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훈훈한 불의 온기가 훅 끼친다. 붉은 불꽃이 일렁거리고 그 옆에 앉아있는 그녀의 그림자가 돌 벽 위에 아른거렸다. 불꽃이 튀는 타닥 타닥거리는 소리. 불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흰 얼굴에 주황색 빛이 어린다.
하지문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손질한 고기가 들어있는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툭 떨어지는 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올린다. 긴 속눈썹 아래 나른하게 눈물자국이 젖어있는 금안들이 자신을 본다. 열이 올라 볼 위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지난 4년을 굴렀던 목표에 금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데리고 올라가 그 미친새끼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것이라던- 오른쪽 눈이 실명되는 그 순간까지 굳건했던 그 목표가 작은 실금이 기어다니기 시작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추악한 하나의 욕망이 그를 뒤흔들었다.
어쩌면 이 곳이야말로 그가 그토록 바라왔던 세상일지도 모른다. 아주 어렸을 적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주어진 시련같은 욕망이 바라왔던 최적의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지킬 인간도 없고, 그녀를 해칠 인간도 없으며 그녀가 사랑하는 이들도 없다. 그저 나와-
‘병신새끼’
웃음이 나왔다. 정말 자신이 생각해도 역겨워서.
”뭐해? 불 가까이 와“
청아한 목소리. 일렁이는 불 그림자가 비치는 그녀의 홀쭉 마른 볼이 보였다. 나뭇가지로 불을 쑤시는 팔에 흘러내리는 가죽 사이로 보이는 비쩍 마른 팔도.
그는 주먹을 꾹 쥐었다. 손톱이 그의 살을 파고들어 까질정도로 세게.
*
헐떡이는 이수라의 숨소리가 새로 옮긴 작은 동굴 안에 울렸다. 그녀는 계속 기존의 거처로 돌아가면 안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겨우겨우 사체들을 끌어오고, 새로운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작지만 꽤나 아늑했다.
”진짜 고집은-“
그는 이를 꽉 깨물며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그녀의 눈동자는 흐리멍텅하게 풀려있었다.
”...위험하단말이야“
”자. 열올라서 헛소리 하지말고“
”헛소리 아니야...! 정말...!“
수라는 왈칵 눈을 찌푸리곤 무언가 고민하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엄청난 결심을 한 듯 진지한 표정을 했다.
”...혹시 베타 균열이 열리기 며칠 전 나타났던 붉은색 등급 마물 기억나?”
“기억나지, 이수라가 또 내 지시를 어기고 지 멋대로 행동한 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당황스러운 대답이 나왔다. 이수라는 아니, 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 중에서도 그 날은 아주 나 말려 죽이려고 환장한 이수라 만행 탑 쓰리안에는 드는 일이었지. 붉은색 마물 등장에 S,A 할 것 없이 모조리 싹 다 모아서 현장 보내놨더니 갑자기 지 혼자 상대하겠다고 나머지 애들 다 차단시키고. 무전도 빼놓고. 나는 또 혼자 애타서 끊어진 무전에 계속 니 이름 부르며 지랄하고”
“...아니, 그”
당황스러움에 그녀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그녀의 사정은 있었다.
“다, 다 사정이 있어서”
“뭐?”
그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한쪽 입을 올리고는 하, 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쉬었다가 내뱉었다. 할 말이 아주 많아보이는 그의 태도에 그녀는 조금 움찔했지만 기다려 서지 않았다.
“그 때 내가 돌아와서 너한테 들은 거 똑똑히 기억나!”
그녀는 빠르게 그 때 들었던, 아주 큰 상처가 되었던 그의 말을 다다다 내뱉었다.
[그렇게 상부 명령 어기고 혼자 처리할거면 이곳에서 나가세요. 성녀님. 여긴 엄연한 규칙이 있는 정부야. 당신 신도들 양성소가 아니야]
그렇게 내뱉으며 그녀를 싸늘하게 바라보던 눈빛.
“얼마나 상처였으면 내가 아직도 단어 하나하나 기억하겠어! 신도 양성소?! 성녀?! 안그래도 내가 그 말들에 얼마나 스트레스 받고있는지 알았으면서!”
“아니..!”
그는 큰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이를 갈았다. 입새로 욕이 나직하게 새어나왔다.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 뭐 너가 걱정돼 죽겠고 너를 사랑해 미치겠으니까 제발 너 몸 아끼고 전투에서 나서지 말라고 해?!”
그녀는 황당함에 입을 떡 벌렸다.
“내가 너에게 솔직하게 대했다면 너는 분명 나를 불편해하면서 내 말 더 안쳐들었어. 분명히. 봐. 어쨌든 그 말이 너한테 각인되기는 했잖아”
그가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심술궂은 표정. 기가 막힌다.
“날 사랑한다며? 너는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렇게 상처를 주는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내가 뭐 처음부터 그런식으로 했어?! 내가 얼마나 옆에서 착하게 타일렀었어! 어? 하지마라 하지마라! 너 몸 좀 챙겨라!!! 근데 너는 너를 위하는 마음으로 감정으로 호소해봤자 너는 들어 쳐 먹지를 않잖아!!!”
