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오늘도 우편물 확인을 시작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있다!”
그녀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에게 온 우편물 더미 속에서 작은 소포 하나를 들어올렸다. 서둘러 박스를 뜯는 그의 모습이 마치 크리스마스 아침에 트리 밑에 놓여있던 선물을 뜯는 어린아이 같았다.
“됐어!”
그녀는 그대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손에는 필름이 담긴 케이스가 들어있었다. 이번 전시회에 사용할 사진이 담긴 마지막 필름이었다.
포토에디터, 명함에 찍혀 있는 그녀의 직업이었다. 쉽게 말하면 좋은 사진을 대중에게 알리는 일이었다. 그녀는 월드프레스포토 심사위원으로 활동할 만큼 세계에서 인정받는 실력자였다. 사진을 보는 게 직업인만큼 그는 하루에도 수 백 장의 사진을 보았다. 아무리 피곤해도 단 한 장도 허투루 보지 않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사진을 사랑했고,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 전, 그런 그녀에게 ‘김환’이라는 이름으로 필름 한 통이 배달되어 왔다. 디지털카메라가 대세인 요즘 필름은 오랜만이었다. 신선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마추어의 작품까지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 필름을 다른 책상서랍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이틀 후, 같은 이름으로 또 한 통의 필름이 배달됐다.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려던 그녀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의 시선을 잡은 것은 소포 겉에 적혀진 주소였다. 이틀 전에는 분명 프랑스 파리였다. 그런데 오늘 받은 것에는 미국 소인이 찍혀있었다. 주소지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돈 많은 한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삼일 후에 배달된 소포의 주소지가 포르투갈의 포르토였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관심이 생겼다. 그렇게 이삼일 간격으로 필름이 배달되었다. 분명히 같은 이름인데 보낸 곳은 세계 각지였다. 결국 그녀는 필름을 현상했다.
“대박!”
현상된 사진을 확인한 그녀가 외친 첫마디였다. 필름에는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 각국의 일상이 담겨있었다. 그런데 그 이방인의 시선이 독특했다. 기본적으로는 따뜻함을 유지하면서도 대상을 새롭게 만드는 신기한 재주가 있었다. 아무 의미 없는 것 같은 장소들도 뭔가 있어 보였다. 설명할 수는 없어도 시선을 잡아두는 무언가가 분명 사진 속에 있었다. 그녀는 빙고를 외쳤다. 평범하되 평범하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그녀가 원하던 것이었다. 그녀가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매그넘의 작가들과 함께 작업했을 때도 이 같은 사진을 본 적은 없었다. 정말 새로웠다.
그녀는 그의 사진과 함께 전시회 기획안을 가지고 관장을 찾아갔다. 국내유일의 사진 전문잡지 편집장 출신이라는 커리어를 걸고서라도 그녀는 이 기획안을 반드시 통과시킬 생각이었다.
“그 잡지, 폐간되지 않았나요?”
관장이 아픈 데를 건드렸다. 편집장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니었다. 그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았다. 편집장 경력이 없는 관장은 수현이 편집장 얘기를 꺼낼 때마다 혼자 미세한 신경전을 걸어왔다.
“괜찮은데요?”
진아였다. 큐레이터인 그녀는 요즘 관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진아씨가 보기에도 그래?”
“구도도 좋고, 시선도 나쁘지 않네요. 무엇보다 느낌이 새로워요.”
그녀의 말에 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아의 말은 지금까지 수현이 한 말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관장의 반응은 달랐다. 수현은 진아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실력은 인정했다. 그녀는 한 번에 작품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었다. 한 마디로 돈 되는 작품을 잘 가져왔다. 그것이 관장이 그녀를 예뻐하는 이유였다.
“우작가 작품이랑 같이 걸어도 좋겠어요.”
왜 우작가 얘기가 안 나오나 했다. 우작가, 그녀가 관장에게 사랑받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우작가의 이름은 주선이었다. 우주선. 이름은 웃기지만 그녀자체는 웃기지 않았다. 그녀는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셀럽이었다. 그녀는 글로벌 기업인 우신그룹의 외동딸이라는 배경 하나만으로도 세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유명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녀는 요즘 가장 핫한 화가였다. 사물의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을 겹쳐서 그리는 기법은 그녀가 개척한 독특한 화풍이었다. 사람들은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그녀의 세밀한 감성에 열광했다. 비평가들도 독창적인 그녀의 그림에 대해 호평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미술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뉴욕에서 가진 두 번의 전시회도 성공적이었다. 성공적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였다. 전시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순수하게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부터 우신그룹에 잘 보이려는 사람들까지 많은 인파가 몰려 들었다.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뉴욕의 미술 관계자들도 전시회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본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전부 서로 그림을 구매하려고 난리를 피우는 통에 즉석에서 경매가 진행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진아는 다른 큐레이터들보다 한걸음 빨리 움직였다. 한국에서 한 번도 활동하지 않은 주선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먼저 만났다. 그리고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한국에서 그녀의 그림을 독점으로 소개하고 판매하는 권리를 얻어냈다. 이전에 뉴욕에서 열린 두 번의 전시회에 모두 참석했던 관장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앞으로 쏟아져 나올 돈을 어디에 담을 지만 고민하면 되었다. 수현은 자신이 관장이라도 진아를 편애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인정할 건 인정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는 게 평소 그녀의 지론이었다.
“왜 같이 걸어? 혹시, 우리 우작가님 슬럼프야?
“그러게요. 작품이 잘 안 나오나 봐요.”
“자기가 잘 좀 해봐. 저번에도 그런 적 있지 않아?”
“이번에는 좀 힘들 것 같아요.”
관장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이것도 기회잖아요. 신인작가 전시회를 우작가랑 동반으로 열어주면 그 작가의 작품가치도 높아질 거예요. 그렇게 우리도 인재를 키워야지요.”
“그런가?”
관장의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거의 넘어왔다는 표시였다. 수현도 진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의견을 보태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괜히 나서서 다된 밥에 코 빠트리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진아에게 맡겨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이 사진 정도면 같이 걸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같은 그림보다는 사진이 더 나을 것도 같고요.”
진아가 수현을 쳐다보았다. 수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관장은 그 둘을 보면서 계속 고개를 움직였다.
“전속계약 할 수 있어?”
관장이 수현에게 물었다. 넘어왔다.
“네.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대답했다. 수습은 나중에 하면 될 일이었다.
“내일까지 계약서 내 책상 위에 올려 놔.”
“네.”
수현은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시회 준비도 확실하게 하고.”
“네.”
“진아씨가 좀 도와줘.”
“그럼요.”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수현과 다르게 진아는 부드러운 눈웃음과 함께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