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서희는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다. 팔에 닿는 익숙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고개를 들었다. 햇빛에 눈이 부셨다. 다른 손을 들어 햇빛을 가렸다. 짙은 그림자 때문에 얼굴의 전부가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단단한 턱과 날씬한 귓불, 그리고 툭 튀어나온 목젖. 태욱이었다. 눈이 좀 익숙해지자 그의 얼굴이 더 자세하게 보였다. 서희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아니다. 조금 달랐다. 그대로는 맞는데 뭔가가 달라보였다. 서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더욱 자세히 살펴보았다. 찰흙 같은 검은머리 사이로 흰머리가 보였다. 목의 주름도 눈에 띄게 늘어 있었다. 태욱은 자신이 기억하는 청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서희는 햇빛을 가리던 자신의 손을 내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팽팽하던 손등이 까칠했다.
‘나이가 들었구나.’
얼마나 먼 미래인지 궁금했다.
‘이렇게 우린 함께 나이 들어가는구나.’
안심이 되었다. 태욱이 여전히 자신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게 기뻤다. 사람들의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태욱과 서희는 광장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지?’
서희는 다시 태욱을 올려다보았다. 태욱의 시선은 아까부터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서희는 태욱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의 시선 끝에는 대형 스크린이 있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얼굴이 낯이 익었다.
‘우재?’
분명히 우재였다. 안경 쓴 얼굴이 낯설었지만 그가 분명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잘생겼다. 중후한 느낌이 오히려 멋지게 느껴졌다. 스크린 속의 우재는 세월을 허투루 보내지 않은 견고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주선에게서도 전에 느끼지 못했던 아우라가 보이는 것 같았다.
다시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우재가 손을 들어 사람들의 환호에 보답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바로 그 법안들 통과시키겠지.”
“정말 통과될까?”
“당연하지.”
옆에 있던 커플의 대화가 들렸다. 기대에 찬 목소리였다. 서희는 문득 예전에 우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카페였다. 서희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볕에 실내가 엄마의 품처럼 따뜻했다. 해가 잠깐 구름에 가려져 있는지 눈이 부시지는 않았다. 옆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적당히 굵고 낮은 음성이 귀에 익은 소리였다. 고개를 돌렸다. 서희의 옆에는 태욱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태욱이 말을 잠깐 멈추고 서희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다정한 눈빛이 그녀에게 닿았다. 엷은 미소를 보이며 손을 잡았다. 온기가 느껴졌다. 태욱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잠시 멈췄던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앞에 놓인 커피 잔에서 나온 연기들이 자유로운 곡선을 그리며 공중에 흩어졌다. 연기 뒤로 맞은편에 앉아있는 우재와 주선이 보였다. 주선은 우재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태욱과 우재가 나누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정치 얘기였다.
“다음 총선에서는 누가 정당 하나 만들어서 딱 두 가지 법안만 통과시켰으면 좋겠어.”
태욱이었다.
“무슨 법안?”
우재가 태욱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국회의원 특권 없애는 법하고, 집권자들 부정부패를 막는 강력한 법.”
“그게 되겠냐?”
우재는 태욱을 비웃는 것 같았다. 태욱이 순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공약을 하는 거지. 자신의 정당이 국회의석수 과반을 차지한다면 이 두 법안만 통과시키고 전원 사퇴하겠다. 이렇게.”
“과반이 아니라 180석이겠지.”
“그래? 언제 바뀌었지?”
태욱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어쨌든 180석을 차지하면 그 두 법안만 통과시키고 전원 사퇴하는 거지.”
“180석을 차지하지 못하면?”
“그냥 사퇴해야지.”
우재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에 180석을 차지했다 치자. 그래서 법안을 통과시켰어. 그래도 사퇴한다고?”
“당연하지.”
“그럼 국회의원 선거 다시 해야 하잖아.”
“그렇지.”
“너무 낭비 아니냐?”
“아니, 국회의원 특권 없애고, 그들의 부정부패를 막는데 그 정도 사회비용이면 충분히 저렴하다고 생각하는데.”
태욱의 말을 끝까지 들은 우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긍하는 눈치였다.
“만약에 사퇴 안하면?”
“그러니까 처음부터 정치를 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만 골라서 약속을 받아내고 선거에 내보내야지. 믿을 만한 사람들만 골라서.”
농담하는 줄 알았는데 태욱과 우재는 꽤 진지했다.
“그거, 네가 해라.”
태욱이 우재를 보며 말했다.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알잖아. 나, 나서는 거 싫어하는 거.”
구름에 가려져 있던 해가 얼굴을 내밀면서 햇빛이 카페의 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우재를 바라보고 있던 주선의 얼굴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사랑스러웠다. 서희도 손을 풀고 태욱의 팔짱을 꼈다. 태욱이 서희를 돌아보았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태욱의 얼굴에서도 빛이 났다.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아까보다 더 크게 들렸다. 서희는 다시 광장으로 돌아왔다.
‘우재가 결국 태욱의 부탁을 들어줬구나.’
우재를 바라보고 있는 태욱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서희는 팔짱을 풀고 태욱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태욱이 서희를 내려다보았다. 예전 카페에서 보았던 따뜻한 미소였다. 서희도 손가락에 힘을 주어 미소에 답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기대에 찬 사람들의 밝은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광장을 채우고 있었지만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광장은 평화롭고 깨끗했다. 그곳에는 질서가 있었다.
‘이걸로 우리 딸이 살아갈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
서희도 기쁜 마음에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잠깐, 딸이라고? 내가 딸이 있어?’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태욱과 나에게 딸이 있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인데 낯설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서희는 곧 태욱의 반대편에서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딸이었다. 왠지 모를 먹먹함에 코끝이 시렸다. 행복하고 아련한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입을 열자 짭짤한 눈물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서희는 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분명히 알고 있는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잡고 있던 태욱의 손을 뿌리치듯 풀고 아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쾅!”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대형 스크린이 터져나갔다. 건물이 휘청거리고 길이 출렁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서희는 그대로 아이를 품에 안았다.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안 돼!”
서희는 잠에서 깨어났다. 온 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서희는 결국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텅 빈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알 수 없는 상실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서희의 두 손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