목채 잘라버린다”
뱀은 천천히 손을 뺐다.
“그리고 너 내가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렇게 기어코 나를 패놓고 찾아가? 그리고 그 무식하게 잡아온 마물들은 뭐야, 그러면 걔가 좋아할거같아?”
“...안좋아해?”
말간 은빛 눈동자에 미세하게 감정이 스친다. 고개를 돌린 하지문은 그것을 눈치채곤 미소를 올렸다.
“응. 엄청. 싫어했어”
“.....”
축 처진 눈썹과 가느다란 눈매. 하지문은 기분이 조금 나아짐을 느꼈다.
“그리고 너에 대한 경계심이 많이 커. 그러니까 최대한 천천히, 기회를 봐서 만나게 해줄게. 그 전까지는 절대 마주치지 마. 알았지”
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문의 붉은 다이아몬드 동공이 살벌한 빛으로 형형히 빛났다.
“너의 일은 그게 다야.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
하지문의 살기어린 무감각한 인형같은 눈으로 바라보며 , 뱀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