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직 선생님을 완전히 믿지 않아.”
주선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서희는 SA본사에 가기로 결정을 하고나서 그녀가 조심스럽게 건넨 말을 떠올렸다. 서희도 그녀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10년 동안 자신을 부모처럼 따랐던 주선을 완벽하게 속인 여린이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그녀의 말과 행동이 모두를 속이기 위한 것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주선이 문 밖에서 천리안을 이용해 망을 보고, 서희는 그녀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됐어. 이제 돌아가자.”
여린이 방에서 나왔다. 그녀의 뒤로 태욱과 우재도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에서 벗어나질 않는군.”
몸을 일으키려던 서희는 소름끼치는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서희는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서 열 발자국 쯤 떨어진 곳에 있던 검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주선아! 어떻게 된 거야?”
서희는 앞에 있던 주선의 어깨를 건드렸다.
“주선아!”
서희는 곧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주선은 마치 얼어버린 것처럼 전방을 주시하던 모습 그대로 쓰러졌다.
“권경현!”
주선이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한 여린이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쉬익!’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조심해!”
우재가 태욱의 얼굴 위로 손을 뻗었다.
“윽!”
우재의 신음소리와 함께 빨간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어떻게 된 거야?”
태욱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도 몰라. 능력이 통하지 않아.”
“료카? 그렇다면 소우타도 있겠군.”
우재의 상처를 살피던 여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짝짝짝’
서희의 뒤에 있던 소름끼치는 목소리의 사내가 갑자기 박수를 쳤다.
“역시 잘 알고 있군. 료카와 소우타의 존재는 비밀인데 말이야. 그 점은 칭찬해 주지.”
“이완우!”
여린이 서희의 뒤에 있던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여린이 완우라고 부른 인물을 보는 우재와 태욱, 서희도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설마, 내가 이 정도도 대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여린은 말없이 이를 악물었다.
“저기 쓰러져 있는 아이는 천리안인가 보지? 멀리 있는 권씨와 눈이 마주친 걸 보면. 이렇게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는데 말이야.”
그의 말이 끝나자 어둠 속에서 노신사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완우의 말대로 그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완우의 곁에 선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아무런 감정도 없는 사람 같았다.
“저 노인과 절대로 눈 마주치지 마. 눈을 마주치면 주선이처럼 그대로 얼어버리니까.”
여린이 차분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경고를 했다.
‘쉬익!’
다시 한 번 어둠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여린은 작은 고갯짓만으로 상대의 보이지 않는 공격을 피해냈다.
“호, 역시! 내가 추천한 인물 답구만!”
“료카야. 우리 능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수리검 형태의 기를 날리니까 조심해. 막을 수는 없어도 피할 수 있을 거야.”
완우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여린은 태욱과 우재에게 지금부터 상대할 적에 대해 설명을 했다.
“그리고…… 앗!”
우재에게 고개를 돌리고 있던 여린 앞에 갑자기 나타난 어두운 그림자가 덮쳐왔다. 여린의 몸은 그대로 문까지 날아갔다. 그대로 몸을 문에 부딪친 여린은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음, 이건 소우타야.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순간 스피드를 이용한 공격을 하지.”
여린은 입술에 묻은 피를 닦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나마 그림자에게 공격을 당하는 그 찰나의 순간, 본능적으로 방어를 한 덕분에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그래, 맞아.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지?”
완우는 두 팔을 들어 올리면서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태욱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무력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능력도 사용할 수 없었고, 전투능력도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진 상대 앞에서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서희는 이미 공포에 질려 있는 얼굴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주선이 눈에 들어왔다. 주선을 감싸듯 앉아있는 우재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손에서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고 있었다. 그들 앞을 막아서고 있는 여린의 어깨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우재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능력을 이용해 더 이상의 출혈은 막고 있지만 제대로 된 조치가 필요했다. 주선은 여전히 쓰러져 있었다. 어깨가 들썩이는 걸로 봐서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희에게는 처음부터 전투에 대한 기대치가 없었다. 하지만 태욱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타격이 컸다. 료카와 소우타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여린은 조금 전보다 눈에 띄게 지쳐 있었다. 중력지배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공격과 눈이 따라갈 수 없는 속도를 이용한 공격 모두 여린과 우재 같은 중력지배자들에게는 천적이었다. 여린에게 이 이상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여린은 이 사건을 해결하는데 꼭 필요한 중요한 인물이었다. 만에 하나 그녀가 죽기라도 한다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어쨌든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건 이쪽이었다. 우재는 쓰러져 있는 주선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우재야!”
서희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별안간 우재가 완우와 권씨를 향해 몸을 날렸다.
“뭐야?”
우재는 완우와 권씨를 동시에 창밖으로 날려버릴 생각으로 힘을 사용했다. 하지만 실제로 날아간 건 권씨 한 명이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완우에게도 중력지배의 능력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의 계획대로 창문이 깨졌다는 것이었다. 권씨는 33층에서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윽!”
여린을 공격하던 료카와 소우타가 동시에 우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들었던 팔을 떨어뜨린 우재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왼쪽 어깨와 오른쪽 종아리에서 동시에 피가 뿜어져 나왔다.
“우재야!”
태욱이 우재의 이름을 외침과 동시에 우재가 그들을 향해 뒤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우재를 보는 서희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우재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그때였다. 여린과 주선, 그리고 태욱과 서희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권씨가 깨뜨린 창문을 향해 날아갔다.
“선생님, 뒤를 부탁해요!”
우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제 최대한 시간을 끄는 일만 남았다.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에서 오래 버틸 자신은 없었다.
“안 돼!”
서희의 간절한 외침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여린도 속수무책이었다. 여린이 할 수 있는 건 건물 밖으로 던져진 자신을 포함한 4명의 무게를 자유낙하하지 않도록 견디며 천천히 내려가는 게 전부였다. 하늘에 흩날리는 하얀 눈들이 곁을 지켜주는 것처럼 그들과 함께 천천히 내려갔다. 첫눈이었다.
서희는 첫눈을 반기는 사람들의 환호소리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건물에서 멀어지는 서희의 눈에 료카와 소우타의 계속되는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머리를 떨어뜨리는 우재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