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오늘 오전 10시 경, 서해 NLL을 침범한 북한경비정과 우리 해군 사이에 교전이 30분간 있었습니다. 이 교전으로 우리 해군의 고속경비정인 참수리369호정은 반파되었으며 정장 윤기정 대위를 포함한 6명의 대원이 숨지고 18명의 대원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해군의 발표에 따르면 북한잠수정은 그 자리에서 침몰했다고 합니다.”
“이게 뭔 일이냐?”
아침 드라마를 끊고 갑자기 날아든 속보에 경찰서 안이 어수선해졌다. 그중에는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보낸 우재와 주선도 있었다.
“저거 진짜여?”
“뭐여, 전쟁 나는 거 아녀?”
“에이, 전쟁은 무슨, 전쟁이 그렇게 쉬운 줄 알어?”
“아니, 저것들이 쳐들어 왔다잖아!”
“뉴스 제대로 안보냐, 우리 편이 이겼다잖아.”
“그런 겨? 그럼 전쟁 안 나는 겨?”
“그건 나도 모르지.”
“뭐여? 전쟁이 난다는 겨, 안 난 다는 겨?”
우재는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유치장 동기들의 의미 없는 대화를 한 귀로 흘려들었다.
“설마, 그 루머가 사실은 아니겠죠?”
이번에는 형사들이었다.
“무슨 루머?”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인데, 대통령이 탄핵 당하기 전에 계엄령 선포할 거라고.”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아니, 그래서 이번에 북한한테 제대로 한 번 쏴달라고 부탁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입들 조심해라. 입 함부로 놀리다가 황천 길 간 사람 많다.”
조용히 듣고 있던 반장이 주위를 주며 일어섰다.
“그만 떠들고, 이송준비나 해. 국정원에서 올 때 됐다.”
반장의 말에 형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치장 쪽으로 이동했다.
“여기가 어디죠?”
우재의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가 벗겨졌다. 안대에서 풀어진 실밥이 우재의 눈동자를 건드렸다. 우재는 눈을 찡그렸다. 눈을 문지르고 싶었지만 손은 의자에 묶여 있었다. 한 눈에도 그가 있는 곳이 국정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여기는 안가입니다. 국정원으로 가기 전에 먼저 보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누가요?”
“곧 알게 되실 겁니다.”
그들은 그 말을 끝으로 모습을 감췄다. 방 안에 혼자 남은 우재는 주선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철없는 부잣집 아가씨께서 꽤나 맹랑한 짓을 했더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우재가 주선을 걱정하는 그 시각, 주선은 우재와 비슷한 모습으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진상이 앉아 있었다. 주선은 한 눈에 그가 누군지 알아봤다. 국내정치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는 지난 번 장훈의 얘기를 들으면서 인터넷으로 그를 찾아보았다. 그는 잔뜩 여유 있는 자세와 승리를 확신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냥 재벌 3세로 편하게 살면 될 것을, 왜 그랬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뭐, 이젠 상관없어요. 이미 늦었으니까.”
진상의 얼굴에서 갑자기 미소가 사라졌다. 대신 그의 얼굴에 섬뜩한 표정이 지어졌다. 그는 천천히 주선의 귀에 입을 가져갔다.
“우신그룹, 그리고 당신 아버지까지 전부 다 없어질 거야. 당신 하나 때문에.”
그의 입에서 ‘아버지’라는 단어가 나오자 주선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제 좀 후회하는 마음이 생기나?”
다시 주선과 얼굴을 마주한 진상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후회도 하고 반성도 하고 그래. 그런다고 어차피 달라질 건 없겠지만.”
주선은 입을 다문 채 진상을 쏘아보았다.
“그거라도 해야 미치지 않을 수 있을 거야.”
진상은 주선을 향해 잔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 어떡하지?”
태욱과 서희는 몸을 숨긴 채 우재와 주선이 끌려 들어간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일반 가정집 같았다. 하지만 집안 곳곳을 비추는 여러 대의 카메라와 출입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원들의 모습을 통해 그곳이 국정원의 안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처음인 태욱은 감시를 피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른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잠깐만!”
서희의 말에 태욱은 고개를 돌렸다. 서희의 눈은 이미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의원님!”
“뭐야?”
주선과 마주 앉아 있던 진상은 오비서의 등장에 신경이 곤두섰다. 거의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건드리면 주선의 정신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런데 오비서가 초를 쳤다. 자기도 모르게 오비서를 향해 매서운 눈빛을 쏘았다.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데?”
진상은 오비서를 향한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물었다. 함부로 오라 가라 하는 오비서의 말이 오늘따라 귀에 거슬렸다.
“여기서는 좀…….”
오비서가 주선을 눈으로 가리켜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진상은 짜증이 났다.