“하 그러니까 그런식으로 상처주면서 가만히 아무것도 못하게 만든다?!”
“너는 씨발..!”
“씨바알? 하지문 너 지금 나한테 욕했어?!!!”
“...미안해. 이건, 사년동안 내뱉을게 욕밖에 없어서 나도 모르게- 버릇이,”
“너 나가!”
그녀의 발이 그의 허리를 향해 날아왔다. 기꺼이 맞아주며 하지문은 깊게 숨을 내뱉었다. 이건 뭐 바람이 불어도 이것보단 셀 것 같군. 계속 날아오는 그녀의 발을 맞아주던 그는 어느 순간 또 날아오는 그녀의 발을 확 낚아챘다. 꺅하고 그녀는 놀라는 소리를 냈다. 그는 그대로 허리를 굽혔다. 그의 단호한 눈이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본다.
“이제 그만. 힘빼지마. 열 더 오르게 생겼어”
이수라는 최대한 힘을 주고 발을 빼려했지만 그의 손아귀에 고정된 발은 꿈쩍하지도 않았다. 으으- 그녀는 조금 분한 마음으로 이를 갈았다. 그 모습을 조용히 내려다보며 하지문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곤 발을 놓고 옆의 짐을 헤집기 시작했다.
“자”
그의 손에 들린 성석이 불꽃에 비쳐 반짝거렸다. 그녀는 눈을 조금 깜빡거리다 그의 손바닥 위 성석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꿀꺽, 삼키자 엄청난 이물감과 함께 목구멍 아래로 내려갔다.
“윽...”
“잘했어”
좀 전 해체 작업을 끝낸 엄청난 양의 마물 가죽들을 끌어 와 불 옆에 펼쳐놓기 시작한 지문이 대답한다. 아주 열중하는 모양새다.
“그런데 몇 개 밖에 남지 않은걸 이렇게 바로 먹어버려도 괜찮은걸까? 분명 이제 두 개 밖에...”
하긴 뭐, 어차피 엄청난 소량이다. 성석 몇 개로 자신의 몸 상태를 완전히 되돌리기엔 터무니없는 바람이다. 그녀가 이 지하에 존재하는 한, 이곳의 공기를 마시고, 땅을 밟는 한 마기중독으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숨을 쉴때마다 바늘이 폐를 찌르는 것 같은 고통도, 일어설때마다 울리는 두통도 사라진 현 상태. 누군가가 옆에 있는 생활. 이 모든 것들은 한순간의 달콤한 꿈같은 것이다.
결국 끝날 일.
“난 너 또 쓰러지는 꼴 못봐”
하지만 그의 음성이, 표정이 자꾸 그녀가 다른 생각을 품어보게 한다. 처절할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과 굳은 음성이.
성석을 삼키자마자 그녀의 몸뚱아리는 반응하기 시작했다. 마치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몸을 감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뜨거워 어질어질 하던 시야가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몸이 무거워졌다. 몽롱한 시야로 그녀는 하지문을 바라보았다. 구불구불한 검은 머리칼 아래 빛나는 붉은 다이아몬드 동공. 날카로운 눈매 아래 형형히 빛나는 눈. 그는 그녀의 눈가에 손바닥을 올렸다. 완전히 그녀의 시야를 가린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푹 자고 일어나”
“...있지 근데 아까 말한 그 마물-”
멍해지는 정신. 그녀는 자신의 말인지 누구의 말인지 알수가 없없다. 목소리가 울린다.
“그 마물이 이 곳에 있어. 죽은 줄 알았는데-”
“.....”
“그건 위험해- 못이겨. 그 때도, 그래서-”
“위험하니까 너 혼자 상대한다는게 대체 어디 상식이야”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몸이 붕뜨는 기분이 들었다.
“...지상에서 그때, 그 마물을 마주한 순간. 깨달았었어. 내 모든 힘을 사용해야한다고. 그리고 그렇다면- 나에게 다른 사람들은... 방해돼”
“...하, 그래, 잘나신 성녀님. 알겠어”
“설마 왕왕이가 그 마물한테 잡아먹힌건 아니겠지?”
하지문은 자신의 손바닥 아래 흐르는 눈물을 조용히 내려보았다.
“절대 그럴리 없어. 괜찮을거야. 약속해”
그녀의 작은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지문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신의 손등 위 입술을 붙였다.
“너가 원하는 거 다 이뤄줄게. 걱정하지마. 이수라”
조용히 하지문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나의 수라. 나의 지옥. 하지문의 눈동자 안 가득 그녀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금방이라도 핏방울이 떨어질것같은 붉은 색.
희미하게 이어지는 여자의 울음소리. 타닥이는 불꽃 타는 소리.
울음소리가 점차 멎고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손바닥을 떼고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가볍게 그녀의 눈가에 입맞춤했다. 사랑과 애절함으로 범벅이 되어있던 그의 붉은 눈은 곧 고개를 들고 밖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벼려진다. 마물과 똑같은 눈을 한 그의 동공이 쌜쭉 수축하며 칠흑같이 어두운 밖을 응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