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그와 그녀의 입술이 만나는 순간.
“액션!”
도현의 말과 감독의 말이 겹치면서 익숙한 멜로디가 다시 귓가에 울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하린을 향하고 있었다. 한 손은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손이 그녀의 입술을 매만졌다. 박하린만을 원하는 눈빛이 오로지 하린에게 쏟아졌다.
촉촉한 하린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의 강렬한 페로몬이 하린의 주위를 감쌌다.
하린의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다. 긴장감은 그녀의 눈가 언저리에 남아 속눈썹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하린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이끌렸다. 그녀의 눈이 감겼다. 그도 눈을 감았다.
그와 그녀의 입술이 만나는 순간,
음악도, 카메라도, 사람들도, 촬영장 안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하린과 도현만이 남았다. 오로지 들리는 것이라곤 그녀와 그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도현이 꼭 다물어진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달짝지근한 맛이 났다. 입 안에 꿀이라도 숨긴 듯 그 향기가 강렬했다.
그가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두드렸다. 배려하는 그의 몸짓에 하린의 몸이 나른해졌다. 뜨거운 숨이 토해져 나왔다. 그녀의 입이 벌어지자 때를 놓치지 않고 그가 들어왔다.
조심히, 그리고 천천히.
정말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모든 것을 쓸고 지나갔다.
하린이 본능적으로 더 다가들며 그의 머리를 감싸자 그의 팔은 하린의 등을 감싸 더 끌어당겼다.
하린은 아득했다. 정말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이 그녀의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촬영일 뿐이라는 사실은 저 멀리 사라진 상태였다.
‘나는 박하린을 사랑해.’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조언을 건네고 난 이후, 그 말은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 돌아왔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녀의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설레었고 그 설렘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고 있었다.
감독의 액션 소리가 들리고 그녀가 다가오자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를.
처음 그녀는 도현에게 김우진의 부작용 같은 것이었다. 생각지 못한 처음 보는 아주 사소하여 신경 쓸 이유도 없는 그런 것이었다. 겨울이면 으레 지나가는 감기처럼 무시해버렸다. 언젠가는 사라져버릴 바이러스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바이러스는 그를 서서히 감염시켰다. 그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천천히, 세포 하나하나씩, 그의 심장까지도 모조리.
하루에도 여러 번, 문득 이유 없이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한 시간이 많아졌다.
함께 하는 순간에는 그의 신경은 온통 그녀로 향했다. 그녀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한 번 웃으면 그의 마음도 환해지고 그녀가 힘들어하면 그의 마음도 어둠으로 가득 찼다.
그의 상태를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에 그녀가 노래하는 걸 듣게 됐다. 그녀와의 피처링을 추진하면서 그녀의 목소리에, 그녀 자체에 눈길이 갔다. 어쩌면 어렴풋이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목소리에서 헤어 나오기라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의 호흡을 들이마시며, 그는 인정했다. 박하린에게서, 헤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도현은 그녀의 입술을 훑으며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얇은 옷 사이로 그녀의 뜨거운 피가 느껴졌다. 뜨거운 피가 심장 속으로 강렬하게 펌프질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 또한 그처럼 흥분된 상태라는 사실에 손끝이 짜릿해졌다.
그녀의 등을 감싸던 그의 팔이 그녀의 척추를 타고 목까지 올라왔다. 그녀의 목을 쓰다듬자 하린의 솜털이 바짝 일어서는 것이 느껴졌다.
찌릿한 느낌에 하린이 움찔하자 갑자기 그가 돌변했다. 도현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며 끌어당겼다. 그녀의 입술 사이를 거칠게 파고 들었다.
하린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몇 초의 시간이 그녀에게는 길고 긴 시간 같았다. 그의 존재감만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살포시 내려앉던 나비 같던 도현은 사라졌다. 그녀의 입술 안으로 들어온 그는 박하린이라는 작은 사슴을 노리는 한 마리의 사자 같았다. 천천히 입안을 훑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나오기를.
