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간호사님.”
우재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수술 모니터를 보고 있던 현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른 간호사나 의사들도 기선생님의 수술을 볼 때마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그의 수술은 아름다웠다. 그녀는 수술실 경력 12년차로 명문의대에서도 손꼽히는 수술실 베테랑이었다. 그나마 그녀니까 이 정도였다. 다른 간호사들은 수술하는 동안 거의 넋을 놓고 있는 지경이었다.
“니들 홀더”
우재의 말이 끝나자마자 현희는 반사적으로 수술도구를 그의 손에 올려줬다. 그리고 곧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벌써 봉합해요?”
“네.”
우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혈압은 안정적입니다.”
우재가 물어보지 않아도 양선생이 알아서 대답했다. 양선생도 기선생의 수술에 단골로 배정받는 마취전문의였다.
우재가 허리를 폈다. 봉합도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뇌수술은 수술시간도 길고 복잡해서 수술은 끝나면 집도의는 대게 녹초가 되었다. 그래서 수술을 마무리하는 봉합은 일반적으로 어시스턴트가 했다. 그런데 현희는 지금까지 한 번도 기선생이 봉합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자기 손으로 했다. 그의 수술시간이 다른 의사들에 비해 경이적으로 짧다는 게 가장 큰 이유겠지만, 현희는 그 한결같은 모습이 더 존경스러웠다.
현희가 기선생의 수술을 직접 본 것은 일 년 전이었다. 그때 이미 병원에서는 기선생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다. 출중한 실력에 연예인 뺨치는 외모, 거기에 츤데레 같은 성격까지 여자들이 좋아하는 매력을 모두 갖고 있었다. 간호사들 사이에 그의 팬클럽이 있을 정도였다.
현희는 그런 것들이 모두 거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가수나 배우 같은 연예인을 좋아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그녀였다. 단 하나, 외모에 대한 소문만은 인정했다. 우재를 직접 본 현희는 연예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처음으로 이해되었다.
사건은 늘 그렇듯 아무런 예고 없이 일어났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방한한 미국방장관이 회담장소로 이동 중에 갑자기 쓰러졌다. 뇌출혈이었다. 그나마 명문대 종합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다행이었다. 명문의대 신경외과 과장을 중심으로 한 국내 최고의 팀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수술준비에 들어갔다.
“이거 위험한데요.”
“하필이면.”
CT를 확인하는 병원장과 과장들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핏줄이 터진 부분이 수술하기 거의 불가능한 부분이었다. 웬만하면 수술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환자가 미 국방장관이었다. 병원장과 과장들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촉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고민을 오래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들은 일단 수술을 강행하기로 했다.
“혈압 안정됐습니다.”
“메스.”
마취가 확인되자마자 과장이 바로 수술을 시작했다. 하기로 한 이상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모스킷토.”
“시져.”
불필요한 소리는 나지 않았다. 수술은 기계적으로 진행됐다. 국내 최고들로 이루어진 수술스텝인 만큼 한껏 긴장된 공기 속에서도 차분함을 유지했다.
“켈리!”
수술을 집도하던 외과과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손이 멈춰있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석션!”
갑자기 피가 뿜어져 나왔다. 과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희는 숙련된 솜씨로 피를 제거했다.
“혈압이 안 잡힙니다.”
마취전문의의 목소리에 과장의 숨이 막혔다. 스텝들도 그를 따라 숨을 죽였다.
“강압제 주사하고 피 두 개 더 걸어.”
잠시 뜸을 들이던 외과과장이 지시를 내렸다. 침착한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았다. 보조간호사가 과장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과장님!”
마취전문의의 긴박한 외침에 모두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심전계였다. 심장박동을 나타내는 그래프가 요동치고 있었다.
“심정지!”
“뭐야?”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일단 에피 주사하고, 코다벌룬 들어가.”
과장의 지시에 스텝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김간, 나가서 이 환자 차트 다시 확인해.”
“네?”
“천식 있는지 확인하라고!”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언제나 인자한 표정을 하고 있던 과장의 눈은 이미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현희는 과장이 한 말의 의도를 바로 깨달았다. 너무 기초적인 실수였다. 강압제로 주사한 라베신은 천식환자에게는 독약이나 다름없었다. 평소에 먹는 약이나 지병이 없다고 말하던 보좌관의 석연찮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이 원래 그런 정보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급하다는 핑계로 그냥 넘어갔다. 후회해도 되돌릴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 했다. 현희는 수술실 문을 열었다.
“제가 좀 거들겠습니다.”
나가려는 그녀를 누군가가 막아섰다. 우재였다.
“너 뭐야?”
1조수인 최선생이 목소리로 우재를 제지했다.
“이 환자, 살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자신 있어?”
과장의 반응은 의외였다. 당연히 우재를 쫓아낼 줄 알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화를 내야 할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우재에게 자리를 양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 있습니다.”
“그럼 맡기지.”
모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현희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부터 이 수술은 기선생이 집도한다.”
과장은 우재에게 너무 쉽게 자리를 양보했다. 스텝들은 멍한 얼굴을 하고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우재는 자리를 잡고 자세를 취했다.
“그럼 시작합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마술 같은 일이 벌어졌다. 강압제도 코다벌룬도 필요 없었다. 심지어 석션도 필요 없었다. 그가 손을 대자마자 거짓말처럼 환자의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갔다. 심장박동도 규칙적으로 변했다. 환자의 안정이 확인되자 그는 뇌출혈수술에 집중했다.
“됐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봉합하겠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김간호사님?”
아직도 멍하게 모니터만 들여다보고 있는 현희를 그가 불렀다.
“네?”
“봉합 해야죠.”
그가 현희를 보고 웃어주었다. 마스크에 가려진 현희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현희는 자신을 향해 내밀고 있는 우재의 손에 조심스럽게 니들홀더를 올려놓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우재는 명문의대 역사상 최연소 교수로 임명되었다. 외과과장이 가장 아끼는 애제자가 우재라는 사실을 현희는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병원 내에서는 이 모든 게 처음부터 외과과장이 우재를 위해 미리 계획한 일이라는 소문도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