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돌아오라는데요.”
전화를 끊은 둘째 송중이 뒷자석에 앉아있는 형 변중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뭐?”
배삼형제는 WSBC로 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지금 한 시간이 넘게 차 안에 갇혀 있었다. 광화문에서 연일 열리는 촛불집회 때문에 차가 앞으로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운전대를 잡고 있는 신중이 백미러로 변중을 바라보았다. 변중은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교통제증 때문에 안 그래도 올라오는 짜증을 간신히 참고 있던 중이었다.
“이거 뭐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말로 내뱉으니까 더 기분이 나빠지는 것 같았다.
“아씨, 몰라. 그냥 가!”
“네?”
신중이 변중의 결정에 의문을 품었다. 변중은 기분이 아까보다 더 나빠졌다.
“그냥 가라고!”
소리를 빽 질렀다. 신중은 움찔하기만 할뿐 다른 동작을 취하지 않았다.
“뭐해? 그냥 가라니까.”
“아니, 저. 앞에 차가 가야…….”
그들은 여전히 도로 한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아이, 더워! 야, 찬 기 좀 뿜어봐!”
변중은 괜히 둘째에게 화를 풀었다.
“알았어요!”
송중은 손바닥을 펼 친 채 기합을 주었다.
“뿡!”
“아, 뭐야!”
“미안해, 너무 힘을 줬나?”
송중이 민망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윽! 야, 빨리 창문 열어!”
창문을 열자 도로의 더운 바람이 차 안으로 훅 밀려들어왔다. 변중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텁텁한 공기를 코로 가득 들이마셨다.
“야, 저거 걔네 아냐?”
한껏 숨을 들이마시던 변중의 시선 끝에 손을 잡고 있는 태욱과 서희가 다정한 모습으로 어디론가 향해 가고 있었다.
“정말 이 방법밖에 없습니까?”
경호가 애써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이게 최선입니다.”
우재의 말에 경호의 고개가 숙여졌다. 우재 옆에 있던 주선은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인천항에 있었다. 경호 옆에 있던 장훈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작은 통통배를 보고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같이 안가십니까?”
“저희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어린애도 아닌걸요.”
주선의 목소리가 유난히 밝게 느껴졌다.
“아가씨,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었죠? 너무 티 나신다고.”
“티, 났어요?”
“네. 아주 많이요.”
“어서 타시죠.”
우재가 경호를 재촉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이르네요.”
우재는 경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묵묵히 경호를 배로 안내할 뿐이었다. 경호는 우재의 안내를 따라 배에 올라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장훈도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는 커다란 가방을 끌어안고 경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일단 피해 계시다가 정리 되면 다시 들어오세요.”
“아가씨, 정말 괜찮겠습니까?”
주선의 마지막 인사를 경호가 한 번 더 붙들고 늘어졌다.
“괜찮고말고요. 참, 이 루트가 얼마나 안전한지는 잘 알고 계시죠?”
경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루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몸조심하세요.”
“네, 아가씨도요.”
“저는 걱정하지 마시라니까.”
주선이 한껏 밝은 미소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재는 낯설지 않은 배의 뒷모습을 추억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리가 좀 너무했나? 태욱이한테 그냥 부탁할 걸 그랬나봐.”
주선이 걱정스런 얼굴로 우재를 향해 말했다. 그들은 경호에게 태욱의 업그레이드된 능력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러고도 혹시 몰라서 WSBC건물을 나서자마자 태욱과 서희를 떼어놓고 온 그들이었다.
“아니야, 이렇게라도 은혜를 갚아야지.”
우재는 석양 속으로 사라지는 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전에 본 적 없는 사악한 미소가 지어졌다. 주선은 붉은 석양이 비친 그의 얼굴을 보면서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