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던 태욱의 집에 불이 켜졌다. 현관문에는 서희가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들어와요.”
너무 늦은 시간이라 문을 연 카페도 없었고, 미성년자를 받아주는 술집도 없었다. 그렇다고 길에서 얘기할 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서희의 집에는 할머니가 계셔서 더욱 이런 얘기를 할 수 없었다. 결국 서희는 태욱의 집으로 왔다. 무섭기도 했지만 괜찮을 것도 같았다. 오는 길에 할머니에게는 적당한 핑계를 대며 늦는다고 전화해 두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혼자 산다는 말은 들었지만 왠지 그냥 들어가기가 어색했다. 서희는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거실에 발을 내딛었다.
“일단 앉아요. 물이라도 마시고 얘기하죠.”
소파에 앉아서 두리번거리는 서희에게 태욱은 물이 반 쯤 담긴 컵을 내밀었다. 태욱은 다른 편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서희를 보았다. 목소리가 한층 차분해져 있었다.
“어떻게 공간에 들어온 거죠?”
“아, 그걸 공간이라고 부르는구나.”
서희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제가 그냥 그렇게 부르는 거예요.”
“난 2학년인데 몇 학년이에요?”
서희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태욱의 집으로 오는 택시에서의 기억이 없었다. 함께 택시를 탄 건 기억이 나는데, 정신을 차렸을 땐 태욱의 집 앞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정신이 맑아져 있었다. 그녀는 태욱의 어깨에 남아 있는 침 자국을 보지 못했다. 일단 평범하고 쉬운 질문부터 하기로 했다. 그리고 태욱에 대해 알고 싶기도 했다.
“나도 2학년인데.”
“그럼 우리, 말부터 편하게 하면 안 될까?”
“그래.”
“난 박서희, 미래고 다녀.”
서희가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나면서 태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태욱은 서희의 미소에 집 안이 더 환해지는 것 같았다. 찰나였지만 분명히 멈춰진 순간을 느꼈다.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 난 최태욱, 현재고 다녀.”
간신히 입이 떨어졌다. 태욱은 얼떨결에 서희의 손을 잡았다.
“아, 배고프다. 뭐 먹을 거 없어?”
악수를 마친 서희는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향했다. 쏟아지던 잠이 물러난 자리를 이번에는 허기가 대신 채우고 있었다.
태욱은 서희의 손이 떨어져 나간 자신의 손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뭐?”
태욱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처참하네.”
서희는 냉장고 안을 확인하고 낙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냉장고는 생수를 보관하는 용도로만 쓰이는 것 같았다.
“뭐하는 거야?”
“배가 너무 고파서. 사실 아까 그 아저씨들 한 시간이 넘게 피해 다녔었거든.”
서희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참, 왜 쫓기고 있었어?”
태욱은 이제야 생각난 듯이 물었다.
“몰라.”
“모른다고?”
“그러게. 왜 쫓아오는지 물어나 볼 걸 그랬다.”
태욱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서희는 계속 주방의 이곳저곳을 뒤졌다.
“빙고!”
서희의 손에 라면 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짐작 가는 게 있기는 해. 먹을래?”
서희는 냄비에 물을 받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짐작 가는 게 뭔데?”
서희가 라면의 물을 맞추는데 집중하느라 둘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냄비에 담긴 물을 여러 번에 걸쳐 신중하게 따라낸 서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태욱은 그런 서희의 모습을 지켜보며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렸다.
“내 능력.”
“능력?”
“난 미래를 볼 수 있거든.”
서희는 태욱과 공간이라는 곳에 함께 있을 때부터 그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지를 고민했다. 어떻게 둘러대도 사실을 말하지 않고는 말이 되지 않았다. 그냥 전부 다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그도 평범한 것 같지는 않았다.
태욱은 말문이 막힌 채 서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너도 특별하잖아.”
“어떻게…….”
태욱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도 모를 정도였다.
“뭐?”
“내 능력은 어떻게 알았어?”
“봤어. 말했잖아. 미래를 본다고.”
“아.”
태욱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갸웃거렸다.
“그럼 그 사람들은 네 능력을 알고 있는 거야?”
물이 끓는 요란한 소리에 태욱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나도 모르겠어. 아직 누구한테도 말한 적이 없거든. 네가 처음이야.”
서희는 라면을 냄비에 넣으면서 말했다.
“확실해?”
