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한테 미리 귀띔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잖아!”
서희에게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주선은 볼멘소리를 했다. 서희의 거듭된 사과에도 쉽게 마음이 풀어지지 않았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부모님 다음으로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생님과 하나뿐인 절친이 자기만 쏙 빼놓고 이런 어마어마한 비밀을 만든 것도 기분이 나빴다. 선생님이 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밤잠 설쳐가며 혼자 고민하고, 괴로워했던 날들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서희보다 선생님이 더 미웠다.
“선생님,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어요?”
주선이 이번에는 공격타깃을 가여린으로 바꾸었다.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왜요? 어차피 이렇게 다 알게 될 거 미리 알려주면 좋았잖아요!”
“그래, 그래서 지금 이렇게 온 거야. 어차피 알게 될 거 미리 다 말해 주려고.”
여린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모두들 숨을 죽였다.
“우선 내가 서희한테 비밀로 해 달라고 한 건, SA아시아 총책임자인 이완우 때문이야.”
“아시아 총책임자라면……”
“그래, 동부아시아 본부장인 내 직속상관이지.”
우재의 마음을 읽은 여린이 그 대신 말을 끝맺어 주었다.
“그 사람이 왜요?”
“그는 사람의 기억을 읽을 수 있거든.”
“독심술 같은 건가요?”
우재였다.
“글쎄. 어떤 방식인지는 나도 몰라. 그것 말고도 다른 능력이 있는 것 같은데 SA 내에서도 그의 능력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
“그래서 처음부터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었다는 말을 하지 않은 거예요?”
“그래.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안전하거든.”
그들은 지난 5년간 SA와 아무런 충돌이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럼 이렇게 공개적으로 저희와 함께 하신다는 건……”
가만히 듣고만 있던 경호가 끼어들었다.
“맞아요. 얼마 전 방한한 일본총리와 함께 이완우가 들어왔어요. 그리고 내가 배신했다는 걸 알아버렸죠. 덕분에 저도 이제 SA에게 쫓기는 몸이 됐어요.”
“선생님!”
주선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여린을 쳐다보았다.
“괜찮아. 어차피 각오하고 있던 일이야. 슬슬 SA라는 조직이 싫어지던 참이기도 했고.”
“그 SA그룹에 대한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경호가 여린을 향해 정중한 어조로 부탁했다. 여린은 경호를 잠시 응시하다가 태욱과 서희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궁금한 게 많겠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아는 건 다 말해줄게.”
여린은 우재와 주선에게도 시선을 나누어 주었다.
“꼭 다시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 그치?”
주선에게 시선을 멈춘 여린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주선도 여린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아까 문밖에서 잠깐 들었는데, SA그룹의 시작에 대한 건 경호씨의 조사가 다 맞아요. 저는 그 다음부터 얘기하죠.”
모두들 여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SA그룹은 공간지배자인 조태필 회장님 아래 다섯 명의 능력자가 전 세계에 있는 SA그룹을 나눠서 관리하고 있어요.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이렇게요. 물론 그룹의 시작이 한국인만큼 한국이 속해 있는 아시아가 가장 파워가 세죠. 그들의 능력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어요. 기본적으로 비밀이 많은 집단이죠. 나도 아직 조태필 회장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으니까요.”
“그 파워가 가장 세다는 아시아 총책임자가 이완우인 건가요?”
태욱이었다.
“맞아요. 조태필 회장님은 나이를 이유로 활동을 거의 안하시기 때문에 현재 SA는 그의 뜻대로 운영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여린이 태욱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완우라는 사람이 아까 기억을 읽는다던 그 사람이지?”
주선이 헷갈리는지 중간 정리를 했다.
“맞아.”
우재가 여린을 대신해서 대답했다.
“SA그룹이 태욱을 잡으려는 이유는 뭐죠? 단순히 창업주와 능력이 같기 때문인가요?”
주선에게서 시선을 뗀 우재가 여린을 똑바로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의 질문에 태욱과 서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처음부터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었다.
“그건 아닐거야.”
여린이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감았던 눈을 떴다. 눈빛이 반짝였다.
“창업주가 활동을 중단하게 된 건 25년 전이야. 아내가 죽고 나서부터였지. 창업주는 그때부터 오로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연구에만 몰두했어. 마치 뭐에 홀린 사람 같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지. 그리고 그 연구를 주도한 사람이 바로 이완우야. 그가 단숨에 ‘아시아총책임자’라는 높은 직책을 갖게 된 것도, 그리고 SA의 실세가 된 것도 다 그 덕분이지.”
“그런데요?”
주선이 잠시 숨을 고르는 여린에게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15년 전부터 그 연구가 거의 중단이 되었어. 조태필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문이 파다했지. 어쨌든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어.”
여린이 갑자기 말을 끊고 태욱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 생각에는.”
