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
우재의 목소리가 통로를 들어가려던 태욱의 발목을 잡았다.
“자는 줄 알았는데?”
“좀 전에 깼어.”
24시간을 넘게 자던 우재는 허리가 아파서 일어났다. 깨어나 보니 조금 출출한 것 같았다. 우재는 본능적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리 하나를 공간에 넣고 있는 태욱을 발견했다.
“설마, 도망가는 건 아니겠지?”
대답을 망설이는 태욱의 태도를 보고 우재는 더 이상 대답을 기다리지 못했다. 비난의 가시가 태욱의 얼굴에 가서 박혔다.
“도망가는 거 아냐.”
태욱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럼 어디 가는데?”
대답을 망설이던 태욱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평생을 숨어서 살 수는 없어. 불가능하기도 하고.”
“뭐?”
예상하지 못한 태욱의 대답에 우재는 당황했다.
우재도 조실장으로부터 지금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래서 우재도 태욱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 생각하기에는 심하게 배가 고팠고, 가려운 곳이 지나치게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졸려서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재는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한 상태였다. 다시 말해서 우재는 지금 태욱이 하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설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태욱은 진지했다.
“돌아가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태욱이 우재를 돌아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목소리에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지금 태욱과 우재는 통로의 끝에 있었다.
“됐어.”
엷은 미소를 보인 우재는 되려 태욱을 재촉했다. 우재는 혼자 무리하는 조실장에게 미안한 마음을 내내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길상이가 변회장이라는 사실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과 서희의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우재의 눈빛을 확인한 태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통로를 먼저 빠져나갔다. 그리고 통로 안으로 손을 뻗어 우재도 통로 밖으로 끌어냈다.
그들은 섬의 가장자리로 있었다. 태욱과 우재의 시선이 섬의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건물에서 멈췄다. 예전에 호텔로 운영되다가 지금은 변회장 개인의 저택으로 이용되고 있는 건물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그들이 납치되어 있던 곳이기도 했다. 짙은 안개에 싸여 있는 저택은 달빛이 아니었다면 어두운 배경에 녹아들어 형체도 구분하기 힘들 것 같은 희미한 모습이었다.
‘부스럭’
풀숲에서 난 소리에 놀란 두 그림자는 한참을 허둥대다가 급하게 나무 뒤로 모습을 숨겼다. 잔뜩 긴장한 그들의 표정이 달빛에 그대로 드러났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식은땀이 흘렀다.
“야옹.”
소리의 범인은 고양이었다. 태욱과 우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빛을 교환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우재가 긴장을 늦추지 않고 태욱에게 물었다.
“일단 가야겠지?”
예상하지 못한 태욱의 대답에 우재는 고개를 돌려 태욱을 바라봤다.
“설마, 아무 준비도 안 했냐?”
“무슨 준비?”
우재의 당황한 얼굴이 달빛에 드러났다.
“일단 이건 갖고 왔는데.”
우재의 황당한 표정을 확인한 태욱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검은 물체를 꺼냈다.
“총?”
놀란 목소리였다. 우재는 태욱의 손에 있던 총을 빼앗듯이 집어 들었다.
“진짜 같지?”
총을 자세히 살피는 우재를 보던 태욱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랑하듯 말했다.
“진짜가… 아니야?”
“당연하지.”
태욱은 천진한 표정을 지었다. 우재는 아무 말 없이 태욱에게 다시 총을 건넸다. 앞뒤 재지 않고 무작정 따라온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러서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저택이 있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우재가 앞장섰다.
서희는 자려고 누웠다. 자기 전에 태욱과 함께 우재와 주선을 보려고 했지만 아직도 자고 있다는 얘기에 내일 보기로 했다. 태욱과 헤어진 서희는 충분할 만큼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그리고 따뜻한 우유도 마셨다. 그런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은 피곤했지만 아무리 뒤척여도 복잡하고 두려운 마음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자정이 넘어서 겨우 잠이 들었다. 그녀의 꿈에 변회장의 저택이 나타났다. 곧 저택의 모습이 더 가까워지고 창문으로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서희의 시선이 창문을 통과해 사람들이 모여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 돼!”
서희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방 안에는 태욱과 우재가 있었고, 그들의 맞은편에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두 명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들려진 총이 태욱과 우재를 겨누고 있었다.
“탕!”
총소리와 함께 태욱이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