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입니다.”
“조실장 아저씨, 아니 이제 조사장님이라고 해야겠죠? 조사장님, 잘 지내셨죠?”
주선의 코맹맹이 소리에 태욱과 우재는 눈살을 찌푸렸다. 10년 전, 주선의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였던 우신그룹 제3비서실 실장 조경호는 주선이 유학을 떠난 뒤에 제1비서실 실장을 거쳐 작년에 WSBC사장으로 취임했다.
“저는 보시다시피,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주선은 혀 짧은 소리를 내며 경호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경호 앞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처음 만났던 여중생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제가 항상 말씀드렸죠? 거짓말을 하려면 입에 침이라도 바르시라고요.”
경호가 주선의 팔을 단호하게 풀어내며 말했다.
“치이, 거짓말 아니거든요.”
“그래서 한국에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절 만나러 오신 거군요? 이렇게 친구들까지 죄다 데리고.”
말을 하던 경호의 시선이 장훈에게서 멈췄다.
“이거, 어째 그림이 좀 불안한데요?”
“뭐가요?”
주선이 시치미를 뗐다.
“지금 온 국민들이 찾고 있는 두 명을 이렇게 제 방에 전부 데리고 오신 거요.”
“두 명이라뇨?”
“여기, 우재군, 아니 기우재 교수님과 유명한 물대포씨요.”
경호와 눈이 마주친 장훈은 다리가 떨려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는 아까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무서워서 질문도 하지 못했다. 뭔가 엄청난 사람들과 무서운 일에 엮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장훈은 벌써 연거푸 물만 마셔댔다. 그래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화장실도 계속 다녀오는 바람에 이제는 화장실 다녀온다고 말하기도 미안할 정도였다.
“이제 곧 들어갑니다. 긴장 푸세요.”
주연이 장훈을 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장훈도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대답을 대신했다. TV로만 보던 아나운서였다. 장훈은 그녀를 볼 때마다 참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직접 본 그녀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장훈의 눈에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그녀 때문에 더 떨리는 것 같았다.
“이거 나가면 대한민국 뒤집어진다. 서중이 준비 됐어?”
정우가 서중을 향해 긴장된 눈빛을 보냈다.
“준비 됐습니다.”
서중이 비장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OK, 주연이는?”
“됐습니다.”
주연은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긴장될 때 보이는 버릇이었다.
“백장훈 씨,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알았죠?”
“네? 네.”
머리를 쓸어 넘기는 주연의 모습을 넋놓고 쳐다보던 장훈이 정우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정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한 시간 전, 정우는 사장의 부른다는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국장님, 사장님이 부르십니다.”
“사장님이? 왜?”
“그건 모르겠는데요.”
“알았어요.”
정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서중이 정우를 놀리듯 말했다.
“잘못은 인마! 내 인생 최대의 잘못이 널 뽑은 거다!”
정우는 들고 있던 서류를 돌돌 말아 서중의 머리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주연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그들은 다음 뉴스 아이템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암튼, 나 다녀올 때까지 아이디어 하나, 아니 열 개씩 생각해 놔!”
정우는 서중의 투덜대는 소리를 못들은 척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이런 엄청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헉!”
사장실에 들어가자마자 정우는 숨이 막혔다.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소파에 앉아있는 장훈이었다. 그리고 곧 이어 우재도 보였다. 로또를 맞는다면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이국장님, 일단 앉으시죠.”
“네, 사장님!”
정우는 자리에 앉으면서 사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특종 중의 특종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정우는 조사장에게 없던 존경심마저 생기는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부터 사장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분들이 어떻게 다 여기 계시는 겁니까?”
기자 출신인 그는 궁금한 걸 돌려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사실은 나도 잘 몰라요. 같이 들어보자고 부른 거니까, 한 번 천천히 들어 봅시다.”
경호는 장훈과 우재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얘기들은 하나같이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말들이었다. 그들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이건 특종 정도가 아니었다. 이 정도면 나라가 뒤집힐 수도 있었다. 너무나 엄청난 규모의 스캔들에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진 그도 망설여졌다.
“이국장님은 사실만 보도하세요.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주저하는 그를 보던 사장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그 한마디에 정우는 결심을 굳혔다.
“안녕하십니까 WSBC뉴스 김서중입니다. 잠시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잠시 인터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저희 스튜디오에는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지셨던 시위자, 백장훈씨가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백장훈씨.”
“네, 안녕하십니까.”
서중의 부드러운 진행과 대조적으로 장훈의 인사는 딱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저 화면에서 쓰러져 있는 사람이 본인 맞으십니까?”
“네 맞습니다.”
TV화면 한켠에 쓰러진 채 물대포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장훈의 모습이 비춰졌다.
“저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제가 사실은, 저, 그러니까.”
“많이 긴장하신 것 같은데, 그럼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시위하러 가신 게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건 맞습니까?”
“네, 저는 시위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그럼 저 자리에는 왜 가셨습니까?”
“그게 제가 일부러 간 게 아니라 정신을 차려보니까.”
“그럼,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사실 장훈씨의 말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경찰과 시위대가 대치를 하고 있는 가운데로 굳이 지나갈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제가 그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틀을 넘게 굶고 또 잠도 제대로 못 자서.”
“그 정도면 정말 제정신이라고 할 수 없겠는데요. 왜 그런 상태까지 되셨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네, 제가 원주에 있는 국군병원에서 탈출하느라 그랬습니다.”
“국군병원에서 탈출하셨다고요? 그럼 혹시 탈영병이십니까?”
“네?”
“농담이었습니다. 그냥 봐도 군인이 아니신 건 알겠습니다. 국군병원에는 왜 계셨던 겁니까?”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정우는 입이 바싹 말랐다.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김진상 국회의원하고 민정수석이 저를 가둬두려고 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진상 국회의원하고 민정수석이 저를 가둬두려고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혹시 그 이유도 알고 계십니까?”
“네. 제가 비행기 추락사고의 생존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화면 가득 장훈의 얼굴만 보였다.
“네. 저는 SA7229편의 생존자입니다.”
장훈의 말이 끝나자 화면은 다시 서중을 비추었다.
“여러분도 들으셨다시피 백장훈씨는 SA7229편의 유일한 생존자로 그의 주장에 따르면 여당총수인 김진상 의원과 청와대 민정수석이 그를 대중으로부터 숨기고 감금하려 했습니다. 이는 비행기 추락사고와 관련된 사실을 은폐하려는 정부와 청와대의 은밀하고도 조직적인 합동작전으로 SA7229편의 추락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면이 서중이에서 주연으로 옮겨졌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확인한 결과 백장훈씨가 SA7229편에 탑승한 기록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도 SA항공사측에서는 확인이 되지 않아서 다른 경로를 통해 확인한 것입니다. 이는 기업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배후세력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화면이 다시 서중을 비추었다.
“또한 저희는 그들이 군은 물론 경찰과 검찰까지 동원한 구체적 정황도 포착했습니다. 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의 자유를 아무렇지 않게 침해하는 저들이 법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WSBC는 이 같은 사실에 대한 정부와 청와대의 성실하고 정직한 답변과 책임 있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9시 뉴스에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시청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카메라를 향해 서중과 주연이 고개를 숙였다.
“됐어!”
정우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시청률은 12.4퍼센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