하린은 용기를 내어 그에게 먼저 촉, 하고 닿았다. 0.5의 시간 동안 그의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적 없다는 듯 그가 움직였다. 그에게 먼저 닿은 그녀를 혀끝으로 어루만졌다. 먼저 와서 고맙다는 듯이.
그리곤 강렬히 끌어당겼다.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들이마시고 싶었다. 그녀의 입술도, 그녀의 타액도, 그녀의 마음까지도 모두 도현의 것이었다.
“오케이!”
오케이? 이건 무슨 소리지? 하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너무 가까워 보이지 않던 그가 보였다. 그의 눈이 그녀를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좋아! 좋잖아! 이렇게 한 번에 오케이 갈걸. 잘했어. 하린씨.”
저 멀리 앉아 있는 앉아있는 감독의 목소리에 하린이 화들짝 일어났다. 은은한 조명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카메라가 하린에게 현실을 자각하게 했다.
‘헉, 나 지금 뭐한 거야!’
하린이 도현에게서 후다닥 떨어졌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어떻게 촬영이라는 걸 잊을 수가 있지! 오케이 사인이 나지 않았더라면 하린은 완전히 빠져들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도현은 갑자기 허전해진 손을 바라보다가 바닥에 툭, 하고 떨어뜨렸다. 방금 전까지는 손에 화상을 당한 듯 뜨거웠는데 지금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몸 안에서 무언가 쑤욱하고 빠져나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확인합시다.”
감독이 그들을 부르자 도현과 하린이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지금으로선 감독이 부른 게 너무 고마웠다. 빨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화면 속 그들의 모습은 방금 전 상황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직접 경험했던 것을 다시 보는 것은 이상한 경험이었다. 마치, 그들이 다시 키스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예쁘게 잘 나온 것 같은데. 도현 씨는 어때?”
“괜찮네요.”
하린은 옆의 도현을 슬쩍 훔쳐보았다. 그는 무표정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하기엔 눈썹이 일자였고 부끄럽다고 하기엔 입이 일자였다.
“하린 씨도 잘했어.”
“아, 감사합니다.”
하린은 칭찬을 받는 게 멋쩍었다. 그래도 욕을 먹는 것보다는 훨씬 기분이 좋았다.
“자, 이것으로 촬영은 모두 마무리 합시다. 다들 수고했어. 자! 회식들 가보실까?”
“수고하셨습니다.”
감독이 일어서자 하린과 도현이 꾸벅 인사를 했다. 멀뚱히 서 있는 둘의 분위기가 무척이나 어색해졌다. 도현은 깨달은 자신의 마음에 골똘해 있었고 하린은 생전 처음 있는 이런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몰랐다.
프로페셔널하게, 아주아주 쿨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원래 행동하던 대로 행동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녀의 몸은 깁스했을 때보다 더 굳어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꺼내고 싶었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죄다 촬영과 관련된 것뿐이었다.
‘고생했어요.’
뭐가? 나랑 키스하는 게? 삑- 탈락.
‘역시, 연기 잘 하시네요.’
뭐가? 나를 사랑하면서 키스하는 연기를 하는 게? 삑- 탈락.
아예 말을 말자. 하린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인상을 쓰고는 그녀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있었다.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해도 되는 이 상황이 나을 수도 있겠다. 어색어색한 민망민망한 이런 상황 정말 싫다.
“형, 누나 고생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나자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승훈이 쪼르르 달려왔다. 하린의 얼굴이 펴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맞다! 우리에겐 승훈 씨가 있었지! 승훈 씨 없었으면 큰 일 날 뻔 했네!
“케미 완전 대박이에요. 뮤비 공개되면 난리 날 것 같아요.”
촬영장은 완전 후끈 달아올랐었다. 뮤직 비디오에도 그런 분위기가 녹아들어갈 것 같았다.
“역시 누나 잘 할 것 같았어요. 나중에 연기자로 전향해도 될 것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
사장님의 생각대로 이슈 몰이에 성공할 것이다. 도현의 파격적인 키스신이 화제가 될 테고, 그 상대가 누군지에 대한 궁금증이 폭발할 것이다.