태욱도 여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공간지배능력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서 태욱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
여린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태욱은 5년 전, 자신을 실험쥐 취급하던 진상을 떠올렸다. 모두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참, 이건 결혼선물!”
여린이 밝은 목소리를 내며 무거워진 분위기를 깨뜨렸다.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낸 그녀는 우재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당황한 표정의 우재는 선뜻 상자를 받지 못하고 주선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 결혼식 때 주려고 했는데, 그때는 줘도 안 받을 것 같아서 못줬어.”
여린은 우재의 손을 잡아다가 억지로 상자를 안겼다.
“고맙습니다.”
우재는 얼떨결에 여린이 내민 상자를 받아들었다. 상자 안에는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한 눈에도 좋은 제품인 걸 알 수 있었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걸로 샀어. 마음에 들어?”
“네. 고맙습니다.”
주선은 우재의 선물만 준비한 여린이 서운했지만 표현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우리 주선이 잘 부탁한다는 뜻으로 주는 선물이니까 절대로 부담 가져야 된다!”
여린은 주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우재에게 장난치듯 말했다.
“그런데 너희들 정말 잘 만났다!”
여린은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며 주선의 눈치를 보고 있는 우재와 그런 우재에게 레이저를 쏘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주선을 번갈아보았다.
“네? 그게 무슨……?”
주선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해 준 적 없나? 아니면 우리 머리 나쁜 제자가 기억을 못하는 건가?”
여린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이 그녀의 얼굴에 드러났다.
“능력끼리도 궁합이 있거든.”
여린이 윙크를 하며 모두를 쳐다보았다.
“궁합……이요?”
우재였다.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래, 궁합! 지금 우재와 주선, 너희처럼 말이야.”
“저희가 궁합이 좋은가요?”
주선의 얼굴은 어느새 상기되어 있었다.
“그래, 거의 최상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지. 만약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우재의 중력지배와 염력, 그리고 주선의 천리안을 모두 물려받으면 앉은 자리에서 천리에 이르는 모든 만물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는 거지.”
“와!”
“대박이다!”
태욱과 우재가 서로를 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럼 얘네는요?”
주선이 서희와 태욱을 가리켰다.
“서희는 미래를 본다고 했지?”
여린이 서희의 능력을 다시 확인했다. 근택의 공격이 있고 난 후에 서희에게 직접 들은 것이었다.
“네.”
서희가 짧게 대답했다. 서희와 태욱은 자신들도 모르게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둘의 조합이 딱히 어떤지는 모르겠다. 다만,”
여린의 말에 실망하던 서희와 태욱은 ‘다만’이라는 여린의 말에 다시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조태필의 아내도 서희처럼 미래를 보는 능력자였다는 소문이 있기는 했어.”
여린의 말에 태욱은 서희를 보며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서희는 태욱의 표정에 엷은 미소로 답하며 다른 생각에 빠졌다. 그녀는 여울을 임신 사실을 알기 전에 태몽처럼 꿨던 꿈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장면이 아이의 능력과 관계가 있는지 궁금했다.
“혹시, 궁합이 나쁜 경우도 있나요?”
우재였다. 그는 서희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질문을 망설이던 서희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곧 그녀는 꿈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생각을 바꿨다. 만약 여울이에게 진짜로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이라면 서희는 그 사실을 비밀로 하고 싶었다. 여린의 말대로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안전했다.
“있지.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이가. 예를 들면, 근육강화계열의 능력자는 우리 같은 중력지배자들을 만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5년 전 김진상처럼 말이야.”
여린의 대답에 모두들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서희는 어깨까지 떨며 그의 기억을 지워 버리려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그대로세요? 하나도 안 늙으셨어요.”
주선의 애교 가득한 목소리 덕분에 어두웠던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가벼운 농담처럼 한 질문이었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주선의 표정은 진지했다. 갑자기 생각한 질문이 아닌 것 같았다. 서희도 그 질문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여린에게 집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희의 눈에 여린은 5년 전보다 더 어려보이는 것 같았다.
“정말 몰라는 묻는구나?”
여린이 주선과 서희를 번갈아보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중력지배자잖아.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해?”
“아!”
주선과 서희가 동시에 깨달음의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함께 우재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재야!”
서희가 우재를 향해 애교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태욱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했지? 남편, 너도 피부과로 바꾸자!”
주선은 우재의 팔에 매달리며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왜들 이러세요?”
우재가 주선과 서희의 말을 장난으로 받아쳤다. 주선이 우재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흐흠, 피부과가……”
주선의 진지한 태도에 당황한 우재가 말끝을 흐렸다.
“태욱아, 이참에 너도 개인금고사업부터 시작해봐!”
우재에게서 시선을 뗀 주선이 태욱을 보며 말했다.
“맞아! 그러면 되겠다!”
화제의 전환이 반가운 우재가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주선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