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라는 강했다. 지상의 그 모든 존재보다도 강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
*
하지문이 떠나고 난 뒤 착잡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자신이 말하던 것은 모두 사실이고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마지막 얼굴은 양심을 콕콕 찌르며 죄책감에 들게했다. 게다가 그의 표정에, 자신이 잊고 있었던, 지상에서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떠올랐다.
'제발, 제발 가지마, 제발'
오열하는 지문은 말그대로 바닥을 기며 그녀의 발목을 잡고 애원했었다.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그 장면이 너무 충격적이다. 그 때 그 당시 자신은 정신이 거의 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그를 위로하고, 살필 여유가 없었다. 그의 모든 행동들이 그 당시 그녀에겐 하나도 다가오지 못했다.
구멍에 뛰어들겠다 신전에 말한 다음 날이었다.
그녀가 사랑했던 모든 이들이 그녀에게 등을 돌렸고, 그녀의 희생을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시민들의 외침이 도시를 메웠다. 미안한 얼굴로 외면하는 지인들의 표정이 그녀를 가장 미치게 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피하곤, 잔뜩 찡그린 얼굴로 미안하다며 중얼였다. 그녀는 웃음이 나왔다. 그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도 이해했다.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 그녀는 알고 있었다. 몇 천명의 전사들의 신력을 쏟아부어도 모자라다는 베타균열을 메꾸기 위한 힘의 양.
그들이 그녀를 불렀을 때 그녀는 생각했다.
'어떻게 알았대'
그녀는 분명 나름대로 억제하며 살아왔었는데 말이다. 물론 그들은 모두 성공하면 좋고 아님 말고- 식이었단 것을 나중에 알게되었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을 갈아넣어도 나의 신력보다는 모자를 것이다.
시민들이 울부짖는 환청들이 멈추지가 않았다.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었고 듣고 볼 수가 없었다. 모두가 그녀를 잡고 울며 애원한다. 그래서 수라는 자신을 잡고 애원하는 많은 사람들 중 한명일 뿐인 하지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결국 나가야 하던 때, 그녀는 붙잡는 하지문을 신력으로 고정시킨 후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에게 했던 말이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아니면 그의 '너가 희생할 필요없다. 제발 그러지마' 라는 말에 짧게 '고마워' 하고 답한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결국 모두에게 버림받았고 그녀또한 결정했었기에 갑자기 나타난 하지문의 진심은 잘 닿지 않았다.
그래 고마워. 하지만 결국 너도 내가 죽어야 살테니 사실은 나의 죽음을 원할테지.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진심을 숨기지 않아도 돼.
모든 것이 끝난 이제서야 그의 애원하던 얼굴이 직접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가 좀 심했던가? 무려 신력으로 애원하는 그를 묶고 왔었다. 이제와서는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지만 아마 자꾸 놓고 놔주지 않는 그가 방해돼 무식하게 그녀의 능력으로 의자에 묶어 결박시킨 후 나가버렸던 것 같다.
"....."
내가... 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다.
그 때 동굴 입구쪽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벌써 돌아온건가?
"지문, 나 생각을 좀 해봤는데 내가 좀-"
나가려던 몸이 우뚝 멈추었다. 지문이 아니었다.
새하얀 달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어두운 동굴 안으로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유일하게 지상의 것과 비슷한 것은 새하얀 달이었다. 낮의 푸른 하늘은 평생 볼 수 없게됐지만 유일하게 달이 떠있는 밤하늘만은 계속 누릴 수있었다.
그런 달이 동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새하얀 반짝이들이 떨어지는 긴 은색의 머리칼. 어두운 동굴을 밝히는 보석같은 은빛 눈. 인간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흰 피부. 동굴 바닥을 딛는 새하얀 맨발이 이질적이었다. 한걸음 한걸음이 소리도 없었다.
그것이 자신을 보고는 활짝 웃었다. 뱀처럼 가느다란 눈매 사이에서 은빛 눈동자가 반짝인다. 그리고 다이아몬드 모양 동공.
"....."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바닥을 박차고 멀리 떨어진 곳에 널부러져 있는 장검을 들어올려 날을 세운다.
피가 아우성친다.
지문이 먹인 성석때문에 거의 고갈되어 있던 신력이 아주 조금이지만 어느정도 돌아온 상태. 성력이 강할 수록 마기도 더욱 민감하게 느낀다. 이 상태에서도 저것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마기에 몸이 짓눌렸다. 온 몸의 피들이 요동친다. 진공파에 유리잔들이 공명하듯 온 몸이 공명한다. 식은땀이 흘러내려 느슨해지는 무기를 쥔 손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얼마 돌아오지도 않은 신력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자신은 저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 지옥속에서 유일하게 피해온 존재다. 계속 거처를 옮겼던 이유. 그렇게 몇년을 피해왔던 단 하나의 존재가 어느 새 그녀의 눈 앞에 서 있다.
