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욱아!”
서희가 푸석푸석한 목소리로 태욱을 불렀다. 잠이 덜 깬 얼굴이었다. 태욱은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서희는 발을 들었다.
‘퍽!’
서희의 발길질에 침대에서 떨어진 태욱은 올라오는 짜증을 애써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리고서도 눈을 뜨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서희는 다시 깊이 잠든 것 같았다. 태욱과 서희의 사이에 있던 작은 그림자가 태욱 쪽으로 움직였다.
“아빠! 쉬!”
태욱과 서희의 딸, 여울이었다. 이제 곧 세 돌이 될 그녀는 얼마 전에 기저귀를 뗐다. 여울이가 기저귀를 뗐을 때는 그저 기쁘기만 했다. 그때는 낮에도 밤에도 화장실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응, 그래.”
태욱은 익숙한 동작으로 여울을 안아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여울이는 스스로 걸어가고 싶어 했지만 이게 더 빨랐다. 태욱은 맨 위의 유아용 변기커버를 들어 올리고 여울을 앉혔다. 유아용 변기커버를 들어 올리면 성인용 변기커버가 나오게 되어 있었다. 태욱이 여울을 위해 며칠 전 직접 설치한 것이었다. 여울은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채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여울은 허니문베이비였다. 삼 년 전, 태욱과 서희는 결혼을 했다. 북한핵미사일을 막은 것도 벌써 5년 전 일이었다. 그 일 이후로 SA그룹과 관련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잠수함에서 만난 여자의 마지막 인사도 이제는 거의 잊고 지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만큼 불안했던 마음도 모두 사라졌다. ‘가여린’이라는 그녀의 이름만 겨우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도 일부러 알아본 게 아니라 그녀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주선을 통해 알게 된 것이었다. 주선은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피했다. 어쨌든 태욱과 서희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서민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중이었다.
“악! 지금 몇 시야?”
별안간 서희가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늦잠을 잤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알람을 맞춰놓지 않아도 새벽 6시에 꼬박꼬박 일어나던 서희는 여울이가 태어나고서부터 항상 잠이 모자랐다. 돌때까지는 젖을 먹이느라 잠을 설쳤고, 그 이후부터는 잠투정하며 엄마를 찾는 아이 때문에 잠을 못 잤다.
“걱정 마, 오늘 대통령 선거야.”
“아, 맞다.”
서희는 안심한 표정으로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한 그녀는 4년 전 대학 졸업과 동시에 9급 사서공무원시험에 합격했다. 서희는 집 근처에 있는 공공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래도 일어나. 결혼식 가야지.”
“알았어.”
서희는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 대답했다.
“엄마, 일어나!”
여울이가 엄마를 흔들었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언제 누구의 편에 서서 행동을 해야 하는지 귀신같이 알아챘다. 태욱은 발밑에서 노는 여울이를 상대하며 아침 준비를 서둘렀다.
“응, 일어났어.”
서희가 드디어 베개에 묻혀 있던 얼굴을 꺼냈다. 여울이를 안고 있는 서희의 얼굴에는 어느새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여울아, 뽀뽀해 줘!”
서희는 틈만 나면 여울이에게 뽀뽀를 졸랐다. 여울이는 엄마의 두 볼을 손으로 잡고 자신의 입술을 서희의 입술에 대고 꾹 눌렀다. 그리고는 짧은 두 팔로 서희의 목덜미를 있는 힘껏 끌어안아 주었다. 서희와 여울이는 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서희의 얼굴에 행복이 묻어나왔다.
“아침, 뭐야?”
“간단하게 토스트, 이따 결혼식가서 많이 먹자!”
“그래.”
“빨리 씻고 나와. 투표하고 정선까지 시간 맞춰 가려면 좀 서둘러야겠어.”
“걔네는 왜 결혼식을 강원도까지 가서 하고 그러냐.”
서희는 침대에서 내려와 안고 있던 여울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것도 원래 제주도에서 하려던 걸 우리 생각해서 바꾼 거라잖아.”
태욱은 토스트에 들어갈 달걀프라이를 뒤집으면서 서희의 말에 대꾸했다. 태욱은 여울이가 말을 조리 있게 하면서부터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언젠가 여울이가 사람들에게 공간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걸 듣고는 태욱과 서희, 둘 다 깜짝 놀랐다. 공간에 대한 그녀의 묘사와 설명은 생각보다 더 정확하고 세밀했다.
“참 고맙기도 하네.”
서희는 욕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어놓은 채 변기에 앉아 볼일을 봤다. 여울이가 화장실 앞에 서서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희는 육아휴직 일 년을 채우고 복직을 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여울이는 일 년이라는 시간으로는 부족했다. 엄마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길 원했다. 아빠인 태욱이 항상 같이 있어도 여울이는 엄마를 찾았다. 엄마의 빈자리는 아빠가 대신 채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때부터 서희는 볼일을 볼 때도 문을 닫지 못했다.
“커피도 내렸어?”
“응.”
변기 물을 내리던 서희가 갑자기 코를 킁킁거리더니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대답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태욱이 내려주는 커피를 밖에서 사먹는 어떤 커피보다 좋아했다.
“네가 좋아하는 헤이즐넛이야. 어서 나와.”
“응, 고마워요!”
서희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정도가 그녀가 태욱에게 선사하는 애교의 최고치였다.
“와! 잘 먹겠습니다!”
손만 씻고 화장실에서 나온 서희는 여울이와 나란히 식탁에 앉았다. 그녀들의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머그컵 두 잔과 넓은 접시에 먹기 좋게 잘라진 토스트 두 개가 놓여져 있었다. 바삭하게 구운 식빵 위에 치즈와 달걀프라이를 얹은 토스트는 서희가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였다. 이 토스트의 핵심은 무엇보다 넉넉하게 뿌리는 케첩이었다. 서희 앞에 놓인 머그컵에는 우유를 탄 커피가, 여울의 앞에 놓인 머그컵에는 따뜻한 우유가 들어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여울이도 엄마를 따라서 태욱에게 인사를 했다. 요즘은 시키지 않아도 ‘안녕히 주무셨어요?’나 ‘안녕히 주무세요.’ 그리고 ‘잘 먹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같은 인사를 곧잘 했다.
“그래, 많이 먹어. 우리 딸!”
태욱은 여울이를 보며 기특한 미소를 지었다. 서희는 어느새 토스트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여울이 앞에 있는 토스트를 작게 조각내었다. 그리고 그 작은 조각을 더 작게 말아 여울의 입에 넣어주었다.
“케첩 부족하면 더 뿌려.”
태욱이 서희의 앞에 케첩을 병 째 놓아두었다. 서희는 케첩을 정말 좋아했다.
“아니야. 충분해.”
서희의 대답을 들으며 태욱도 서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앞에도 토스트 한 개와 따뜻한 커피가 들어있는 머그컵을 내려 놓았다.
“여울아, 맛있어?”
태욱이 토스트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여울이를 향해 물었다. 여울이는 서희의 도움으로 자기 손보다 큰 토스트 한 조각을 야무지게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여울은 말없이 아빠를 향해 엄지를 들어보였다. 여울의 행동을 지켜보던 태욱과 서희는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웃었다. 여울이는 날마다 새로웠다. 그녀로 인해 그들의 삶은 더없이 풍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