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욱은 망설였다. 서희가 그들과 함께 사라지는 걸 보고 자신도 모르게 여기까지 쫓아왔다. 다행히 그들이 있는 VIP병실에는 그가 숨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장훈의 얘기를 전부 들었다.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서희는, 아니 우재와 주선까지 그들은 감당하기 힘들만큼 엄청난 일에 휘말린 상태였다.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모습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우선 지금까지 했던 자신의 행동들을 서희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봤을 때 보일 서희의 반응이 두려웠다. 또, 자신으로 인해서 생길지도 모를 위험한 순간들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5초!”
주선의 긴박한 외침에 태욱은 두 눈을 꼭 감았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도 상대는 경찰이었다. 자신을 쫓는 정체불명의 사내들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태욱아, 도와줘!”
서희였다. 그 한마디에 태욱은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병실에 있던 모두를 공간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최태욱!”
“정말 태욱이야?”
태욱의 갑작스런 등장에 우재와 주선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희만 아무 말 없이 태욱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훈만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병실에 들어온 경찰들이 자신들을 보지 못하는 것을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어떻게 된 거야? 언제부터 있었어?”
우재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처음부터. 아까 전시회 때부터 따라왔어.”
“전시회? 역시 네 사진이었구나?”
주선이었다. 그녀는 사진을 보자마자 태욱이 찍은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공동전시도 쉽게 받아들였다. 태욱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곧 서희에게로 향했다. 서희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저 사람은 어떻게 들어 온 거야? 설마, 저 사람도 능력자야?”
우재는 태욱에게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당장 궁금한 것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아니야. 한 8년쯤 됐어. 일반인도 공간으로 데려올 수 있게 된지.”
“혹시, 너도 능력이 발전한 거야?”
우재는 자신이 염력을 사용하는 것처럼 태욱도 능력을 발전시켰다고 생각했다.
“발전? 난, 단순히 성인이 되면서 능력이 완성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재는 자신도 염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게 8년 전쯤부터였다는 걸 생각해냈다. 그는 지금까지 그것이 중력을 세밀하게 컨트롤해서 생긴 부수적인 능력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 말이 맞는 거 같네. 나도 예전에는 형체만 보였는데, 지금은 뚜렷하게 다 보이거든.”
주선의 말에 우재와 태욱은 조심스럽게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들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장훈만 여전히 멀뚱하게 서 있었다.
“맞다! 서희, 너 미래 못 본지 한참 됐다며 어떻게 알았어? 능력이 돌아온 거야?”
주선의 말에 서희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5초’라는 주선의 외침과 함께 그녀의 눈에 태욱이 보였다. 그는 자신을, 그리고 병실에 있는 모두를 공간으로 데려가 경찰로부터 숨겨주었다.
“궁금한 게 정말 많겠지만, 일단 여기를 빠져나갈 궁리부터 하자고.”
우재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경찰들이 이곳을 쉽게 비울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이곳을 범죄 현장처럼 보존하려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성인이 되면서 발전한 게 또 있거든.”
태욱이 우재를 향해 자신 있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태욱은 천천히 막혀있는 쪽으로 걸음을옮겼다. 그리고 손을 들어 커튼을 여는 것처럼 공간을 열었다. 빛이 들어왔다. 끝도 없이 이어진 촛불의 행렬이 그들 앞에서 물결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광화문?”
“어떻게 된 거야?”
놀라는 주선과 우재의 모습 뒤로 자신의 뺨을 때리고 있는 장훈의 모습이 보였다. 서희만 알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럼 나갈까?”
“그래.”
“이야, 대단한데? 좀 멋있다.”
주선이 나가면서 태욱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녀의 행동에 우재는 묘한 질투심을 느꼈다. 서희는 말없이 태욱의 손을 잡고 공간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손은 태욱이 기억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그와 눈을 마주치던 서희의 표정이 별안간 심각해졌다. 방금 전까지 그녀는 분명 편안한 표정이었다. 태욱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서희가 휘청거렸다. 태욱이 서희를 붙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무너질 만큼 위태로웠다. 당황한 태욱은 하마터면 장훈을 공간 안에 그대로 놔 둘 뻔했다.
“태욱아.”
제 모습을 찾은 서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 다 봤어.”
“뭘?”
태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가 왜 떠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지냈는지도.”
“뭐?”
“아무래도 나, 능력만 돌아온 게 아닌가봐.”
서희는 태욱의 손을 잡는 순간 그가 떠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모두 볼 수 있었다. 모든 장면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지만 서희는 그의 마음까지 전부 느낄 수 있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와 감정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설마, 너도?”
우재의 물음에 서희가 미소를 지었다.
“응, 내 능력도 업그레이드 된 것 같아.”
“저쪽에서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어.”
주선이 높게 솟은 빌딩 중 한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일단, 움직이자.”
태욱이 서희를 보며 말했다. 서희도 태욱의 눈빛을 읽었다. 서희를 감시하는 눈은 곳곳에 있었다. 아마 그들은 태욱의 존재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태욱이 가장 우려하던 일이었다. 그렇다고 되돌릴 수 있는 건 없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다.
“이쪽으로.”
주선이 앞장섰다. 그녀는 촛불이 가득한 광화문 광장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곳은 시위현장인지 축제현장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평화롭고 즐거운 기운이 가득했다. 중앙에 설치된 대형무대에서는 가수들이 신나는 노래를 연신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노래에 맞춰 가볍게 춤을 추는 젊은이들과 그들과 함께 분위기를 즐기는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정치경찰 해체’나 ‘대통령 탄핵’이라고 적힌 피켓을 연예인을 응원하는 문구처럼 들고 있었다. 수많은 촛불들이 그들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우재가 앞장서서 걷는 주선에게 물었다. 주선의 뒷모습은 당당해 보였다. 우재는 누군가에게 리드당하는 게 처음이었다. 불안하지만 새로운 느낌이었다.
“저기!”
우재는 주선이 가리키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 건물의 꼭대기에는 WSBC라는 네 글자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