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완벽한 축가
‘할 수 있을까?’
하린이 급격히 긴장하기 시작했다. 도현과의 실랑이로 잊고 있던 긴장감이 몸짓을 크게 불렸다. 그녀의 어깨 위에 앉아 머리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이 노래인가? 두 사람?”
도현은 하린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대기실에 놓여있는 악보를 보고 있었다.
처음 무대에 서면 누구든 긴장하기 마련이라지만, 테스트를 받을 당시에도 당당히 잘 해 던 하린이라 도현은 하린의 불안감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하린이 말하지 않으니 무슨 일인지 묻기도, 아는 척하며 위로할 수도 없었다. 그냥 하린의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해 모르는 척 할 뿐이었다.
그런 도현은 마음은 짐작차 못한 채 하린은 악보를 볼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본다 한들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아는 노래라서.’
하린의 노래방 18번곡이었고, 하린과 세영이 무척 좋아하는 곡이었다. 세영이 언젠가 결혼하면 꼭 축가로 불러달라고 했던 노래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부를 수 있을까?
하린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일어섰다가 걸을 수도 없어 다시 앉았다. 이러기를 서너 번 참다못한 도현이 나섰다.
“다리 아파?”
“아, 아니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려?”
도현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숨길 수가 없었다. 정리되지 못한 감정은 밖으로 뚝뚝 떨어져 나오고 있었다.
하린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커다란 방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하린은 작은 클러치백을 열어 손수건을 잡으려고 했다. 손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헛손질을 했다.
도현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하린의 손을 꼭 잡았다. 행동이 멈춰진 하린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현은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이마를 촘촘히 닦아냈다. 땀이 사라진 이마에 서늘한 한기가 들이닥쳤다. 하린은 움찔! 몸을 떨었다.
“화장실은 저 쪽이야. 참지 말고 다녀와.”
도현은 일부러 농담을 던졌지만 하린은 웃지 않았다. 쏘아붙이지도 않았다. 그저 공포 영화를 보고 밤새 악몽을 꾸다 잠에서 깬 아이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긴장하는 거지?’
하린은 그의 짓궂은 농담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는 오로지 무대에 서야 한다는 사실로 꽉 차 있었다. 무대 위에 서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너무 두려웠다.
다시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똑똑-
노크 소리에 하린의 몸이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작은 균열 하나에도 단숨에 와장창 깨어버릴 듯 한없이 연약했다.
“축가 시작할게요.”
예식 진행을 주는 도우미가 순서만 전하고 쌩하니 사라졌다.
“잘 하고 와.”
도현이 하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에게 기운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놀랍도록 차가운 그녀의 몸에 놀랐다. 하린의 입술이 퍼렇게 질려있었다.
“네.”
하린은 결혼식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떼자마자 바닥이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휘청했다. 커다란 손이 그녀를 단단히 붙들었다.
“괜찮아?”
머리가 핑 돌았다. 잠시 멈춰서 하린은 호흡을 골랐다. 차츰 현기증이 사라졌다.
“괜찮아요.”
하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무대로 향했다. 도현은 뒤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위태위태했다. 당장이라도 기절해 쓰러져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저런 상태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도현의 눈이 걱정으로 어두워졌다.
“자, 다음 순서는 축가가 있겠습니다.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무대 위로 올라선 하린은 박수 소리가 그녀를 때리는 것처럼 아프고 따가웠다. 인상을 찡그리던 하린의 눈에 순백의 아름다움 그 자체인 세영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사람, 가장 행복한 사람, 가장 완벽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잘 됐어.’
하린은 기운을 냈다. 음반이 발매되기 전에 극복해야 할 일이었다. 예상치 못했지만 닥치면 다 하게 될 것이다. 아이라인이여, 기운을 달라!
기타리스트가 기타를 들고 앉아서 하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그 사람을 보고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기타 줄을 튕겼다.
“지치…….”
하지만 하린의 입은 달싹이기만 할 뿐 노래가 나오지 않았다. 눈치 빠른 사회자가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시켰다.
