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그녀를 '신에게 가장 사랑받는 인간'이라 불렀다.
[F 거주지역 바로 옆에 또 발생했습니다! 어서 수용가능한 대피소를 알려주세요!]
[뭐? 없어! 며칠전 B, C모두 박살난거 알잖아! 더 이상 무리야!]
[끝이야...끝이라고! 이제 모두 가족들에게나 돌아가! 이건 모두 부질없는 짓거리야!]
과연 정말 그럴까? 정말 신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녀의 삶과 최후는 신의 계획인가 아닌가. 그녀를 위한 신의 완벽한 계획에 그녀는 최악의 선택을 한 것인가? 아니면 흔히 그들이 말했듯 '고결한 정답'을 택한 것일까? 모든 것들이 그녀가 고결한 정답쪽을 선택하도록 밀어냈었다. 그것은 신의 계획인가?
그때마다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보던 하늘의 푸른색은 현재 이 세계에선 호숫가의 물을 제외하곤 찾아낼 수 없다.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수라, 내 공주님, 눈 좀 떠줘요“
해를 등지고 서있는 남자가 말없이 미소짓는다. 하늘빛 눈동자가 사르르 녹듯 접힌다. 그 환한 미소가 흐릿하다. 가슴이 뻐근하다. 마치 소다 아이스크림이 녹는것처럼 달짝지근한 그 미소가 그녀의 기도를 막는다. 찐득하게 달라붙어 목을 막는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
뼈만 남은 앙상한 자신의 손가락이 그의 얼굴 위에 내려 앉는 순간 잔상은 훅 사라졌다.
그녀의 무감각한 금색 눈동자가 천천히 감겼다, 다시 뜬다.
천천히 돌아오는 초점에 멍하니 앞을 응시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똑같은 풍경, 넓은 호수의 표면과 거친 풀들, 비린내. 볼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까끌한 모래알들이 푸스스 떨어지기 시작한다.
"....."
한참을 미동없이 누워있던 그녀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앉았다. 지금 자신이 무슨 기분인지, 어떤 감정인지 잘 느껴지조차 않는다. 모든 것이 익숙했고, 신체와 정신에 가해지는 한계를 넘은 고통은 그녀를 둔하게 했다.
어느 새 붉은 하늘이 검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입가에 얼룩진 마른 피의 감촉. 입안을 감도는 쇠 맛. 부시시하게 쏟아진 머리칼들 사이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붉디 붉은 해. 과연 저것이 진짜로 해일지, 지상에서 보이는 그 해와 같은 것일지 궁금하다.
푸른 물결은 해의 잔상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마치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
...나의 피까지 섞이면 더 붉어질텐데-
그렇다면, 그렇게 된다면, 더욱 더 아름답지 않을까 이 풍경이, 더 환상적으로-
금안에 권태감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낡고 닳은 지상을 떠올리게 하는 흰 운동화를 벗어 물가 옆에 두었다. 한발자국 내딛자 축축한 모래의 감촉이 발을 감싼다. 나쁘지 않았다.
호수가 만드는 푸른 가로선을 응시했다. 마치 나를 부르는 듯 했다. 고요하고 아늑해보였다.
‘수라야, 안타까워 해주렴. 저 이기적이고 가끔씩은 역겹기까지 한 인간들이지만 그래도 사랑해주렴. 이해하고 지켜주렴. 부탁한다.’
당신의 유언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당신의 의지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고 또 노력했다. 모두가 살 수 있도록 내 본능을 한평생 억누르고 절제하며 살아왔다.
‘수라- 멋있는 이름이구나.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전사에게 지옥을 뜻하는 이름이라니. 내 평범한 이름보다는 훨씬 나아’
이름대로 결국 나는 지옥에 떨어졌고 모든 것을 잃었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해달라 부탁해 사랑했던 인간들은 나의 목을 졸랐고 수렁으로 집어넣었다. 그들이 살기 위해. 나는 더 이상 그들을 사랑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그러니 그만두겠다.
차가운 물이 어깨까지 차올랐다.
