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욱아!”
서희의 간절한 외침이 공간 속을 채웠다.
“공간이 이렇게 생겼군.”
변회장은 무릎을 짚으며 일어나 허리를 폈다. 변회장과 조금 떨어진 곳에 누워 있는 태욱은 몸을 새우처럼 구부린 채 간신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변회장은 천천히 태욱 곁으로 다가갔다.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공간 안쪽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그들에게 바깥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동안 공간이란 데가 꽤 궁금했거든.”
태욱도 일어나고 싶었지만 배에 힘을 주자 기침부터 나왔다. 아까 총알이 스친 상처가 더 벌어진 것 같았다.
“어쨌든 공간이란 데를 구경시켜 준 건 고마워.”
‘퍽!’
변회장은 태욱의 배를 발로 힘껏 걷어찼다. 태욱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그런데 말이야. 조금은 실망했어.”
태욱의 기침은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허리는 구부정한 상태였다.
“생각보다 별로야, 여기.”
변회장은 태욱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 그럼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을 테니까.”
태욱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뭐라고? 앞의 말을 못 들었어.”
변회장은 태욱의 입에 귀를 가까이 대며 약 올리듯 말하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태욱의 배를 한 번 더 발로 걷어찼다.
‘퍽!’
태욱은 거의 기절할 뻔 했다.
“공간지배자라는 이름이 아깝다 아까워. 공간을 지배한다는 놈이 누워나 있고 말이야. 크큭.”
태욱는 신음을 참으며 겨우 하늘을 보고 누웠다. 조금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말인데 그 공간지배자라는 이름, 내가 가져야겠다.”
변회장은 태욱의 배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어뒀던 총을 꺼내들고 자신의 머리를 겨누었다.
“이 공간에서는 피할 수 없겠지?”
변회장은 태욱을 보며 윙크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생각 못했는데 말이야. 공간지배라는 능력, 나한테 정말 괜찮은 것 같은데? 하하하”
변회장은 진심으로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까지 젖혀가며 웃었다.
“그럼 이건 어떠냐?”
태욱의 말에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변회장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태욱이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었다.
“어디서 총이? 아니, 그보다 너 이 자식!”
변회장의 표정이 아까보다 한층 더 일그러졌다.
“일단 내려와.”
“알았어. 알았다고.”
변회장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태욱의 공간지배능력이 탐이 난 이상 그는 그 능력을 무조건 가져야했다.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잠깐, 진정하고 내 얘기 좀 들어봐.”
변회장은 천천히 태욱의 배 위에서 내려왔다. 총은 다시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왜 내가 죽을까봐 겁나나? 아니, 아깝나?”
“무슨 그런 말을. 그래 뭐, 이제 와서 거짓말은 소용없겠지. 하지만 생각해봐. 죽으면 네 손해야. 죽는 놈만 바보라고. 일단 살아서 나가면 다른 방법이 있지 않겠어?”
“그래, 나가면 말이지.”
“그렇지. 나가면 방법이 있을 거야. 우리 일단 나가서……?”
변회장의 표정이 갑자기 분노로 바뀌었다.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변회장은 총을 꺼내 태욱에게 겨눴다.
“이제야 눈치 채셨군.”
태욱은 자신의 머리를 겨누고 있는 총을 변회장을 향해 던졌다. 장난감 총이었다. 변회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죽여 버리겠어!”
낮고 어두운 변회장의 목소리가 공간 전체를 울렸다.
“쏘려고? 내가 죽으면 누가 너를 여기서 꺼내주지?”
태욱을 겨누고 있는 변회장의 총구가 흔들렸다.
“죽이면 안 돼!”
변회장의 눈빛도 총구를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죽여 버린다!”
변회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죽이면 안 돼!”
“괜찮아, 죽여 버려!”
“아니야! 안 된다고!”
변회장은 어느새 자기 머리를 감싸 쥐고 자신의 몸속에 가둬놓은 영혼들과 싸우고 있었다. 변회장의 자아가 붕괴되자 그 빈자리를 그동안 그가 힘으로 누르고 있던 영혼들이 차지하고 나섰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태욱은 손을 흔들며 뒷걸음질 쳤다.
“그럼, 여기서 사이좋게 잘 지내보라고.”
“자, 잠깐!”
변회장은 다급하게 태욱을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그곳에 그는 없었다.
“안 돼!”
공간에는 변회장의 절규만 가득했다.
공간을 빠져나온 태욱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서희를 안으며 쓰러졌다.
“윽!”
옆구리가 욱씬댔다.
“앗! 미안!”
반가운 마음에 몸이 먼저 반응한 서희는 태욱의 신음소리를 듣고서야 그를 놔주었다.
방 안은 조실장과 그가 이끌고 온 경찰에 의해 차분하게 정리되어지고 있었다.
태욱이 변회장과 공간으로 사라진 직후에 조실장이 경찰과 함께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다른 곳은 이미 모두 제압이 끝난 상태였다. 방 안에 있던 검은 양복의 사내들은 저항다운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주인 잃은 강아지들처럼 풀이 죽은 채로 자리를 떠났다. 고용주는 혼란한 틈에 모습을 감추었다.
조실장이 마지막으로 방을 떠나며 주선에게 눈짓을 했지만 주선은 고개만 저을 뿐 우재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조실장은 그대로 문을 닫고 사라졌다. 돌아서는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방에는 태욱과 서희, 우재, 그리고 주선만 남아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서희가 태욱의 옆구리를 지혈해주며 물었다.
“글쎄. 너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태욱과 서희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감돌았다.
“그런 건 나중에 둘만 있을 때 하라고.”
우재가 손을 휘저으며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주선도 그 뒤를 따랐다.
“자, 우리도 그만 가자고!”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 내가 살게!”
주선이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고기 아니면 안 먹어.”
우재가 앞장서며 메뉴를 정했다. 태욱과 서희도 웃으며 우재의 뒤를 따라갔다.
“주선아, 안 가고 뭐해?”
방문을 나서던 서희가 문에 붙어 있는 주선을 챙겼다.
“이제 가!”
한참을 앞선 우재를 향해 뛰어가는 주선의 뒤로 문 앞에 큼지막하게 써 놓은 글자가 서희의 눈에 들어왔다.
‘미친 개 있음! 문 열면 열라 후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