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우리 여울이 데려와야겠어.”
“왜?”
주선이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한 서희가 태욱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우재가 없음을 알게 된 주선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티다가 조금 전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정말 우재가 살아 있다면, 그 사람이 우재의 기억을 읽을 거야.”
말을 멈춘 서희는 자고 있는 주선의 모습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우재를 걱정하는 주선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었다.
“그러면 분명히 여울의 존재를 알게 될 거야.”
서희는 갑자기 몸서리를 쳤다. 여울이를 납치해가려던 근택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런 일을 절대로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건 태욱도 마찬가지였다.
“주선이 옆에 한 명은 있어야 되지 않아?”
태욱의 말에 서희는 망설였다. 한 명이 남아야 한다면 그건 자신이어야 했다. 그녀는 운전도 못했고, 또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태욱보다 불리했다. 태욱도 그걸 알고 있는지 혼자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서희는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더 함께 가고 싶었다. 한시라도 빨리 여울을 품에 안고 싶었다.
“주선양은 좀 어떻습니까?”
병실 문이 열리면서 경호가 얼굴을 내밀었다. 서희는 지금처럼 경호가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둘은 그길로 태욱의 부모님과 함께 있는 여울을 데리러 갔다. 다행히 태욱 부모님의 신변은 경호가 책임져 주기로 했다. 그는 태욱의 부모님을 WSBC에서 실시하는 행사에 당첨된 것처럼 꾸며서 해외여행을 보낼 생각인 것 같았다. 담당자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서 지시를 내리는 모습이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점심이라도 같이 먹고 가지.”
태욱의 엄마는 현관을 나서는 아들내외와 손녀가 아쉬운 듯, 한 번 더 그들을 붙잡았다.
“그래, 엄마가 된장찌개 맛있게 끓여놨는데.”
태욱의 아빠도 옆에서 거들었다.
“된장찌개 얘기는 왜 해요? 짜다고 타박이나 하면서. 된장찌개 말고, 밖에서 맛있는 거 사먹자.”
“아니에요. 어머님. 지금은 바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
서희는 시아버지를 노려보는 시어머니의 시선을 얼른 자신에게로 돌렸다.
“밥은 다음에 먹어요.”
가만히 서 있다가 서희의 눈총을 받은 태욱은 마지못해 엄마가 듣고 싶어할 만한 말을 했다.
“그래요. 어머니, 다음에 시간 많이 내서 여울이랑 놀러 올게요.”
“그래. 태욱이가 바쁜 척하면 쟨 빼고 와도 돼.”
“네. 그럴게요.”
서희는 오래 머물지 못해 죄송한 마음을 어색한 미소로 대신했다.
“여울아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인사 해야지?”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또 놀러 올게요!”
서희의 말을 듣자마자 여울은 기다렸다는 듯이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씩씩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래. 여울아, 다음에 또 놀러 와라.”
인사를 마치자마자 요란한 벨소리가 울렸다. 태욱의 아빠에게 온 전화였다.
“모르는 번혼데?”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한 아빠는 휴대폰을 그대로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전화를 받던지, 그것도 아니면 끊던지 해야지. 시끄럽게 그냥 두면 어떡해?”
“그래요, 아버님. 전화 받아보세요.”
“그래? 그럼 그럴까?”
아내를 노려보던 그는 며느리의 말에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제가 최기식 맞습니다만.”
“하여튼 맘에 안 들어.”
서희는 사소한 일로 투닥거리는 두 분의 모습이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네? 어디요? WSBC요?”
시아버지의 통화내용을 엿들은 태욱과 서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모든 게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다. 서희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잠든 주선을 두고 나온 게 벌써 두 시간 전이었다.
“여울아, 이모한테 와!”
주선은 여울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서희의 손을 잡고 있던 여울은 아무 망설임 없이 주선을 향해 달려갔다. 서희와 태욱이 여울을 데리고 다시 병실로 돌아왔을 때, 주선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경호는 급한 일이 있는지 그들이 오자마자 병실을 떠났다. 태욱은 경현의 상태를 살폈다. 아직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모, 어디 아파?”
주선의 품에 안겨 있던 여울이 고개를 들어 주선을 걱정했다.
“아니야. 이제 괜찮아.”
“정말? 여울이가 와서 괜찮아진 거야?”
“뭐? 하하, 그래. 그런가보다. 이모가 여울이 덕분에 웃는다.”
“또 아프면 말해요. 여울이가 호! 해줄게요.”
여울은 주선의 목을 끌어안았다. 주선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서희와 태욱은 그런 주선과 여울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흐음.”
건조한 신음이 여울이로 인해 환해졌던 병실의 분위기를 깨뜨렸다. 경현이었다.
“정신이 들었나봐.”
서희가 두려운 듯 태욱의 뒤로 숨었다. 그의 기억을 읽었을 때 봤던 어둡고 음침한 기운이 고스란히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여기는?”
그의 목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입안이 바짝 말라있는 것 같았다.
“병원입니다. 당신은 33층에서 떨어졌어요. 기억이 납니까?”
태욱의 말을 들은 경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하아,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군요.”
다시 입을 연 그는 잔기침 때문에 말을 길게 하지 못했다.
“미안합니다. 제 의지로 한 일은 아니었어요.”
경현의 목소리에는 회한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주선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이완우, 그자는 사람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당했지요.”
경현은 잔기침 때문에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누가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그가 심어 놓은 것들이 제 머릿속에서 사라졌어요.”
주선은 서희를 쳐다보았다. 주선과 눈이 마주친 서희는 그의 기억을 엿보다 만났던 검은 기운들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들러붙는 그것들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짓이기며 겨우 떼어내고서야 서희는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