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할 거야? 전시회가 내일 모렌데?”
관장의 새된 소리에 수현은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만 그럴 뿐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수현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제대로 설명, 아니 설득한 거 맞아?”
“네.”
“네는 뭐가 네야. 설득을 못했으니까 지금 이러고 있는 거잖아!”
관장은 아까보다 더 목소리를 높였다. 수현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 전시회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신인 사진작가가 문제였다. 당연히 올 줄 알았다. 전시회 준비도 같이 하고, 당일에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전시회 내내 자리도 지켜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참석하지 않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아예 한국에 들어올 계획 자체가 없는 것 같았다. 이런 경우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쪽 분야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라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었다.
“전시회 준비는 문제없어?”
관장의 목소리가 다시 차분해졌다.
“네. 전시회와 관련된 건 전부 저에게 일임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가 뭔데 직접 안 오고 왜 일임을 하냐고! 일임을!”
진정된 줄 알았던 관장의 히스테리가 10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시작되었다.
“관장님,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고, 신비주의 전략으로……”
겨우 용기를 낸 수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관장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신비주의 전략?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가지고. 그게 뭐 아무나 하는 건 줄 알아? 다……”
“관장님!”
진아가 조심스럽게 관장을 부르며 문을 열었다. 들어온 사람이 진아라는 걸 확인하자 신경질적이던 관장의 표정이 금세 풀어졌다.
“노크를 해도 대답은 없고, 안에서 소리는 나고 해서 열어봤어요.”
진아는 관장을 향해 애교를 가득 담은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나중에 다시 올까요?”
“아니야, 들어와도 돼.”
“무슨 일 있어요?”
수현과 눈이 마주친 진아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관장이 진아를 편애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은 무슨, 진아씨야 말로 무슨 일 있어?”
방금 전까지 수현이 상대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관장은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
“우작가님이 오셔서 인사 드리려구요.”
“우작가? 그 우작가 말이야?”
관장의 눈이 두 배는 커진 것 같았다. 어색하게 남아있던 쌍꺼풀 수술자국이 살 속으로 파고들면서 눈을 파르르 떨었다. 얼마 전 붙였다던 속눈썹 몇 개가 땅에 떨어졌다.
“어머, 어머, 우리 우작가님이 여기 오셨어?”
“네. 들어오시라고 할까요?”
“그럼요. 어서 오시라고 하세요.”
관장은 다급한 손길로 머리와 옷의 매무새를 정리했다.
“우작가님, 들어오세요.”
진아는 주선을 관장실로 안내했다. 주선은 청바지와 흰 티를 입고 있었다. 수수한 차림이었다. 화장도 거의 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 자체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관장은 온갖 호들갑을 떨며 우작가를 맞았다. 수현도 우작가를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그냥 길에서 봤더라도 뒤를 돌아볼 것 같은 외모였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는데도 눈길을 끌었다. 주선은 진아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수현씨, 뭐해?”
관장의 목소리가 주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수현을 불렀다.
“네?”
“가서 차 좀 가져와요.”
“아, 네.”
대답을 마치고 관장실을 나가려던 수현을 진아가 불러세웠다.
“수현씨도 앉아요.”
“네?”
관장과 수현의 시선이 동시에 진아에게 쏠렸다.
“전시회 문제로 상의할 게 있어서요.”
“아, 그렇지. 내 정신 좀 봐. 수현씨도 거기 앉아요.”
관장은 깜빡했다는 발연기를 선보이며 비서에게 차를 부탁하고 자리에 앉았다.
“어머, 우리 우작가님은 너무 예뻐서 탤런트를 해도 되겠어요.”
“고맙습니다.”
주선은 형식적으로 대답했다. 그녀는 관장과 같은 부류의 사람을 많이 만나본 경험이 있었다. 거리를 철저히 유지하며 틈을 보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전시회 준비하면서 어려운 거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예.”
어색한 기운이 느껴질 찰나에 문이 열렸다. 비서가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수현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한 번 드셔보세요. 제가 정말 아끼는 비싼 차에요. 아, 내가 실수했네. 이런 차쯤은 얼마든지 드실 텐데. 그렇죠? 호호호.”
“아니에요. 정말 향이 좋네요.”
주선은 차에 손도 대지 않았다. 관장은 보는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웃음소리를 내며 혼자 북도 치고 장구도 쳤다. 부끄러운 건 그 모습을 전부 지켜봐야하는 수현의 몫이었다.
“저는 우리 우작가님 단독으로 전시회를 하려고 했는데 여기 수현씨가 하도 사정사정을 해서 어쩔 수없이 같이 하기로 했어요.”
가만히 앉아있던 수현은 갑자기 명치를 맞은 것 같았다. 수현은 원장을 노려보았다. 원장은 그녀 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불편하시면 그렇다고 말씀만 하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수현은 관장의 뻔뻔한 낯짝에 뜨거운 찻물을 끼얹는 상상을 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오면서 봤는데 사진이 정말 좋더라고요.”
주선이 수현을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주선과 눈을 마주친 수현은 힐링이 되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인사 못했죠? 여기는 수현씨, 이번 전시회를 같이 준비하는 포토에디터에요.”
갑작스런 진아의 소개에 수현은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실력도 좋으시고 센스도 있으시다고.”
“그러면 뭘 해. 신인작가 설득도 제대로 못하는데.”
시선이 수현에게로 쏠리는 게 싫은 관장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진아였다. 그녀는 관장을 향해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수현은 뻔히 다 알고 있으면서 저런 표정과 질문을 할 수 있는 진아가 정말 존경스러웠다.
“글쎄, 사진작가가 참석하지 않겠대. 신인주제에 건방지게. 우작가님한테는 내가 정말 면목이 없네요.”
“저는 괜찮아요. 이쪽에서는 흔한 일인걸요.”
“신비주의 전략으로 나가면 오히려 더 괜찮을 수도 있겠는데요?”
수현은 주선의 대답과 진아의 의견을 듣고 있는 관장의 표정을 살폈다.
“그렇지? 진아씨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까.”
수현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고생했어요.”
관장실을 나온 진아가 축 늘어져 있던 수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
“잠시만요.”
진아는 앞서 나온 주선에게 뭐라고 얘기를 하고 다시 수현에게 돌아왔다. 주선은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
“앞으로 전시회 문제로 관장님과 상의할 게 있을 땐 저랑 같이 가요.”
“네?”
“저를 좀 이용하시라고요.”
진아는 수현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고는 주선을 향해 뛰어갔다. 수현은 가만히 서서 그런 진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랑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수현의 눈에도 그녀가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