“괜찮으니까 그냥 말해.”
“네? 아니, 아무래도 나오시는 게…….”
“그냥 말하라고!”
진상이 결국 큰 소리를 냈다.
“기우재 씨가 사라졌습니다.”
진상의 호통에 놀란 오비서가 용무를 말했다.
“뭐?”
“기우재 씨가 사라졌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진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탈출한 것도 아니고 사라지다니.
“말 그대로입니다. 방에서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냥 사라졌다고?”
진상은 서둘러 방에서 나갔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주선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우재야!”
우재는 반가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공간에서 얼굴만 내밀고 있는 태욱이 보였다. 위치가 기가 막혔다. 방 안을 비추는 카메라가 그의 머리 위에 있었다. 그가 있는 공간은 카메라 사각지대였다. 모두 서희가 본 모습 그대로였다.
“수갑 풀 수 있겠어?”
우재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보였다. 0.0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뇌수술도 염력으로 하는 그였다. 그런 그에게 수갑 푸는 것 정도는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손 이리 내.”
태욱이 공간에서 팔을 꺼냈다. 우재는 망설임 없이 태욱의 손을 잡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CCTV를 확인한 진상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카메라에 비치던 우재가 마술처럼 갑가지 사라졌다. 우재가 공간지배자라는 전제 없이는 저 장면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한 우재는 공간지배자가 아니었다. ‘설마’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행히 그에게는 그의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우주선은?”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진상은 주선이 있는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주선에게 확인하고 싶은 게 많아졌다.
“최태욱!”
주선이 갇혀 있는 방에 들어선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주선이 아니라 주선에게 손을 뻗고 있는 태욱이었다. 그는 몸의 반쪽만 공간 밖으로 내놓고 있었다.
“철컥!”
주선의 수갑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분명히 손을 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수갑이 풀리는 소리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주선은 태욱의 손을 잡았다.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안 돼!”
진상은 비명 같은 소리와 함께 태욱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악!”
진상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주선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눈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주선은 팔을 뻗는 진상의 행동을 무시했다. 그가 서 있는 방문에서 자신이 있는 자리까지 적어도 3미터는 되었다. 절대 팔을 뻗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팔을 뻗은 진상의 어깨가 갑자기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그의 팔이 길어졌다. 진상의 손은 공간 밖에 나와 있는 태욱의 어깨를 잡았다.
“윽!”
진상의 손에 어깨를 잡힌 태욱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쇄골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그때였다. 공간 안에서 갑자기 서희가 얼굴을 내밀었다. 서희는 그대로 태욱의 어깨를 잡고 있는 진상의 손을 있는 힘껏 이로 깨물었다.
“악!”
진상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태욱의 어깨를 놓았다.
“빨리!”
서희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태욱은 주선을 공간 안으로 끌어들였다. 서희에게 물린 손을 부여잡은 진상은 그들이 사라진 텅 빈 공간만 노려볼 뿐이었다.
“저사람 뭐야?”
주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몰라, 나도 깜짝 놀랐어.”
태욱은 어깨를 문지며 말했다. 그의 어깨에는 피멍이 들어 있었다.
“혹시, 사람이 아닌 거 아냐?”
우재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태욱은 우재가 농담을 하는 줄 알고 웃으려다가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어색하게 표정을 바꿨다.
“그럼, 외계인?”
주선이 우재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설마!”
공간을 빠져 나오고서도 진상의 모습을 두고 주선과 태욱, 그리고 우재는 서로의 의견을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그만큼 그의 모습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서희만 아무 말이 없었다.
“나, 다 알았어.”
가만히 있던 서희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진상의 손을 입으로 문 순간, 그가 가진 모든 기억이 고스란히 서희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와 감정이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서희는 어지러움과 구토를 참아야 했다.
“다 알다니?”
주선의 물음에 서희가 고개를 들고 주선과 우재, 그리고 태욱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그녀의 말을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그가 이 모든 일을 꾸민 장본인이야.”
서희는 모두가 가장 궁금해 하는 그의 능력부터 설명했다. 진상은 근육과 뼈를 자유자재로 옮길 수 있었다. 근육을 집중시켜서 한 부분의 힘을 보통 사람보다 3~4배 강하게 할 수도 있고 아까처럼 신체의 길이도 2~3배 길어지게 조정할 수도 있었다. 또 그가 SA그룹 한국지부장으로 공간지배자를 쫓고 있다는 사실과 여당 총재로서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도 설명했다. SA7229편부터 서해에서 일어난 교전까지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우재와 주선, 그리고 태욱은 서희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충격적인 사실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놀라움에 할 말을 잃은 그들을 보며 서희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게 남았어.”
서희의 말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곧 군사계엄령을 선포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