ㅡ그것도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왜 이제와서? 지금껏 잘 피해다녔고 아주 다행히 저것도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났다. 자신의 몸에서 진동하는 짙은 마기를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고. 아주 당당하게.
그것은 그녀와 자신을 막고 있는 검을 조용히 내려다보고는,
입을 삐죽...? 내밀....어?
"........"
하얀 존재가 한 팔을 쭉 내밀었다. 수라의 몸이 움찔 떨렸다. 더욱 날을 세우고 최대한 자세를 취하려 노력했다. 도저히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겠지....만?
그가 펼친 손에서부터 동굴의 돌바닥 위로, 마석이 후두둑 떨어진다. 엄청난 양의 검은 돌들이 돌바닥에 부딪혀 튀어오르고 떼구르르 굴러 몇개는 그녀의 발에 부딪힌다.
....마석?
그것은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살피는가 싶더니 마석을 확인한 후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는 나의 표정에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마치 어때? 라고 묻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때...? 라니....?
'혹시 위협인가'
자신의 막강한 마력을 과시하는...봐라, 나는 이렇게 강하고 또 이렇게 마석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니 너는 나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런....?
상념에 빠져셔 마석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고 바로 그 순간 섬찟함이 온 몸을 타고 올랐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미소의 얼굴로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반질반질한 투명한 유리알 같아 소름이 돋았다. 미소를 띄울때도 강렬하게 느껴졌던 인외의 이질적인 느낌이 미소를 지우자 완벽하게 인형처럼 보였다.
하얀 남자는 몸을 돌렸다. 그녀는 그 순간이 매우 느리게 느껴졌다. 새하얀 인외의 존재.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고정되어있다, 겨우 떨어지는 눈은 아쉬움이 가득 담겨있어 보였다. 은빛의 잔상. 그것이 서 있는 공간이 일그러졌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훅 줄어드는 존재의 부피. 그가 서 있던 공간에 남은 것은 작디 작은 흰 뱀. 뱀은 아주 빠르게 자리를 쉭 빠져나갔다. 그것이 없어진 자리를 그녀는 한참을 그대로 쳐다보았다.
고요했다.
수라는 힘이 쭉 빠졌다. 과도하게 힘이 들어가있던 약한 근육들이 뒤늦게 찌르르 울렸다. 몸이 버텨내지 못하는 긴장감이었는지 축 처진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넋이 빠진 채 한참을 서 있던 수라는 그것이 나가버린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홀린 기분이었다.
아득해지는 정신에 잠깐 밖으로 시선을 던졌지만, 더욱 아득해짐을 느꼈다. 아득해지다 못해 몸이 휘청였다.
굴 밖에 마물의 사체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붉은 핏자국들이 시체들을 질질 끌고왔음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몇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하지문이 그녀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그는 품에 들고있던 여러 가죽 주머니들을 집어 던지고는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왜 그래 아파?”
“.....”
그는 그녀의 시선이 꽂혀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제서야 마물의 사체로 만든 산을 발견했다. 그의 눈이 찌푸려졌다. 낮게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그의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미친 새끼가...”
그런데 그의 몸 상태가 이상했다. 달려오면서 절뚝이던 걸음걸이를 그녀는 놓치지 않았었다. 그의 입가에는 미처 다 닦지 못한 것같은 핏자국이 남아있었으며 온 몸에 긁히고 시퍼렇게 멍 든 상처들이 보였다. 머리는 부스스하게 엉망이었다. 가죽들도 아까 나갔을때보다 한층 더 너덜너덜해졌다.
“지,지문? 너 근데 상태가...”
“아”
그는 멎쩍은 얼굴로 자신의 왼뺨 위로 손을 올렸다. 이제보니 왼뺨이 미세하게 부은것같았다.
“...그, 마물 사냥을-”
의아했다.
“강한 애였어? 너정도면 웬만하면 수월할 것 같은데...”
“응 뭐”
그는 시선을 피한다.
마물에게 맞은게 쪽팔리구나. 더 묻지않아야겠다. 나는 눈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 지문 근데 우리 지금 빨리 여기를 떠나야 해”
“뭐?”
불안감에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위치가 발각됐어. 빨리 떠나야해”
그의 한쪽 눈썹이 꿈틀 올라간다.
“발각? ...뭐한테?”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 존재를 일반인으로 살아온,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던 나는 지문의 빈 옆자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왕왕이는?!”
그는 자신도 이제야 깨달았는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그는 생각하듯 눈을 굴렸다.
“도망갔는데? 그, 아까 내가 싸웠던 마물을 마주하고나서- 놀라서”
“안돼!”
“수라?”
“안돼 안돼! 왕왕이는 진짜 엄청엄청 약하단말야!! 나랑 잠깐 떨어졌다가 다른 마물한테 잡아먹힐뻔한게 열일곱번은 넘었어!”
그 때 생각이 떠오르자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다른 마물의 아가리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구한 적도 많다. 설마 벌써 잡아먹힌 건 아닐지-
“안돼 안돼, 어디, 어느 방향으로 갔어? 왕왕아!!”
“잠깐, 이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