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는 바닥에 떨어질 걸 대비해 몸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리고 곧 자신이 바닥이 아닌 태욱의 몸 위로 떨어졌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빨리 일어나려고 했다. 땅을 딛기 위해 뻣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바닥이 물컹했다. 그녀는 태욱의 종아리를 밟았다. 그녀가 다시 중심을 잃고 그의 몸 위로 넘어졌다. 태욱은 신음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윽!”
“미안해요!”
“일단,”
태욱은 잠시 숨을 골랐다.
“내려와요.”
태욱은 두 마디도 말하기 힘들었다. 겨우 말을 맺었다. 서희는 서둘러 그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그의 옆에 바짝 붙어서 태욱이 앉을 수 있게 부축했다.
“괜찮아요?”
태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겨우 숨을 돌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동그래진 눈으로 서희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쉿.”
서희는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며 눈짓을 했다. 서희는 시선 끝에 그들을 바로 앞에 두고 두리번거리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의 모습이 보였다.
서희와 태욱이 함께 있기에 좁은 공간이었다. 둘은 비좁은 박스 안에 구겨져 들어간 고양이 같았다.
“편의점?”
여전히 놀란 눈으로 서희를 바라보던 태욱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쉿!”
서희는 여전히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공간 밖에서 서성이는 검은 양복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걱정 마요. 저쪽에서는 안 들리니까.”
“그래요?”
서희가 태욱을 보았다. 검은 양복들을 피해 다닐 때보다 더 심장이 두근거렸다. 심장소리가 그에게 들릴까봐 조마조마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서희는 태욱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도 검은 양복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태욱은 여전히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녀와 닿아있는 어깨에 온 신경이 쏠렸다. 어지러웠다. 수많은 질문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밀려나갔다. 정리되어지지 않는 생각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헝클어졌다. 태욱은 그중에 잡히는 아무 말이나 입 밖으로 꺼냈다.
“샴푸는 뭐…, 아니 그보다 정체가 뭐에요?”
주파수가 고장 난 라디오 같았다.
“편의점 맞아요.”
서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어주었다. 그녀도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태욱보다 먼저 본 미래대로 행동했을 뿐 그녀도 아는 게 없었다. 검은 양복들이 자신들을 왜 보지 못하는지, 이 남자는 어떻게 이런 곳에 들어올 수 있는지, 여기는 어떤 곳인지, 서희도 태욱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죠?”
생각보다 쉽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지금 상황에서 ‘정체가 뭐에요’의 대답이 ‘편의점’은 아니라는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냥 넘어갔다. 도대체 ‘편의점’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궁금했다. 아무래도 ‘샴푸’라는 말은 잘못 들은 것 같았다.
“나도 몰라요. 그런데 편의점이면 대답이 돼요?”
“일단은요.”
‘편의점’이라는 대답에 만족한 게 확실했다. 이 남자, 허술하다.
“왜 쫓기고 있어요?”
태욱의 눈이 서희와 마주쳤다. 크고 맑은 눈이 그를 향해 깜박였다. 머릿속으로 간신히 정리한 수많은 질문들이 다시 흩어졌다. 차곡차곡 쌓아놓은 종이들이 선풍기 바람에 전부 날아간 것 같았다. 태욱은 자신의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꼈다. 그녀의 향기는 여전히 좋았고, 미세하게 들리는 숨소리도 달콤했다.
“그것도 몰라요.”
서희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기가 찼다.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괜히 미안했다. 태욱은 그녀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하얀 볼이 달빛을 받아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리에 피…….”
태욱의 말에 서희가 자신의 다리에 시선을 주었다. 찢어진 스타킹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무릎 바로 아래쪽이었다. 넘어지면서 까진 것 같았다.
“아야!”
너무 긴장한 나머지 상처가 난 줄도 몰랐다. 상처를 눈으로 확인하자 지금까지 느끼지 못하고 있던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태욱이 말없이 가방 안에서 연고가 발라져 있는 반창고를 꺼냈다. 늘 간단한 비상약을 챙겨서 다니는 습관은 혼자 여행하면서 생긴 좋은 습관 중 하나였다. 서희는 태욱이 가진 의외의 모습에 여러 번 놀라고 있었다.
“고마워요.”
서희의 말에 태욱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얼굴에서 새어나오는 미소를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은 태욱과 서희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한참동안 그곳을 지켰다. 그들이 전부 사라지고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서희와 태욱은 조심스럽게 공간 밖으로 나왔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서희는 우선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너무 피곤해서 아무데나 쓰러져 잠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정리는 나중에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잠깐만요!”
태욱은 돌아서는 서희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우리, 얘기 좀 하죠.”
“뭘요?”
서희는 최대한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태욱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이대로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눈빛으로 발산하고 있었다.