얼음장처럼 시려웠다. 이미 발가락의 감각은 잘 느껴지지 않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차분했다. 묘한 기대감마저 들었다. 명치 아래쪽부터 타고올라 간질이는 그 기분이 그녀를 들뜨게했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멍멍한 귀는 소리를 명확하게 집어내지 못했다. 머릿속을 울려대는 살려달라는 민간인들의 비명이 사고를 방해한다.
물소리가 마침내 귀를 가득 채운다. 기도를 꽉 채우는 푸른 물. 발이 닿지 않는 공간에서 부유한다. 푸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팔다리가 떠오른다. 공기방울이 상승해 수면을 향해 달려갔다. 온 몸이 꽝꽝 언다.
크게 물이 첨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물이 출렁인다.
그녀는 작게 눈을 떴다. 검은 해초같은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물살을 가르고 오고 있었다. 붉은 다이아몬드 동공이 푸른 물 속에서 형형히 빛난다. 아득, 이를 누르고 일그러진 표정. 거친 힘이 그녀의 팔을 잡고 끌어올렸다.
숨을 토했다.
”큭!“
멍한 시야 한가운데 남자의 절박한 표정이 가득 찼다. 말캉한 감촉이 입술에 와 닿는 것 같은 순간 다음 숨이 터져나왔다. 정신없이 물을 토해냈다.
몽롱한 시야 사이로 검은색의 구불구불한 머리칼이 보였다.
누군가의 억센 힘이 나의 뒷목을 받쳐 들고 있었다. 검은 하늘이 조각조각 나 부서진다. 빛이 새어들어와 눈이 시리다. 미끌거리는 물방울들이 나의 볼 위 뚝뚝 떨어졌다.
"죽지마. 죽지마 이수라 정신차려"
흐릿한 시야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잔뜩 일그러진, 오열하는 남자가.
"내가, 내가 너 이런다고 포기할것같아? 끝까지 따라갈거야. 천국이든 지옥이든 너가 가는 곳 어디든 끝까지 따라가서 매달릴거야. 알아들어? 날 봐, 이곳까지 개새끼처럼 널 따라온 나를 봐 이수라!!"
소리가 울린다.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쟁쟁하게 머릿속에 부딪히는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여오지 않았다. 이내 뿌옇게 사라지고 더이상 집중할 수가 없음을 느꼈다. 그런데 문득, 몽롱하고 뿌연 머릿속에서 갑자기 어떤 단어가, 이미 잊어버린지 오래였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이수라"
나직한 그의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작게 올라간 눈꼬리와 깊은 미간 주름으로 늘 화나 보이던 그 눈매 그대로. 이 세계의 하늘보다 더 검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는. 그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이는 순간 나는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이 사람이 나오는 환상은 처음이다.
"...뭐야 너"
그런데 완벽하지는 않다. 그의 뺨에 손을 올려보았다. 뭔가 움찔하고 떤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지금 내 몸은 맛이 간 상태니까. 게다가 손에 온기까지 닿아 있는것이 느껴진다. 와 나 진짜 오늘이 마지막인가.
그의 왼쪽 눈 위로 초승달 모양으로 길게 상처가 나있었다. 우둘투둘하게 붉은, 꽤 깊어보이는 상처. 이런 상처 그에게 있지 않다.
머리도 길다.
천연 곱슬이라 관리하기가 힘들다고 늘 짧게 스포츠 머리를 유지하던 그였는데. 내 앞에 있는 그는 눈이 언뜻언뜻 가려질정도로 길어져 있었다.
피식.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긴 머리가 꽤 잘어울렸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 그 구불대는 머리칼을 만져보려 했으나 덜덜 떨리는 손가락 때문에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쉽다. 떨어지는 내 손가락을 쳐다보던 그가 자신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더니 자기 입술 위로 가져갔다. 말캉한 것이 내 손등에 뭉개진다.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미친 이수라. 아무리 정신이 망가졌다고 해도 어떻게 소꿉친구가 이런짓을 하는 환상을 보는거냐.
