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은 어두웠다. 겨우 정신을 차린 서희가 눈을 떴다. 이마에서는 아직도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길상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곧 자신이 의자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길상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정신이 들어?”
길상의 목소리에 서희의 눈빛이 살아났다. 그녀는 길상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난 상처들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아?”
길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서희에게 닿았다. 말을 하려던 서희는 기침만 쏟아냈다. 배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기침이 멎은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정말이야?”
길상이 서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능력이 있다면서, 그게 뭐냐고 계속 물어보던데. 그게 무슨 소리야?”
서희와 눈에 간절한 표정의 길상이 들어왔다.
“능력?”
여전히 힘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조금 전과는 다르게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그래, 능력. 네 능력이 뭐냐고?”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길상의 눈빛이 반짝이는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길상아.”
“그래.”
서희는 길상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길상은 발가벗겨진 기분을 느꼈다.
“우리, 사귀자.”
길상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서희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진지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대로야. 나랑 사귀자고.”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길상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사귀자는데 할 말이 그거밖에 없어?”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일단….”
“역시 아니네.”
길상의 반응을 가만히 살피던 서희의 표정이 단단해졌다.
“뭐가…, 아니야?”
길상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길상이는 어떻게 한 거야?”
서희의 눈빛이 변했다. 여기까지였다. 변회장은 더 이상 이런 유치한 연기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아쉽군.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변회장은 의자 뒤에 두었던 손을 앞으로 모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름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변회장은 일부러 얼굴에 난 상처를 어루만졌다. 용주의 아이디어였다. 역시 그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서희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슬프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곧 그녀의 눈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할머니도 네 짓이지?”
“호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변회장은 기특하다는 투로 말했다.
“증거는 없었을 텐데.”
서희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반지, 할머니 손에 길상이가 준 반지가 있었어.”
변회장은 길상의 기억을 뒤졌다.
“흥, 치매 걸린 할망구가 쓸데없는 짓을 했군.”
길상은 잠시 서희를 쳐다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길상이가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도 말해 줬으면 좋겠군. 내가 궁금한 걸 못 참는 성격이거든.”
길상을 노려보던 서희의 눈이 매서워졌다.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기회가 생길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
“방금 네 반응.”
서희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응?”
“그래. 정말 길상이라면 사귀자는 내 말을 무조건 받아들였을 테니까. 어떤 상황이든 간에.”
두 눈을 꼭 감은 서희가 눈물을 떨궈냈다. 목소리가 더 단단해졌다.
“그건, 몰랐군.”
변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상이는 어떻게 했냐니까?”
서희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서희는 진심으로 길상이가 걱정 되었다. 길상과 모든 게 똑같아 보이는 저 사람이 길상이가 아니라는 생각에 무서운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끝없이 차오르는 눈물을 어쩌지 못했다.
“지금 그 녀석 걱정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길상은 서서히 서희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두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