“우리 축가하시는 분이 절친이라고 들었는데 아직 신부님을 보내시기 아쉬운 가 봅니다. 그래도 보내주셔야죠~ 하하하하.”
사회자의 너스레에 한바탕 웃음으로 마무리 되고 다시금 노래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가 시작되었다.
“……….”
이때쯤 노래가 나와야하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기타리스트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하린을 쳐다보았다. 깜깜한 하객 석에서도 웅성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하아.”
하린은 박자를 놓치고 말았다. 전주가 무척이나 짧은 노래였다. 그건 핑계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죠. 기회는 삼세번이죠. 이제는! 신부님을 보내실 준비가 되셨나요?”
마지막 기회였다.
하린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하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세영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하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객 석의 어둠이 하린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숨이 막혀왔다. 이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하린을 쳐다보며 기타리스트가 다시 줄에 손을 갖다 대자 마이크를 쥔 하린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쿵. 쿵. 쿵. 쿵.
하린의 심장박동이 비이상적일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전주는 시작되었다. 노래를 하기 위해 입을 달싹이는 그녀의 손이 갑자기 허전해졌다.
‘어?’
“지친 하루가 가고 별빛 아래 두 사람 하나의 그림자.
눈 감으면 잡힐 듯 아련한 행복이 아직 저기 있는데.”
마이크가 사라지자 익숙한 중저음이 들렸다.
도현은 신랑신부를 향해 인사를 하자 세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랑도 깜짝 놀라 세영에게 속닥였다.
“강도현 아냐? 하린이랑 강도현하고 아는 사이야?”
“몰라.”
강도현이 하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다고. 그녀를 위로 하듯이. 하린은 그가 등장한 이후로 눈에 띄게 안도하고 있었다.
처음, 부들부들 떨면서 안색이 파리해지기까지 하는 하린을 바라보며 세영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나 스스로를 질책하고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잖아.’
약간의 괴로움은 남아있을 수 있지만 이미 극복했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하린의 상처가 아직도 그만큼일줄 몰랐다.
“어머! 어머! 강도현이야!”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도현은 하객 석을 향해서도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도현의 등장으로 식장은 난리가 났다. 함성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느라 플래시가 터졌다.
하린은 작은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았다.
“상처 입은 마음은 너의 꿈마저 그늘을 드리워도
기억해줘 아프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걸”
갑자기 작은 콘서트가 되어 하객들은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사랑해요! 강도현♥” 이라는 핸드폰의 배너가 번쩍이기 시작했다.
“때로는 이 길이 멀게만 보여도 서글픈 마음에 눈물이 흘러도
모든 일이 추억이 될 때까지 우리 두 사람 서로의 쉴 곳이 되어주리.”
도현의 노래가 끝나가자 하린의 마음도 많이 진정 되었다.
비록, 노래를 부르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축가도, 세영의 결혼식도, 사고 없이 마무리 되었다. 아니 평생 잊지 못할 결혼식이 되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하린은 무척이나 감사했다.
“제가 잠깐 인사 좀 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아일랜드의 강도현입니다.”
노래가 끝나자 도현은 사회자의 양해를 구했다.
“저의 깜짝 이벤트 마음에 드셨나요? 우리 후배님의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워 다들 속아 넘어가셨죠?”
하객석 곳곳에서 까르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제야 얼었던 하린의 얼굴이 풀어졌다.
“아끼는 후배의, 절친한 친구인, 세영 씨의 결혼식에 초대를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두 분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저는 이만 내려가겠습니다.”
어디선가 ‘가지마!’ 라든가 ‘앵콜!’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도현은 웃음 띈 얼굴로 다리가 불편한 하린의 손을 붙잡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하린은 대기실로 들어가자마자 쓰러지듯 앉았다. 긴장이 풀리자 갑자기 아픔이 느껴졌다. 두통이 머리를 쪼아대고 있었고 팔 다리는 근육통이 온 것처럼 아렸다. 하린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도현은 그런 하린을 보고 있었다. 어두운 무언가가 그녀를 덮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린답지 않게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늪에 빠졌지만 헤어 나올 생각조차 없는 진득한 패배감이 몸을 휘감은 사람처럼 보였다.
