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바람이 정면으로 태욱을 밀쳐냈다. 태욱은 온몸으로 바람에 저항하며 난간에 바짝 다가섰다. 그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 아래에서 보면 목이 꺾일 정도로 높은 건물들이 모두 눈 아래 있었다. 길을 메우고 있는 노란 택시들도 꼭 장난감처럼 보였다. 태욱은 난간을 따라 옆으로 이동했다. 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빽빽한 빌딩숲 가운데 자리한 센트럴파크라는 이름의 네모난 녹색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태욱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전망대에 있었다. 빌딩숲을 가로지르는 허드슨 강이 오늘따라 더 힘차게 내달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태욱은 중학교 3학년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 이곳에 처음 왔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영화를 본 날 저녁이었다. 감상에 젖은 그는 무작정 이곳으로 통하는 통로를 찾아다닌 끝에 전망대 구석으로 통하는 공간을 찾아냈었다. 그는 지금도 그 통로를 통해 이곳으로 나왔다. 뉴욕의 풍경은 계절마다 그리고 시간마다 다른 모습으로 태욱을 반겨주었다.
태욱은 조금 전까지 서울에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서희가 일하는 카페가 잘 보이는 공간에 머물렀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공간에 숨어 가만히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그녀를 보러 간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자기를 쫓고 있는 무리들이 얼마나 무섭고 집요한지 알고 있었지만 서희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이번에도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서희는 꿋꿋하게 잘 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그녀에게서 촛불 같은 아우라가 보였다. 그녀를 대하는 사장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서희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알바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 위험해 보여서 몰래 뒤따라간 적도 있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학교에 가지 않는 걸 보면 또 다시 휴학을 한 것 같았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나설 수가 없었다. 태욱은 가슴이 답답했다.
“하아.”
태욱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신선한 공기가 입 안 가득 들어왔다. 그는 가방을 열고 카메라를 꺼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태욱은 사진을 찍고, 찍어주느라 정신이 없는 관광객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띠링!’
한참을 사진 찍는데 열중하던 그의 주머니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태욱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메일이 도착했다는 표시가 있었다. 태욱은 메일을 확인했다. 조금은 긴장된 표정이었다.
얼마 전 파리에 있던 태욱은 괜히 분위기에 취해 혼자 못 마시는 술을 마셨다. 그의 주량은 정확하게 맥주 한 병이었다. 딱 그만큼 마시면 적당히 취기가 올라오고 기분이 좋았다. 잠도 잘 왔다. 실수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태욱은 맥주 두 병을 마셨다. 그리고 실수를 했다. 그 다음에도 그런 실수를 몇 번 더 했었다. 시카고와 프로토는 확실히 기억이 나는데, 다른 곳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리고 지금 도착한 메일이 그 행동의 결과였다. 술이 깬 다음에 몇 번이고 후회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있는 건 없었다.
태욱은 조심스럽게 이메일을 열었다. 천천히 글을 읽어 내려가던 그의 눈이 움직임을 멈출 때 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당신과 전속계약을 맺고 전시회를 열고 싶습니다.’
태욱은 이 문장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