“미쳤지...”
“사과따윈 안할거야”
응?
왜, 너가 사과를.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낯설었다. 거칠어진 얼굴도 달라진 머리도 모두 낯설었지만 저 눈이 제일 이상했다. 이 지옥에 떨어진 이후 나의 인생은 180도 거꾸러졌고. 온갖 쓰레기들과 오물에 뒹굴며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오다 보면 나는 어느새 인간의 이지를 잊어버린 내 자신을 발견했고. 그를 보며 웃음을 흘리곤 했다. 생각조차 필요없이 보이는 그 어떤 것들도 죽이고 먹고. 토하고. 또 먹고.
그런데 왜 저 눈이 이 곳의 짐승들과 똑같은 눈을 하고 있을까.
내 소중한 친우. 맑은 그 눈을 지키고 싶어서 내가 지옥에 몸을 던졌다. 그러니 그가 저런 눈을 하고 있을 리가 없는데.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어땠더라.
‘아’
그는 울었었다. 난생처음으로 몇십년을 함께 살아온 세월동안 난생처음 그는 오열했다. 눈가가 까질정도로 오열하며 나를 잡고 늘어지는 그를 나는 어쨌던가. 그 손을 무참히 뿌려치고 왔던가. 아니면 함께 울며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던가.
잘 모르겠다.
이곳에 온뒤로 내 기억은 엉망징찬이 되어버렸다. 온갖 독들과 독가스들을 매일매일 섭취한 결과 몸은 무너졌고 정신은 날이갈수록 갉아먹어지고 있었다. 아주 가끔, 정신과 기억이 온전해진 날이 올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날이 가장 힘들었다. 토하고 또 토하고 울고 또 울어도 내 머릿속에 맴도는 소중한 이들의 얼굴이 나를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차라리 잊어버린 날들이 편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날들이 편했다. 그래서 잊고 잊었고 잊어버렸고-
“수라”
아 좋다 너가 이름 불러주니까. 맞다. 내 이름 수라. 수라. 그런거 였지.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 뭐가 또 그의 심경을 건드린걸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해 지문아.
“..또 그런 형식적인 말뿐이지”
아 진짜. 무섭게 또 저런 표정이야. 가만히 있어도 무뚝뚝해보이는 얼굴인데 저렇게 입꼬리까지 삐뚜름하게 올리면 친구인 나조차 소름돋을 정도로 무섭다. 정말 마왕보다 더 무섭다니까, 마력이 전혀 없는 평범한 인간이라는게 놀라울정도지.
그가 그대로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리고 거친 입술이 열렸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이 살짝 휘어졌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사랑해"
훅. 알싸한 향이 나를 덥쳤다. 갑자기 맞닿은 입술 위의 부드러운 무엇 사이로 이가 부딪혀 눈이 핑돌았다. 아파...! 숨이 모조리 뺏길것처럼 거칠고 정신없이 내 입안을 헤집고 있었다. 윽. 허리에 억센 손아귀에 고통이 일었다. 눈 앞이 핑핑 돌았다. 뭐가 대체 뭔지. 원래 죽을 때 이런 느낌으로 죽는건지-
하아....하...
으 흐으 으응 으으-
질척질척한 낯선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이상하다 이게 죽는 느낌이라고? 잠깐? 잠깐잠깐?
“아....윽...아 알고있어, 이거 놔”
갑자기 떨어진 입술에 나는 숨을 그제서야 숨을 몰아 쉬었고 그는 고개를 돌려 누군가에게 말을 내뱉었다. 으르렁 거리며 어금니를 깨무는 듯한 그는 영락없이 낯선 모습이였다.
이게...뭐...
고개를 돌린 그는 나를 다시 한번 보더니 그대로 고개를 내려 다시 한번 나를 덥쳤다. 야이-
내 입속으로 무언가가 들어온가 싶더니 그의 혀가 자꾸 밀어붙이는 바람에 숨을 삼키다 꿀꺽 넘어가버렸다. 곧 어질어질해지며 그의 잔상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