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셨다. 태욱이 서희와 함께 숙소 안에 있는 통로를 이용해 빠져나온 곳은 안나푸르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이는 포카라였다.
서희는 경이로운 표정을 지었다. 하얀 눈과 붉은 노을이 바람에 섞인 채 안나푸르나를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곳이 처음이 아닌 태욱도 연신 감탄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안나푸르나의 절경도 태욱의 눈에 비친 서희 앞에서는 그저 배경일 뿐이었다. 서희는 홀로 빛을 내고 있었다.
“정말 봤던 그대로네.”
“응?”
서희의 말에 태욱의 정신이 돌아왔다. 서희의 얼굴에는 안나푸르나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태욱이 서희에게 질문을 했다. 서희는 여전히 풍경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조실장님에게 연락을 하는 게 좋겠지?”
대답을 하면서도 서희는 태욱을 보지 않았다.
“어떻게?”
그들은 추적을 받지 않기 위해 전화도 만들지 않았다. 조실장이 안전한 번호라며 알려준 곳으로 연락을 하려면, 우선 전화기부터 찾아야 했다.
“걸어야지.”
서희가 방향을 정하는 동작을 취했다.
“뭐?”
“뭐가 나올 때까지.”
방향을 정한 서희는 태욱의 손을 잡아 끌었다. 서희에게 붙잡혀 몇 발자국 끌려가는 것 같던 태욱도 곧 그녀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안나푸르나도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길을 하염없이 걷고 있는 태욱과 서희를 위로해 주지 못했다. 처음에는 좋았다. 그리고 드문드문 쉴 때도 좋긴 했다. 하지만 경이로운 자연을 아무리 눈에 담아도 주린 배가 채워지거나 아픈 다리가 낫지 않았다.
반나절이 넘도록 걸은 후에야 태욱과 서희는 문명과 마주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곳에서 기다리시면 제가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조실장의 일처리는 깔끔하고 신속했다. 조실장은 전화를 끊자마자 태욱과 서희가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는 한편, 우재와 주선이 즉시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곳까지 추적할 수 있는 조직이라면 더 이상 숨는 건 무의미할 것 같습니다.”
태욱은 조금 전 조실장에게 들었던 말을 다시 생각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봐도 조실장의 말이 맞았다. 그들로부터 숨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뭐해?”
서희의 목소리에 태욱은 어깨를 움찔했다.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급하게 등 뒤로 숨겼다.
“그건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서희는 태욱의 옆에 앉았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온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달콤한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태욱의 얼굴이 괜히 뜨거워졌다.
“나, 악몽 꿨어.”
태욱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잔뜩 내민 서희의 입술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나, 악몽 꿨다니까?”
태욱의 반응에 실망한 서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칭얼대는 어린아이 같았다. 서희는 태욱에게 아무 말이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다.
“무슨 꿈인데?”
“너.”
“나? 내가 악몽이라고?”
당황한 태욱의 표정이 재미있는지 서희는 웃음을 참으며 손을 저었다.
“아니, 네가 공간으로 사라지는 꿈이었어.”
“아, 내가 사라지는 꿈.”
태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이 되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사라지는 게 왜 악몽이야? 난 원래 사라지잖아.”
“그렇긴 한데, 네가 길상이와 함께 공간으로 뛰어들었거든. 그리고 그걸 보고 있는 나는 울고 있더라고.”
태욱은 길상이를 말하는 그녀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지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도 길상이가 변회장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꿈 일거야.”
태욱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서희를 위로했다. 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그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침울한 표정이었다.
“나, 사라지더라도 꼭 다시 돌아올게.”
태욱이 용기를 내어 진지하게 말했다. 서희가 웃었다. 농담으로 들은 것 같았다. 태욱은 서희가 웃은 것만으로도 괜찮았다.
“이것 봐!”
태욱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등 뒤에 감춰 두었던 물건을 꺼냈다.
“뭐야?”
태욱의 손에 들려있던 물건을 확인한 서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총?”
“장난감이야.”
태욱은 웃으면서 서희에게 총을 내밀었다.
“와! 진짜 같다.”
태욱에게서 총을 건네받은 서희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태욱을 향해 겨눴다.
“어디서 났어?”
“조실장님이 주셨어.”
“조실장님이?”
“응, 자기는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이걸로 과녁 맞추기 하면서 생각을 정리한다고.”
“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서희의 작은 몸짓에도 태욱은 괜히 마음이 설렜다.
“주선인?”
이상하게 빨리 뛰는 심장 소리를 들킬까봐 태욱은 애써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직 자.”
태욱은 아직 우재와 주선을 보지 못했다. 태욱과 서희보다 먼저 도착했다는 그들은 오자마자 오랜 시간을 들여 샤워를 했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식사를 끝낸 뒤에 바로 곯아 떨어졌다.
그들은 만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 의식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