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쳐나가는 그녀를 붙잡고 일단 무기와 걸칠 것을 가지고 가자고 겨우 설득했다. 동굴로 들어와 장검을 들고 다시 나서는 그녀를 지문이 불러 세웠다.
“잠깐만 이것들은”
그가 가리킨 곳 아래에는 아까 그것이 떨어뜨리고 간 마석들이 있었다. 수라는 작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몰라. 아까 그게 두고 갔는데”
“아까 그, 흰 뱀이?”
“응- 어라. 내가 흰 뱀이라고 말을 했었던가?”
“.......응, 했어”
그렇구나.
하지문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위 뭐라 쉽게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 떠오른다. 그는 천천히 발을 옮겨 그녀를 따라갔다. 해가 져서 모래에 남아있던 잔열은 사라지고 시린 바람만이 그들을 맞이했다. 하지문은 거친 바람을 뚫고 걸어가는 그녀를 불안하게 바라보며 자꾸만 자신이 두르고 있던 가죽을 그녀의 몸에 싸맸다. 결국 양팔이 꽉 붙잡힌 눈사람처럼 만들어진 그녀는 결국 그만하라고 빽 소리를 질렀고 그 상태에서 두장만 빼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지하의 밤은 무섭도록 추웠다. 뼈밖에 안남은 몸으로 벌벌 떠는 그녀를 그는 더 이상 두고볼수가 없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찾아”
“조,조금만 더”
“너 쓰러져”
그 때 정신없이 발을 내딛던 그녀의 몸이 우뚝 섰다. 그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응시했다. 먼 곳에 삐쩍 마른 나무 하나가 서있었다. 그리고 그 위 작은 어떤 회색 생물체가 앉아있다. 회색의 복슬복슬한 털이 언뜻 보였다.
“수라- 수라!”
뛰쳐나가는 그녀를 따라 뛰었다. 하지문의 눈에 나무 바로 아래 고여있는 검은 웅덩이가 보였다. 검은 슬라임같은 형태의 넓디 넓은 웅덩이. 하지만 그 웅덩이는 그저 고여있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일정한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웅덩이 가운데 위치한 나무가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다.
‘슬라임 형태 마물’
그녀의 발이 그 웅덩이에 닿기 직전, 그는 그녀의 몸을 확 끌어당겼다.
"놔봐!"
하지문은 버둥대는 그녀를 꽉 가두었다.
"위험하잖아! 살점 다 녹아내려 뼈만 남고 싶어?!"
"괜찮아!"
"씨발!! 뭐가 괜찮아! 노이로제 걸리겠네! 지금 니 몸상태로 신력 방출하면 바로 또 쓰러져!"
"아니, 아니야- 능력 안써, 봐"
그녀는 아예 그에게 붙잡힌 그대로 허리를 숙여 손을 검은 것에 갖다댔다. 그가 채 눈치채기도 전이었다. 그가 눈을 동그렇게 떴다.
"....."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그녀의 손길이 닿으려 하자 슬라임이 엄청난 속도로 피했다. 그녀가 뻗은 손끝 공간만 둥그렇게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녀는 망설이지도 않고 그를 떨쳐냈다. 그녀가 닿는 걸음걸음에 슬라임은 엄청난 속도로 흩어져 구멍을 만들어냈다. 마치 그녀에게 닿을까 필사적으로 피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는 처음 보는 광경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정신없이 뛰어가던 그녀는 나무 앞에서 가만히 섰다. 그제서야 그도 나무 위에 매달려있던 작은 마물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 털을 가진 작은 새 형태의 마물. 오른쪽 날개가 부러졌는지 한쪽 날개가 축 내려와 있었다.
“.....”
"...방금 분명 능력을 쓰지 않았어 그렇지. 근데 어째서 슬라임이 너를 피한거지?"
검은 웅덩이는 아주 조용히 꾸물대며 아예 그들의 반대 방향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인간을 피하는 마물은 본적도 들어본적도 없다. 먹잇감이다 저들에게 인간이란. 하지문은 멀어지는 슬라임 덕에 그녀의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다.
"...나도 모르겠어 그런데 이곳의 마물들은 나를 피해"
"뭐?"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고보니' 하지문은 생각했다.
