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분명히 모니터에는 핵미사일이 발사됐다는 표시가 붉은 빛을 내며 깜박이고 있었다.
“불발인가?”
태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마.”
그들은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볼 뿐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위에 한 번 올라가보자.”
“그래.”
잠수함은 핵미사일 발사를 위해 해수면에 위로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잠깐, 이 사람은 어떻게 하지?”
주선이 쓰러져 있는 진상을 가리켰다. 그의 능력 때문에 약효가 얼마나 지속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묶어놓을 수도 없었다. 수갑 따위는 그에게 장애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데리고 가자.”
우재가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의 왜소한 몸이 가볍게 허공에 떠올랐다.
“당신, 누구야?”
잠수함 위로 올라온 그들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 잠수함 위에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혼자였다. 짧은 단발머리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해를 등지고 서 있는 그녀의 뒤로 붉은 해가 배경처럼 녹아들었다. 눈이 부셨다. 트렌치코트가 바람에 날릴 때마다 안에 입고 있는 완벽한 핏의 검은색 정장이 시선을 빼앗았다. 그녀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먼저 올라온 태욱과 우재, 서희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올라온 주선이 그녀를 알아봤다. 주선은 뜻밖의 만남에 반가움이 앞섰다.
“선생님!”
주선은 그녀를 향해 달려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선생님이 왜 여기에.”
“오랜만이야.”
그녀는 주선을 향해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끼는 제자를 오랜만에 만난 스승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주선에게 능력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 스승이었다. 주선은 8살 때부터 거의 10년을 그녀와 함께 지냈다. 그녀는 주선이 아빠와 함께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와 주선은 자주는 아니어도 생각날 때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이였다. 가끔은 그러다가 직접 만나서 사소한 일상을 나누기도 했다. 주선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핵미사일은 내가 다시 원래 자리에 넣어놨어.”
“네?”
“나도 중력능력자거든. 우재도 당황하지만 않았다면 아마 할 수 있었을 거야.”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석양에 비친 우재의 얼굴이 붉어졌다.
“선생님이 여기 왜 계시는 거예요?”
주선의 목소리가 아까와는 다르게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이미 이 상황이 무얼 의미하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이상 사실대로 말해야겠지?
그녀는 주선을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속인 건 아니야. 아무튼 미안해.”
그녀는 주선에게서 눈을 떼고 태욱과 우재, 그리고 서희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서희에게 머문 그녀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잠깐 동안 반짝였다.
“나는 SA그룹 동부아시아 총책임자야. 거기 쓰러져 있는 인간의 직속상관이지.”
그녀는 서희에게서 시선을 거두는 동시에 진상을 가리켰다.
“선생님!”
주선의 경악하는 소리와 함께 태욱과 우재는 공격 자세를 취했다. 서희도 그녀에게 총을 겨눴다.
“진정해. 너희와 싸우려고 온 게 아니니까.”
그녀가 모두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싸우려고 했으면 너희는 지금 이렇게 못 서 있을 걸?”
그녀의 말에도 태욱 일행은 자세를 풀지 않았다.
“편한 대로 해. 일단 사과하지. 나는 김진상 저 인간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전혀 몰랐어.”
“그럼 지금까지 벌어진 일과 SA는 무관하다는 말인가요?”
우재가 자세를 풀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은 SA한국지부장인 김진상이 독단으로 저지른 짓이야. SA가 잘못이 있다면 저런 자를 마음대로 날뛰게 놔둔 것 정도겠지.”
그녀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던 서희도 팔을 내렸다.
“그래서 말인데, 그 인간, 내가 좀 데려가야겠어. 우리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거든. 규칙을 어긴 인간한테 줘야할 벌도 있고.”
그녀가 진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안 되겠는데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재가 나섰다.
“어떡하지? 난 꼭 데려가야겠는데?”
그녀는 이 상황이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어린아이들을 어루고 달래는 어른이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건 제가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런, 오해가 있었네. 나는 허락을 받으려 한 게 아닌데.”
순간 그녀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그와 동시에 진상의 몸이 어느새 그녀 옆으로 옮겨졌다. 우재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더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나지 않니?”
그녀는 자기식대로 우재를 위로했다.
“그럼 난 이만 사라져줄게. 내가 좀 바빠서. 주선아, 다음에 보자.”
“선생님!”
주선은 선생님을 부르는 것 외에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참, 우리 제자, 첫 번째 진화와 두 번째 진화 모두 축하해. 다른 친구들도.”
진상과 함께 허공에 떠오른 그녀가 그들을 내려다보며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음, 그리고 태욱이라고 했나? 공간지배자. 다음에 만나면 아마 나도 널 사로잡으려고 할 거야. 그때는 지금보다 더 성장한 모습이길 바랄게.”
그녀는 그대로 허공으로 사라졌다. 모두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집에 가자.”
침묵을 먼저 깬 건 서희였다.
“어쨌든 잘 해결 됐잖아.”
서희는 주선의 어깨를 다독였다. 주선은 울고 있었다. 수평선 위로 간신히 이마만 걸치고 있는 태양이 바다를 붉게 물들였다. 잔잔하게 출렁이는 파도가 붉은 빛을 사방으로 반사시켰다.
“태욱아!”
“어? 어.”
서희의 눈빛을 읽은 태욱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 그의 손이 닿자 공간이 생겨났다.
“와우, 정말 멋진데?”
서희가 일부러 밝게 말했다. 태욱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가자.”
태욱은 친구들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인 스페인의 산세바스티안으로 초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