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가면 위험할 것 같아. 그 사람들이 집도 지키고 있으면 어떡하려고?”
태욱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현관을 나서려던 서희는 태욱의 설득에 그의 집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서희는 오늘 할머니 저녁을 봐주기로 한 우재에게 연락을 했다.
“우재야, 할머니는 어떠셔?”
“오늘 길상이가 대신 갔는데.”
“그래? 알았어. 끊어.”
서둘러 우재와 전화를 마친 서희는 다시 길상에게 전화를 걸었다. 열 번을 넘게 걸어도 길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서희는 길상에게 톡을 남겼다. 서희는 지금까지 길상이가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두려움보다 할머니 걱정이 앞섰다.
“아무래도 나 가봐야겠어.”
서희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길상이 자신의 톡을 확인하고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낸 글을 확인하기까지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는 것도 이상했다. 모두 평소의 길상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초조했다. 더 이상 무섭다고 숨어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럼, 같이 가.”
태욱도 서희를 따라 일어섰다. 서희는 거절하지 않았다. 사실 서희는 내심 태욱이 함께 가 주길 바라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서희는 그가 우재나 길상이보다 더 의지가 되었다.
태욱이 먼저 서희의 집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태욱과 함께 집에 들어온 서희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가구는 부서져 있었고 물건들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할머니!”
서희는 태욱이 옆에 있는 것도 잊어버렸다. 넋을 놓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움직였다.
“할머니!”
서희는 할머니가 쓰시는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태욱은 말없이 작은 방으로 향했다. 안방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자기 방에 있는 태욱에게 가려던 서희의 눈에 닫혀 있는 화장실 문이 들어왔다.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서희는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천천히 열었다.
“할머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할머니는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서희는 무너지듯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서희의 다급한 외침의 미묘한 차이로 할머니를 발견한 것을 눈치 챈 태욱이 어느새 서희 뒤에 서 있었다. 할머니의 옷이 피에 젖어 있었다.
“할머니, 정신 좀 차려봐!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응? 할머니!”
서희는 할머니의 상체를 일으키며 세웠다. 할머니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안 돼! 할머니! 제발 정신 좀 차려 봐, 응?”
서희의 목소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태욱은 경찰에 신고부터 했다.
“할머니, 제발….”
울먹이는 소리와 함께 서희의 어깨가 들썩였다. 태욱은 묵묵히 그 옆을 지켰다. 위로해 줄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가슴이 저리는 것 같았다.
“잠깐만!”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던 태욱이 눈을 반짝였다. 그의 시선은 할머니의 손에 닿아 있었다. 좀 전과는 다른 태욱의 목소리에 서희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가득 찬 서희의 얼굴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손에 뭘 쥐고 계시는데?”
태욱의 시선은 여전히 할머니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서희는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할머니의 손을 자세히 보았다.
“그 손 말고 반대쪽.”
태욱의 말에 그녀는 할머니의 반대쪽 손을 살펴보았다. 무언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서희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할머니의 손을 폈다.
“반지?”
할머니의 손에는 얼마 전 길상이 서희에게 주려던 반지가 들려있었다.
“이 반지를 왜?”
서희는 할머니의 손에 들려있던 반지를 자신의 손에 꼭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