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회장이라고만 알려져 있습니다.”
우회장의 손에는 변신형의 사진이 들려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고용주와 주길상, 그리고 태욱 일행이 잡혀 있었던 섬과 저택을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이 여러 장 흩어져 있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조실장이 계속 말을 이었다.
“이 변신형 회장이라는 사람도 베일에 싸여 있는데, 그마저도 얼마 전에 죽은 걸로 되어 있어서 이 이상의 정보를 찾아내기가 어렵습니다.”
“흠.”
우회장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두 눈을 감았다.
“우리의 정보력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집단이라…….”
침묵이 커다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우회장은 국가 이상의 정보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알 수 있는 내용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건 상대가 그만큼 위협적이라는 얘기였다.
“이건 정말 심각하군.”
그는 다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책상 너머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태욱과 서희, 우재, 그리고 자신의 딸인 주선을 바라보았다. 태욱과 서희, 그리고 주선은 우회장과 눈을 맞췄다. 우재만 고개를 숙인채 혼자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이곳으로 오는 동안 서희에게 들었던 얘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길상이가 더 이상 길상이가 아니야.”
서희는 울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말을 했다. 아니, 이해하기 싫은 말이었다. 태욱과 주선은 그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지만 우재는 아니었다. 그에게 길상은 형제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서희는 지금 그가 죽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코끝이 매웠다.
“우리 딸이 어려운 숙제를 가져온 것 같구나.”
우회장은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아이들이 앉아있는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우재도 고개를 들고 우회장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우리는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소파에 앉은 우회장은 아이들과 시선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목소리에서 강단이 느껴졌다.
“단 한 가지, 굉장히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은 알지.”
우회장은 잠시 말을 끊었다.
“조실장, 내가 이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왔다고 했지?”
우회장은 조실장이 있는 쪽으로 고개만 약간 돌렸을 뿐 시선은 여전히 아이들을 향해 있었다.
“빠른 판단과 공격적인 투자,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우회장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드러났다.
“잘 알고 있구만. 그런데 그거 말고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진짜 이유도 알고 있나?”
“네. ‘아버지를 잘 만나서’라고도 하셨습니다.”
“역시 잘 알고 있구만.”
태욱과 우재, 그리고 서희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주선만 늘 있는 일이라는 듯이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이만큼 누리고 사는 건 전부 부모를 잘 만난 덕이지. 내가 기부도 많이 하고 자선사업도 많이 한다고들 하지만 내가 부모님께 받은 거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정도야.”
우회장은 다시 말을 잠시 동안 끊었다.
“우재라고 했나? 자네가 전국 일등이랬지?”
우재를 보는 우회장의 눈빛이 따뜻했다.
“우재군은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는지 아나?”
“따님 얘기를 하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우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역시 다르군.”
우회장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우리 딸이 나처럼 부모 잘 만난 덕을 보고 살길 바라네. 내 삶이 편안했던 만큼 이 아이도 그랬으면 하네.”
“아빠,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세요?”
주선이 다급하게 우회장을 막았지만 그는 모른 척 했다.
“서희라고 했나?”
우회장의 시선은 서희를 향해 있었다.
“네.”
서희가 우회장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일단 한국을 떠나 있거라.”
우회장과 조실장은 주선이 장례식장에서 목격한 내용을 토대로 그들이 노리고 있는 대상이 서희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최소한 우리가 상대하는 게 고양이 새낀지, 호랑이 새낀지는 알아야겠다. 그것도 모르고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우리가 당할 수도 있어.”
“회장님?”
조실장이었다.
“뭔가?”
“일단 고양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가?”
우회장이 잠시 말을 끊었다.
“그렇겠군. 어쨌든, 어떤 상대인지는 알아야지. 그리고 주선아.”
“네.”
“너도 당분간 피해 있는 게 좋겠다.”
주선은 조실장을 쳐다봤다. 의견을 구하는 눈빛이었다. 주선과 눈빛이 마주친 조실장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주선의 대답이 인터폰의 목소리에 묻혔다.
“회장님, 지금 출발하셔야 합니다.”
우회장은 이미 이 문제를 대통령과 상의하기로 결정하고 약속을 잡아놓은 상태였다. 그는 일단 대통령을 설득해 경찰병력의 협조를 구해 놓을 생각이었다. 지금 출발해야 약속 장소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조실장이 알아서 처리해 줄 거다. 이 애비는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야겠구나.”
소파에서 일어난 우회장은 조실장에게 부탁하는 말을 남기고 방문을 나섰다.
“네 분이 계실만한 곳을 알아볼 때까지 제 지시를 잘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태욱, 우재, 서희, 그리고 주선은 조실장의 시선을 받은 차례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선 밥부터 먹을까요?”
조실장은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냈다.
그제야 그들은 어제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미래를 봐. 항상 보이는 것도 아니고, 전부 보이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틀린 적은 없었어.”
이동하는 차 안에서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서로에게 공개했다. 태욱과 서희는 이미 서로의 능력을 알고 있었지만 우재와 주선을 위해 자신들의 능력을 한 번 더 설명했다.
“난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에 숨거나 그 공간이 이어진 곳으로 나갈 수도 있어.”
“난 중력을 조정할 수 있어. 처음에는 내 주변만 할 수 있었는데 점점 범위가 넓어졌어. 지금은 문과 창문만 닫혀 있으면 교실 정도 크기까지는 조정이 가능해.
우재는 자신의 능력을 남에게 공개하는 게 처음이었다. 왠지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은 청량감을 느꼈다.
“난, 투시를 해.”
“투시? 그럼 막, 알몸도 보이는 거야?”
서희의 동그래진 눈을 보며 주선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주선의 끄덕임과 동시에 서희는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그리고 우재와 태욱의 손은 다소곳이 아래를 향했다. 모두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태욱과 우재의 젓가락은 아까부터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실망한 빛이 역력했다. 그들과 반대로 서희와 주선은 정말 맛있게 밥을 먹고 있었다. 서희와 주선은 신 김치와 된장찌개를 번갈아가며 공략하고 있었다.
몇 분 전만해도 태욱과 우재는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들은 어떤 반찬을 먹을지에 대한 기대를 잔뜩 하고 있었다. 그동안 말로만 듣던 산해진미를 상상하며 아우성치는 위를 겨우 달래고 있었는데 막상 차려진 반찬은 된장찌개에 신 김치, 김, 시금치 그리고 멸치볶음이 전부였다. 그 흔한 갈비도, 제육볶음도 없었다.
“와! 신 김치다!”
차려진 밥상에 실망한 그들과 달리 주선은 환호하고 있었다.
“특별히 작년에 묻었던 것을 꺼냈어.”
주선의 엄마였다. 우아한 그녀의 음성 사이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정말 맛있겠다.”
주선은 진심이었다.
“우리 주선이는 신 김치를 가장 좋아하거든.”
태욱과 우재의 표정을 알아챈 주선의 엄마가 그들에게 설명하듯 말했다.
“어떡하지? 우리가 고기반찬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집에 고기가 없네.”
주선의 엄마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우아했다.
“아니에요. 된장찌개에 김치면 됐죠. 고맙습니다.”
서희가 우재와 태욱의 옆구리를 치며 자리에 먼저 앉았다. 잠시 후 그들 앞에 달걀말이 반찬이 추가됐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과는 달리 주선은 신김치 국물에 밥을 비벼먹으며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