“박하린.”
부름에 하린이 서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현은 지금까지 하린을 괴롭히는 일이 뭔지 물으려 했다. 도와주고 싶다고. 무대에서 같이 노래를 하고 싶다고.
누군가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걸기 전에는 관심을 내보이지 않았다. 도를 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고 남의 삶에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우진이 떠올랐다.
그에게 고민을 내비쳤었던 날, 우진의 마음도 모르고 무참히 사랑을 정리하라고 말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최선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에게 쪽지 하나 남겨두고 사랑을 쫓아가버렸다.
‘우진처럼, 그냥 사라져버리면 어쩌지?’
하린 또한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영영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네?”
마음속에 맴돌던 말들이 허공 속으로 사라지며 도현이 입을 달싹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길을 잃어버렸다. 헤매던 눈에 생수 2병이 나란히 놓여있는 것이 들어왔다.
“물?”
도현이 물을 내밀었다. ‘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탐색하는 사람처럼 그와 물을 천천히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이건 내가 아니라 당신에게 필요할 것 같은데요. 노래 부른 사람은 당신이잖아요.”
하린의 목에서 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의 거칠어진 목소리를 들으니 물을 꼭 마시게 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현은 물을 마셨다. 이래도 안 마실 거냐며, 생수 CF를 무려 5년 이상 하고 있는 도현의 이 모습에도 흔들리지 않냐며. 그러나, 하린은 움찔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물에서 맥주 맛이 느껴져. 입 안에서 기포가 터지는데?”
도현이 진지하게 하린 앞에서 물을 흔들었다. 출렁이는 수평선에 거품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거 당장 신고해야겠네요. 물맛이 이상하다고.”
하린이 피식 웃었다. 이상한 포인트로 하린을 웃게 만든다. 마치, 그녀에게 괜찮다, 라고 위로하는 사람처럼. 그의 따스한 마음이 하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확인도 안 해보고 신고할 건가?”
“네, 제가 졌어요. 주세요.”
그의 갸륵한 정성에 감동한 하린은 물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도현이 뚜껑을 오픈한 물병을 쥐어주었다.
목으로 물이 넘어가자, 얼마나 목이 말랐는지 느낄 수 있었다. 한 병을 다 마신 후에야 하린은 물병을 내려놓았다.
“안 줬으면 큰일 날 뻔 했는데.”
“이정도야 기본 아닌가요?”
한 모금으로 시작해 한 병을 끝낸 하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두통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얼얼하던 팔로, 다리로 맑은 피가 도는 기분이 들었다.
하린의 표정을 보니 조금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알고 보니 박하린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 같군.”
“왜요?”
“함부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 슈퍼스타 강도현의 라이브를 두 번이나 들었잖아. 그것도 공짜로.”
“네. 그건 인정해요. 노래는 정말 잘 부르네요.”
하린은 순순히 인정했다. 처음 그의 노래를 들었을 때도, 녹음실에서 녹음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부러웠다. 그 부러움은 질투심까지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더니 강도현은 예외 같았다.
노래도 잘하고, 작곡도 잘하고, 알고 보니 성격도 이상한 면에서 좋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다. 무척 탐이 나는 남자였다.
“순수하게 인정하다니, 박하린이 물을 마시고 미쳤나?”
“정말 맥주 맛이 나더라고요. 좀만 더 마셨으면 취할 뻔 했어요.”
하린이 입꼬리를 늘리며 웃었다. 하린은 마음의 잔재를 툴툴 털었다.
“고마워요.”
도현이 무슨 일이냐며 묻지 않아줘서,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아도 되서 고마웠다. 그가 물을 건네서, 미쳤냐며 농담을 건네서 고마웠다.
“별말씀을.”
도현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하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린이 작게 미소 지었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빼꼼 열렸다.
“부케 받으시는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