그녀와 걸어오는 내내 마물의 털끝하나 보지 못했다. 그녀와의 대화때문에 인식하지 못했었지만 한번 인식하다보니 이상한 점들이 쏟아졌다. 그들이 몇밤을 보냈던 동굴 안에서 마물의 침입을 당한 적이 한번도 없다. 아니 그 주변에서 어떤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그 혼자 다니던 길은 끊임없는 싸움이었다. 지긋지긋한 망할 것들은 금방이라도 그의 기척을 발견하곤 바로 달려들었다. 정신차리면 싸우고, 물고, 또 걷다가 바로 싸우고. 그들은 그를 한시도 내버려두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광할한 모래와 나무들. 그 밖엔 아무것도 없었다. 고요했다. 기묘한 의문이 든다.
“수라”
그러나 건조한 눈으로 그 작은 마물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하지문의 의문은 일단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멍한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하지문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찾으러 나가자”
“이미 잡아먹힌거면 어떡해?”
“그럼 그 잡아먹은 마물을 찾아 갈갈이 찢어 죽일게”
“...무슨 소용이야 그게. 난 그 애가 아니면 안되는건데. 이미 잡아먹혔으면-”
울음 섞인 목소리. 그녀의 몸이 쓰러지듯 뒤로 넘어간다. 그는 그녀의 몸을 잡아챘다. 닿은 피부가 불처럼 뜨거웠다. 그는 황급히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뜨겁다.
“...괜찮을거야. 그렇게 믿어”
그녀는 아무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절망감에 빠진듯한 금안 아래 투명한 눈물방울들이 계속 투두둑 떨어진다. 그녀는 몸을 돌리고 약하디 약한 힘으로 팔로 그의 목을 껴안았다. 움찔 그의 몸이 떨린다.
‘씨발’
하지문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욕설을 자신에게 남은 모든 인내심을 끌어모아 눌렀다. 그녀가 우는 얼굴에 심장이 찢기는 기분이 드는 동시에 음험한 기분이 샘솟는다. 자신의 목에 스치는 그녀의 머리칼의 감촉에 자꾸만 올라오는 느낌을 꾹꾹 눌렀다. 온갖 쌍욕이 그의 마음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는 참아냈다. 그가 평생 하던 짓거리이기 때문에 익숙한 일이다.
*
“들어가있으라고 몇 번을 말해”
“그치만 너 혼자 이걸 언제 다해...”
“금방 해”
그녀는 아직도 산더미같이 쌓인 마물 사체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사체들을 하나하나 손질하고 있는 남자도 보았다.
"금방 끝나"
"아니...안될거같은데...어차피 먹을 식량은 충분히 확보했잖아...“
하지문은 저번에 느꼈던 기시감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녀의 여상함이 그에게 묘하게 느껴졌다.
"....."
"특히 밤에는 더 잘 안나타나잖아. 괜찮아"
마물들은 밤에 더 미쳐 날뛴다.
그는 칼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그녀의 주위로는 마물들이 잘 접근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아까 그 슬라임의 행동으로 보아선 오히려 기피하는 것 같다. 알 수 없는 이유가 꺼림칙했지만 이면으론 다행이라고 깊이 생각했다. 지난 4년동안 매초마다 자신의 몸을 날카로운 아가리의 이빨들로 으스러트리던 그것들이 그녀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니 감격스러울 정도로 다행이다. 그녀의 몸상태로 보아 만약 마물들이 지상에서와 똑같이 달려들었다면 분명 그녀는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문은 둘둘 천으로 말린 사이로 보이는 뼈만 남은 그녀의 팔과 다리를 볼 수 있었다. 삐쩍 패인 볼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오들오들 떠는 몸을 보았다. 애써 괜찮은 척 떨리는 팔을 가리는 것도. 하도 닦아 까진 눈가의 붉은 상처도.
그녀와 만나고 매초, 매분 다짐하던 것을 그는 또 한번 다짐한다.
자신은 반드시 지상의 역겨운 그 인간들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안겨줄것이다. 제발 죽여달라고 기고 애원하도록 극한의 고통을 안겨 준 후 그 목을 천천히 도려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