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로의 끝에 다다를수록 비릿한 바다 내음이 진해졌다. 곧이어 신이 난 목소리로 떠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태욱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여전하구나.’
오랫동안 떠나 있던 집에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포근했다. 통로를 완전히 빠져나오자 눈이 부셔서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바다에 부딪혀 조각난 햇살들이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 태욱은 손을 들어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눈은 햇빛에 금방 적응했다. 하얀 요트들이 물결 따라 살랑거리며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길을 따라 산책을 즐기는 연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태욱은 벤치에 앉아 과자 한 봉지로 갈매기들에게 인기 만점인 할아버지의 곁을 지나쳤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은 여전히 큰소리로 떠들어대며 다이빙을 하고 있었다.
태욱은 스페인의 산세바스티안에 있었다. 한적한 벤치에 자리를 잡은 그는 바라보이는 풍경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오롯이 눈에 담았다. 태욱은 이곳이 풍기는 아련한 느낌이 좋았다. 휴식이 필요할 때마다 그는 이곳을 찾았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앉아있던 그가 갑자기 옆에 놓아둔 가방을 찾았다. 태욱이 가방에서 꺼낸 것은 캐논 AE-1이었다. 열린 지퍼사이로 니콘 FM2도 보였다. 모두 중고로 구입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나온 공간과 공간에서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태욱은 디지털카메라보다 필름카메라가 더 좋았다. 필름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감성도 좋았고, 사진을 현상하기 위해 들이는 시간과 정성도 좋았다. 무엇보다 그는 셔터를 누를 때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감각과 소리에 중독되어 있었다.
문득 서희 생각이 났다. 태욱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정각. 통로에 들어서면서 이곳 시간으로 시계를 맞춰 놓았다. 한국은 저녁 7시였다. 아직 서희가 카페에 있을 시간이었다. 태욱은 서희가 11시부터 7시까지 8시간 동안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리하고 퇴근하기까지 보통 30분은 더 걸린다. 서두르면 볼 수 있었다. 태욱의 마음이 바빠졌다.
9년 전, 태욱은 서희의 곁을 떠났다.
변회장을 공간에 두고 나온 후, 태욱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다. 변회장과의 사건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본게임은 그 다음부터 시작되었다. 경찰 조사가 마무리 된 시점부터 그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태욱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태욱을 납치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변회장보다 훨씬 집요했고 악랄했다. 조실장도 그들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글로벌 기업인 SA그룹과 관련이 있다는 정도의 사실을 알아내는데도 꽤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도 그의 도움으로 고등학교는 졸업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였다. 이대로라면 서희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희는커녕 자기 한 몸 지키기도 힘겨웠다. 자신이 사라지는 수밖에 없었다. 조실장도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때부터 태욱은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다.
태욱은 단 한 곳만 빼고 지구상의 모든 곳을 다녔다. 그는 서희가 있는 서울에는 갈 수 없었다.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군요. 뭘 망설여요? 아직 이렇게 젊은데.”
“네?”
“그 사람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잖아요.”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뒷골목에서 우연히 만난 집시여인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태욱은 신비로워 보였던 그녀의 눈빛을 잊지 못했다. 그게 5년 전이었다. 그때까지는 서희가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았다. 그게 서희를 위한 거라 생각했다. 서희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길 위에서 태욱은 항상 혼자였다. 하지만 어디를 가도 서희가 있었다. 그는 바스티유 광장의 분수에서 손을 씻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서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허름한 술집에서 탱고를 추고 있기도 했고, 사하라 사막이 시작되는 튀니지의 두즈에서 키 작은 식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기도 했다. 또,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서 돌기둥에 기댄 채 낮잠을 자고 있기도 했다. 페루의 쿠스코 광장에도, 그리스의 산토리니에도, 베니스에도,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도 이란에도, 터키에도, 심지어 문득 올려다 본 하늘에도 그녀가 있었다.
집시의 말이 끝나자마자 태욱은 서희를 찾았다. 서희를 찾는 내내 손끝이 저리고 가슴이 출렁였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서희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서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들이 다시 나타날까 봐 두려웠다. 사실 그들보다 서희가 보일 반응이 더 두려웠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태욱은 서희를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