“확실해. 내가 그런 사람들에게 쫓길 이유가 그거 밖에 없으니까 그건가 보다 하는 거지.”
서희는 태욱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정말 다른 이유는 없는 거야?”
“없어. 그거 빼면 난 그냥 평범한 여고생인 걸?”
서희는 다시 천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태욱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았다.
“미래를, 본다고?”
태욱은 아직도 정리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
“응, 그런데 항상 보이는 것도 아니야. 그렇다고 전부 보이지도 않고. 사진처럼 어떤 장면만 보일 때도 있고, 동영상처럼 보일 때도 있고 그래.”
서희는 냄비 뚜껑을 열고 라면을 저어줬다.
“항상 보이는 건 아니다?”
“응. 갑자기 그냥 보여. 참! 꿈으로 꿀 때도 있어.”
서희는 불을 끄고 가스를 잠갔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로또 번호는 안보이더라.”
태욱은 뜬금없는 그녀의 농담에 미소를 지었다. 서희의 표정은 진지했다.
“진짜 안 먹어?”
서희는 냄비를 식탁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응.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떡해? 먹어야지.”
서희는 굳어있는 태욱의 표정을 살폈다.
“미안, 그러게. 이제 어떡하지?”
말과는 다르게 서희는 태연한 얼굴로 젓가락으로 들어 올린 라면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부모님이나 경찰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
태욱은 말하면서도 스스로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경찰이 자신들의 말을 믿어줄 리가 없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경찰도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미안해.”
“괜찮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태욱은 자신과 대화를 하면서도 쉴 새 없이 오물거리는 서희의 입이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네 능력은 뭐야?”
서희가 먼저 침묵을 깼다.
“뭐?”
“네 능력 말이야. 정확히 어떤 거냐고.”
태욱은 당황했다. 태욱도 지금까지 자신의 능력에 대해 누구한테도 말해 본 적이 없었다. 낯선 느낌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냥 나만 보이는 공간이 있어. 거기에 들어가면 아무도 나를 못 보고.”
“우와! 투명인간 같은 건가?”
서희의 입은 여전히 오물거렸다. 라면 한 개의 양이 저렇게 많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투명 인간은 아니고.”
“그래?”
왠지 실망한 눈치였다. 태욱은 왠지 서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공간 중에는 다른 곳으로 연결되어 있는 통로 같은 데도 있어.”
“정말? 그럼 공간이동 같은 거야?”
서희의 눈이 다시 반짝거렸다.
“그건 좀 비슷한 것 같다.”
“이야! 대단해! 그럼 막 외국도 갈 수 있어?”
아까보다 더 밝은 빛을 내는 서희의 눈빛을 받으며 태욱은 괜히 목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 나 아직 한 번도 외국에 못 가봤는데.”
“맞다! 아까는 어떻게 한 거야?”
태욱은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는 듯이 급하게 물었다.
“뭘?”
“아까 어떻게 공간으로 들어왔냐고.”
“몰라.”
“몰라?”
“응, 몰라.”
“정말 몰라?”
“응, 그냥 봤던 대로 한 게 전부야.”
태욱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까지 자신의 공간 속으로 누군가가 함께 들어온 적이 없었다. 궁금한 게 많아졌다. 덩달아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아졌다.
“잘 먹었다. 이제야 좀 살 거 같네.”
서희는 라면 한 그릇을 다 비워냈다.
“라면 잘 먹었어.”
냄비를 싱크대에 내려놓으며 서희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손님인데, 설마 설거지까지 시킬 건 아니지?”
“그보다 먼저 해볼 게 있어.”
“뭔데?”
태욱은 서희를 데리고 다짜고짜 베란다로 향했다.
태욱은 서희를 데리고 학교에 다녀왔다. 그는 지금까지 공간에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볼 수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서희도 공간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손을 잡아주면 공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공간 안에서는 그녀의 숨소리가 더 가깝게 들리는 것 같았다. 빨라진 심장박동이 새롭게 알게 된 사실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 때문인지 헷갈렸다.
서희는 태욱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꼭 주었다. 태욱과 떨어지면 공간 안에 갇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부터였다.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여러 번 반복하니 조금 시시해졌다. 서희와는 다르게 태욱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는 태욱을 지나쳐 현관으로 향했다.
“그럼 난 갈게.”
“간다고?”
태욱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할머니가 걱정하셔.”
“안 돼!”
태욱은 튕기듯이 소파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