승훈은 기분이 좋았다. 이 앨범도, 하린도 모두 다 대박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몇 년간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그에게는 ‘감’이 생겼다. 최소 성공 여부 정도는 맞힐 만큼의 감이었다.
“잘하다니, 에비. 잘하는 것도 좀 웃기다고요”
하린은 무척이나 부끄러워하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하. 맞다. 그렇죠, 참. 그래도 그것도 연기니까 잘하는 게 좋은 거예요.”
하긴, 조금 민망하기도 하겠지. 아무리 연기라지만 자신도 좀 민망할 것 같았다.
“감독님이 같이 식사하시고 가자는데, 누나도요. 형은 어떻게? 그냥 정리하고 바로 가실 거죠? 저흰 빠진다고 말씀 드릴게요. 누나는 먹고 있어요. 제가 형 모셔다 드리고 다시 올게요.”
승훈이 도현에게 물었다. 스태프들은 이미 분주하게 장비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정말요? 그럼 저야 땡큐죠.”
하린이 승훈의 배려에 씨익 웃었다. 신인이면서, 뜬 신인도 아니고 곧 데뷔할 신인이 도현처럼 쌩하니 갈 수는 없었다. 나중에 집에 혼자 가려면 엄청 고생하겠다 생각했는데 역시 승훈이었다.
“밥 먹고 가자.”
도현의 말에 승훈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네? 형 밥 먹고 갈 거예요?”
이거 지금 강도현의 입에서 나온 말 맞나? 몇 개월 동안 프로그램을 같이 한 것도 아니고, 앞으로 몇 개월 동안 프로그램을 해야 할 것도 아니고! 회식이라면 끔찍하게 싫어하는 저 인간이 지금 회식에 참석하겠다고?
“왜요?”
“배고파서.”
도현은 정말 배가 고프다는 듯 날씬한 배를 매만지며 정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승훈의 싸늘한 눈빛이 도현의 등에 꽂혔다.
‘왜 안하던 짓을 하는 거야, 저 양반이. 불안하다. 불안해!’
* * *
회식 장소는 고깃집이었다. 새벽 1시가 가까워져 가는 시간임에도 회식에 참여한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자자, 주목.”
생각보다 짧은 촬영에 만족한 감독이 일어서서 잔을 들었다. 시끌벅적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오늘 촬영 다들 수고 많았어요. 우리 스태프들이야 워낙에 베스트고. 우리 강도현 씨야 워낙 잘하는 걸 알고 있고, 최고의 작품이 나왔다니까. 이멤버 리멤버~”
장난스런 감독의 애교에 도현이 씩 웃어보였다.
“우리, 하린 씨도 고생 많았어. 그럼 모두 잔을 들고!”
감독은 하린에게도 엄지를 들어보였다. 촬영장에선 무척 예민하고 까칠해보이던 사람이 무척 호탕한 인물로 변해있었다.
“우리 <끌림>의 대박을 위하여!”
“위하여!”
감독의 선언에 따라 모두들 한입에 술을 털어 넣음으로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승훈은 도현의 곁에서 조용히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온 신경은 도현과 하린에게 나누어져 있었다. 회식이 처음인 하린에게 혹시나 짓궂은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경계하고 있었고 도현은 도현대로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여 신경이 쓰였다.
“형, 드세요.”
도현은 배가 고팠다고 말한 사람 치고 거의 먹질 않고 있었다. 특별히 누군가와 담소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술을 마시지도 않았다.
그냥 앉아 있었다.
‘먹지도 않을 거면서, 왜 와서 죽상을 하고 앉아 있는 거야?’
승훈은 도현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도현은 승훈의 예의 없는 시선은 무시한 채 하린을 보고 있었다.
도현의 맞은편에 앉은 하린은 주변 사람들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부지런히 먹고 있었다. 하루 종일 긴장감으로 거의 먹지 않은 걸 다시 채우기라도 하는 듯이 먹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귀엽군.’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데 한 남자가 하린 옆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